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기산 김상희가 보낸 편지

추사 김정희의 동생 기산 김상희가 1844년 11월 초의 스님에게 보낸 친필 편지. 초의와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히 담겼다.

기산(起山)은 김상희(起山 金相喜, 1794∼1861)의 자(字)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아우로, 기산(起山)이외에 기재(起哉)라는 자를 썼으며 호는 금미(琴?)이다. 영유 현령을 거쳐 호조 별장을 역임했다.

그와 초의는 평생 교유했는데 이들이 처음 만난 시기는 대략 1815년경이라 여겨진다. 당시 초의의 상경 연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학림암에서 추사를 만난 계기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이는 초의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인연을 만난 셈이었다. 특히 초의의 학문적인 지향이나 수행, 그리고 새로운 시대 조류를 체험할 수 있었던 창구는 바로 추사였던 것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초의는 추사를 통해 그의 형제들뿐 아니라 경향에 역량 있는 사족들과의 폭 넓은 교유를 확대할 수 있었다.

추사의 동생인 기산 김상희가
1844년 11월 초의에 보낸 편지
“금강 담론 회상해보니 환희천”
지난날 佛法 논하던 그리움부터
유배 중인 형에 대한 걱정 담겨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김상희는 추사의 둘째 아우이다. 그가 언제부터 차를 애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차를 애호했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초의가 쓴 ‘기산이 차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 장구의 시를 보냈기에 그 운에 따라 화답하고 아울러 쌍수도인(김정희)에게도 올린다(起山以謝茶長句見贈次韻奉和兼贈雙修道人)’ 는 그의 차에 대한 애호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물론 이 시에는 차로 맺어진 이들의 우정을 “한 번 얼굴을 돌려보고 하나 같이 기뻐하니/ 무슨 정이 더 간절할 수 있는가(一廻見面一廻歡 有甚情懷可更切)”라 하였으며 그에게 보낸 초의차는 “내 그대에게 한마디를 청하노니(我從長者請下一轉語) 법희의 공양, 선열의 음식을 탐욕스런 사람과도 나누리(法喜供禪悅食還將容??)”라는 것이다. 법희와 선열은 <동다송>에도 언급한 초의의 다도 세계이다. 따라서 이들은 오묘한 차의 경계는 공유했던 벗이며 차의 진면목을 담론했던 지기인 셈이다.

이처럼 초의차의 세계를 함께 즐겼던 김상희는 1844년 11월 11일,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무렵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된 지도 4년이 지났으며 김상희의 나이도 지천명(知天命, 천명을 아는 시기)이 되었다. 그런대 그의 편지에는 형에게 보낸 편지의 회신도 수 십일이 지체되기 일쑤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했던 그였기에 초의를 통해 형님의 소식을 빨리 전해 듣고자했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편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크기는 대략 40.5×29.3cm이다. 한지에 단정한 행서체로 썼다는 점에서 초의에게 대한 그의 정중함이 행간에 묻어난다. 그리고 편지 봉투에 ‘초의선탑 회전(草衣禪榻 回展)’이라 쓴 묵서로 보아 이 편지는 초의에게 보낸 답장편지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편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스님과 떨어진 지가 지금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 막힌 것을 형기(形器)로서 말한다면 오직 일단의 신령한 흉금이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북쪽 땅은 깊은 겨울이라 빙설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이때에 스님의 경지는 진열(眞悅)하시며 또 어떠신지요. 궁금함이 바다 물처럼 흐릅니다. 저는 치발(齒髮)이 모두 위태로워 옛날의 내가 아니며, 근심으로 부글부글 타듯이 마음이 졸아들어 설령 억지로 웃고 말하더라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해상(海上, 제주도)의 소식은 수개월 동안 막혀 설령 한 통의 편지를 얻어 이미 (답신을)보냈는데도 수십 일이 지체됩니다. 스님이 계신 남쪽 하늘을 목을 빼고 바라보며 허둥지둥 책이나 시에 마음을 졸일 뿐입니다. 오랫동안 이미 울타리 가에 버려진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지만 지난 번 금강(琴江) 정자에서 스님들과 불법을 담론하던 일을 회상하니 이 무슨 환희천(歡喜天)입니까. 새 달력을 펼치니 더욱 흐르는 세월을 머물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먼 그리움으로 더욱 자신을 지탱할 수 없지만 두 가지만을 전달하니 어느 때 스님의 자리에 도착될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를 대하니 캄캄합니다. 스님께서 마땅히 깨달으시길. 다 쓰지를 못했습니다. 어느 틈에 한 번 한양(冽上)에 오시려는지요.
1844년 눈 내리는 섣달 11일 기산 김상희

