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승가대학장 현진 스님

통도사 불교대학 특강…주제 :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

불교는 부처님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불자로서 부처님이 되기 위해 제대로 정진하고 있을까? 지혜의 빗자루는 공부할 수록 섬세해진다고 한다. 섬세한 빗자루로 온 마음을 다해 마음을 쓸어내야 할 것이다. 통도사 승가대학장 현진 스님은 1월 27일 통도사 불교대학 특강에서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을 주제로 강의했다. 현진 스님은 “부처님의 성도재일처럼 우리도 자신의 납월 8일을 찾아서 깨달아야 한다”며 “번뇌가 늘러 붙지 않도록 수시로 쓸어서 번뇌를 지혜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박진형 기자
현진 스님은… 1973년 통도사 바로암에서 원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 무비 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보성 스님에게 전계를 받았다. 조계종 승가대학원을 1기로 졸업하고, 통도사 승가대학 중강, 직지사 승가대학 강사, 송광사 승가대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통도사 승가대학장을 맡고 있다. 사진제공=통도사 불교대학

공부 할수록 빗자루 섬세해져
마음 다해 조심히 다뤄야한다
휴식 없이 수시로 정진해야…

설법전을 다른 말로 하면 개대환희전이라 합니다. 개대환희(皆大歡喜), 어디서 들어본 거 같죠? 우리가 경을 읽는 이유, 수행을 하는 이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일깨워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누군가 물으면 ‘모든 사람을 다 환희케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이르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크게 환희로울 수 있기 위해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모두를 환희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찾아서 6년 동안 수행을 했습니다. 6년 동안 수행을 한 석가모니를 통해 깨친 것으로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개대환희인이 돼야 합니다. 우리 집은 개대환희전이고 질투하고 욕심 많고 성내는 사람이 그 안에 살 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은 교리를 배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리로 배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학자에 불과합니다. 불교는 부처가 되어가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종교의 교(敎)가 아니고 부처가 되어가는 사람이 해야 하는 도리,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행, 마음을 배워가는 것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불교대학에서 불교의 입문반, 경전반 이런 것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하나의 이름일 뿐입니다. 그 길을 가는 가운데 무엇을 배우는지 알지 못하면 입문반이든 경전반이든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개대환희로 나의 한 가지 행위가 어떠할지 일깨워가는 겁니다.

나의 납월 8일은 언제인가
부처님의 납월 8일은 성도재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납월 8일은 전부 다 다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십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납월 8일은 내가 깨닫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과연 나의 납월 8일은 언제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납월 8일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은 초파일도 신중기도도 아니고 납월 8일입니다. 이 날을 향해 걸어가는데 있어서 내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걸어가야 하는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성제, 육바라밀을 배워야합니다.

나만의 납월 8일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 내 행위가 다른 이를 기쁘게 하는 걸음이 되기 위해 육바라밀을 배워야합니다. 부처님은 새벽에 이르러서 납월 8일 새벽에 ‘계명성이 동쪽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고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렸다고 내 그렇게 들었노라’고 하십니다. 달 주변의 샛별은 3천년 전에도 동쪽에서 빛나고 있었고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샛별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어째서 누구는 저 별을 보고도 3천년 전 석가모니가 그랬던 것처럼 깨치지 못할까요.

부처님은 ‘모두를 환희케 할 수 있는 그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고민하면서 마지막 정진을 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우쳤습니다. 우리도 매일 새벽에 눈을 떠 동쪽 하늘을 본다면 그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샛별을 보고 깨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서 설하는 것은 부끄럽습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 제 찻상에는 찻잔이 몇 개나 되고 책장에는 책이 수십 권이 되고 양말도 속옷이며 겉옷이며 도대체 얼마나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왕자가 누렸던 그 호사스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왕자가 어느 날 거지의 옷으로 바꿔 입습니다. 그리고 6년동안 모두를 환희케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자꾸 뭔가가 늘어납니다. 저도 이것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분명히 비워라, 내려 놓아라 하는데 이상하게 제 방에는 자꾸 늡니다. 그래서 ‘올해 납월 8일에 나는 무엇을 내려 놓았는가’ 해보면 오히려 들어앉는 게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불교대학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성제를 잘 안다’ 이런 것은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공부를 통해서 작은 거 하나라도 내려놓았는지를 돌아보고 일깨우지 못한다면 불교대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가 되어가는 큰 학문, 불교대학은 그런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어가는 장소에 와서 내 걸음걸이를 되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많이 잘못되었겠지요.

