참으로 요상한 세상이다. ‘외로움’을 대상으로 돈벌이를 하는 직업이 미국에는 성행한다고 한다. 시간당 30달러를 내면 식사와 쇼핑 등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대여 서비스업’과 시간당 80달러로 외로운 사람을 안아주는 ‘커들리스트(Cuddlist)’라는 회사가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그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긴 사유의 역사 속에서 ‘외로움’은 항상 고귀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외로움은 인문학의 원천이고 한 밤의 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관리의 대상이 된 것인가?

방영준 성신여대 명예교수.

美서 외로움 대상 돈벌이 성행
‘외로움 담당 장관’ 임명한 英
이젠 외로움마저 관리하는 시대

현대의 외로움, 개인·구조서 기인
상호 관계하며 생존 문제로 확대

붓다는 위대한 외로움의 관리자
우린 많은 존재 도움으로 살아가
함께 하는 ‘공업중생’임을 알아야

지난 1월 영국 총리는 트레이시 크라우치를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ss)’으로 임명하였다. 그 장관은 외로움 관련 전략을 마련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사회단체 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을 연결하는’이라는 용어가 깊게 다가온다. 외로움의 원인은 사람 간의 연결이 단절에 있다는 것이리라. 행복도가 높은 나라로 꼽히는 부탄은 행복성이라는 정부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그 주요한 목적을 사람 간의 바르고 따뜻한 관계의 유지에 두고 있다. 외로움 담당 장관과 행복성 장관의 역할이 동일하게 보인다.

외로움에 대한 담론은 여러 차원에서 다양하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외로움에 대한 철학적 사변은 사치가 되어 버렸다. 외로움은 실존의 문제가 아니고 생존의 문제로 전락되어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거론되는 외로움은 개인적 측면과 사회구조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번거로움과 불편을 회피하고 반려 동물이나 스마트폰 등 다양한 무생물들을 동행자로 삼는 경우가 개인적 측면의 외로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혼밥족’이라 불리는 대상이 이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공동체성 붕괴, 가족 관계의 해체, 고령화 사회 등의 원인에서 나온 외로움은 사회구조적 측면이다. 노약자 등 사회 소외 계층의 외로움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개인적 측면과 사회구조적 측면은 서로 배타적인 것인 아니라 밀접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면 외로움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붓다는 위대한 외로움의 관리사다. 웬 외로움의 관리사? 붓다는 외로움 때문에 출가하였다. 인간 삶이 지닌 생로병사를 보고 깊은 존재의 외로움을 느꼈고, 이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치열한 수행을 하였고, 드디어 깨달음을 통해 외로움을 넘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법의 핵심은 ‘함께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공동체다. 또한 모든 공동체는 개체이다. 따라서 연기법을 증득하면 외로움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외로운가? 연기법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존재의 도움을 얻어 살아간다. 그런데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줄 착각한다. 이 착각에서 벗어날 때 붓다의 ‘자비 사상’이 나온다. 자비란 ‘maitri’와 ‘karuna’를 번역한 것으로 어원상으로 풀면 ‘우정’과 ‘공감’으로 볼 수 있다.

외로움에 빠져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한 최대의 치유는 바로 우정과 공감이다. 연기법을 일상 삶의 틀에서 체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여기에 자비수행이 중요성이 있다. 자비수행을 통해 연기법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수행은 자비실천이다. 오늘날 자비 실천의 과제는 타인에 대한 우정과 공감을 사회구조와 제도에 어떻게 투사하느냐에 있다. 현대사회의 외로움 극복은 단순한 개인의 선업(善業)의 차원을 넘어 사회가 함께하는 공업(共業)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어찌하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으니.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