(與師阻 今幾日月矣 其阻也 以形器言 唯一段靈襟 何能障?也 北陸冬深 氷雪塞地 此際禪居眞悅 復何如 溯注如海 俗人 齒髮俱危 非舊我 而憂思煎? 雖强言笑中 未必然 海上信息 動阻數箇月 縱一得書 發已積屢旬 引領南天 只欲狂煎書卷詩筒 久已在?籬外 回思?時琴江亭子 與師輩?拂談乘 是何等歡喜天也 新蓂已開 益覺流光難住 遠懷尤不自持 第以二件轉付 未知何時到得蓮座耳 臨紙?? 師當領之 姑不? 何間欲一卓錫於冽上否 甲辰 雪臘 十一日 起山)

이들이 서로 소식이 두절된 지도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이 편지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렇지만 이런 일시적인 단절을 마음에서 보면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의 나이 이미 50세가 지났기에 “치발(齒髮)이 모두 위태로워 옛날의 내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오십의 나이는 청춘이라고 하지만, 조선 후기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지금과 비견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러기에 나이 오십인데도 이빨이나 머리털이 성글어졌다고 하는 것이리라. 어디 나이만 탓할 수 있으랴. 그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은 유배된 추사의 병고가 깊어 갔고 그 또한 “근심으로 부글부글 타듯이 마음이 졸아들어 설령 억지로 웃고 말하더라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한 처지였다.

김상희가 우려한 추사의 병에 관련된 정보는 1844년경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엔 병고가 깊어져 괴롭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해 봄,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치 허련(小癡許鍊)편에 보낸 편지에도 그의 어려운 상황이 잘 노정되어 있다.

한편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 와서 둘째와 막내의 안부 편지와 스님의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라는 내용도 보인다. 따라서 추사는 하인 편에 김명희, 상희, 초의의 안부 편지를 받고 크게 위안을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추사가 “나는 괴로운 상황이 전과 같다”라고 한 내용도 보임에 따라 입과 콧병을 앓고 있던 그의 정황은 호전의 기미가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김상희의 근심과 형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 속내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조금 더 추사의 병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추사는 입과 코의 풍기와 화기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초의에게 자주 ‘신이화(辛夷花)를 올 여름에 많이 거두어 말렸다가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추사가 신이화를 보내달라는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신이화는 백목련 꽃 봉우리를 말하는데 콧병을 치료하는 한약재로, 특히 축농증 치료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가 코와 입병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편지는 대략 1842년~1944년 경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1844년 소치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다른 인편을 통해 보낸 편지에도 “저는 입과 코가 풍증과 화기로 오히려 고통스럽지만 그냥 둘 뿐입니다. 허군이 가지고 간 향실(일로향실)편액은 바로 받아 거셨는지요”라고 한 내용이 눈에 띈다. 이를 통해 추사는 아픈 와중에도 초의에게 성의를 다한 선물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소치 편에 보낸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편액 글씨는 1844년경 제주 유배지에서 쓴 것이며 이는 초의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편지가 역사 연구, 특히 미세사(微細史)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앞에 언급한 김상희의 편지로 돌아가 보자. 그가 이 편지에서 “스님이 계신 남쪽 하늘을 목을 빼고 바라보며 허둥지둥 책이나 시에 마음을 졸일 뿐입니다”라고 했던 것일까. 이는 형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소식을 전해 듣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드러낸 말이라 여겨진다. 더구나 이 무렵 그의 상황은 “오랫동안 이미 울타리 가에 버려진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집안 형편이 침체된 정황을 이리 표현한 것이리라.

이런 와중에서도 그의 마음에 위안을 준 것은 “지난 번 금강(琴江) 정자에서 스님들과 불법을 담론하던 일을 회상하니 이 무슨 환희천(歡喜天)입니까”라고 한 점이다. 환희천(歡喜天)은 대성환희자재천(大聖歡喜自在天)의 약어이다. 얼마나 기쁘고 자재한 세계라는 말인가. 답답한 그의 마음을 시원하게 터 준 것이 바로 초의와 나눈 출세간의 담론이었다는 점을 다시 드러낸 셈이다.

아무튼 그가 처한 현실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한“재파리외(在?籬外)”는 울타리에 버려진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파리변(?籬邊)’이란 말과 같은 뜻을 지녔다. 얼마나 가치 없는 물건이면 울타리 가에 버린 물건이랴. 그 자신의 처한 현실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 편지의 말미에는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게 하는 책력, 즉 새 달력을 펼쳐 보면서 “더욱 흐르는 세월을 머물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해가 바뀌고 새해가 오면 친한 이에게 달력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물론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예나 지금 사람들이 모두 동일하게 느끼는 소회일 것이다.

초의와의 해후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담아낸 언구로 “어느 틈에 한 번 한양(冽上)에 오시려는지요”라고 한 부분이다. 이 대목을 읽은 초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이들이 나눈 푸근한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긴 여운을 남기는 말은 진심이 아니면 그 따뜻한 정감도 전해지지 않는 법이다.

아무튼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이치이다. 그러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입처(立處)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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