부처님은 6년 동안 품었던 의심덩어리가 샛별을 바라보는 동안 해소된 겁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곁에 다가가 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작은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일찍 깨우쳐주려고 해도 안 됩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됩니다. 숨을 헐떡이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때에 가면 무슨 가르침이 들어가겠습니까? 눈을 맞춘다는 것이 적절한 때를 아는 겁니다. 때에 맞춰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내 앞에 다가온 인연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뭔가 자기 자신의 한 가지의 깨우침을 깨치기 위해 여기에 오셨습니다.

미움은 내가 만드는 것
이 속에서 모인 분들은 전부 인연으로 만난 분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유 없이 그냥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그런 사람이 항상 내 앞에 앉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 눈앞에 드러나야 꼴 보기 싫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어서 미운게 아니라 내가 꼴보기 싫은 것을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는 겁니다. 이곳에 온 이유를 자기자신이 놓쳤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납월 8일을 향해 가는 사람이 왜 그런 눈을 갖습니까? 그것은 어떤 이유를 갖다대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왜 눈엣가시같이 그 사람을 봅니까? 그 사람이 맨날 먹는 밥에다 흙을 퍼넣은 것도 아니고, 자기한테 뭐라고 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밉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빈약해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내 자신이 이렇게 형편없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면 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꼴 보기 싫은 것을 찾으려니까 얼굴도 예쁘고, 일을 해도 자기보다 잘하고, 발 뒷꿈치가 동그란 것이 보기 싫답니다. 발 뒷꿈치가 안 동그란 사람이 어딨습니까. 참 이유라 할 것도 아니지요.
결국 우리자신이 다른 사람을 거슬리게 봐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랬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모자라거나 하찮은 존재는 없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부처님의 종자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가 못났습니까?

수시로 번뇌를 쓸어라
나라는 것은 쓰다가 버릴 쓰레기와 같습니다. 이것을 계속 쓸어야합니다. 한 번 쓸어서 절대 안 없어집니다. 얼마나 진득하게 묻어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번뇌라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것이 눌러 붙어있습니다. 수시로 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우개도 만들고 지혜라는 빗자루도 만드는 겁니다. 거친 것을 쓸기 위한 대빗자루도 만들고, 수숫대로 만들어 쓰는 빗자루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교대학에서 공부를 배우면서 점점 더 섬세하게 쓸 수 있는 빗자루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 빗자루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소지소지 소심지’라고 연세 드신 분은 청소하는 것을 소지한다고 합니다. ‘소지하세 소지하세 쓸어라 쓸어라. 소지소지 소심지.’ 처음에는 큰 빗자루로 쓸었다가 점점 공부가 섬세해져서 이제 지혜의 빗자루를 들었습니다. ‘쓸어라 쓸어라 내 마음을 쓸어라. 소지소지 소심지.’ 내 마음을 쓸지 못한다면 그저 이 세상에 먼지만 뽀얗게 일으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빗자루질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내 마음의 빗자루는 마음을 다해서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듯이 쓸어야합니다.

잠깐만 방심하면 입에는 개, 돼지, 지렁이가 튀어나옵니다. ‘쓸어라 쓸어라 마음 땅을 쓸어라.’ 마음을 쓸지 못하면 번뇌만 일으킬 뿐입니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알려주는 게 좋아서 알려주다보니 잔머리만 늘고 마음이 착 가라앉지 않습니다. 뭔가 배워서 불교대학 안 온 분에게 가르쳐주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러 불교대학에 왔는지 잊어버리고 말을 엮는 기술만 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른 다시 쓸어야지요.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지혜의 빗자루로 쓸어야합니다. 이 빗자루는 모든 사람이 들고 있습니다. 다만 들고 있는지 사람들이 모릅니다.

무명이라는 것을 쓸어내서 다시는 내 집 문 앞에, 마음 집 문 앞에 티끌도 얼쩡거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빗자루로 쓸기만 하면 그것은 무명이 아니라 지혜로 바뀝니다. 내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지혜로 바뀌기도, 욕심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 손에 빗자루를 어떻게 할지가 달려있습니다. 무명번뇌를 다 쓸어서 지혜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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