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전(대웅전) 폐지와 법당의 등장

당대 조사선 철저한 수행집단
형식적 존재 부정-불상 폐지 등
〈임제록〉 선어록의 정상

삽화. 강병호

선(禪)은 사상적으로 당대 조사선이 가장 우뚝했다. 당대선(唐代禪), 또는 조사선은 권위와 우상을 배격했다. 오로지 공(空)과 반야지혜의 관점에서 불상이나 형상·권위 등은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수행의 목적도 공(空)의 실현과 반야지혜의 체득, 그리고 본래 청정한 불성의 발현에 두었다.

당대 조사선은 철저하게 사상적,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는 결사(結社) 집단이었다. 종교적·신앙적인 집단이 아니고, 성불작조(成佛作祖, 부처와 조사가 됨)를 위한 수행 집단이었다.

육조혜능에서 발원하여 남악회양·마조도일·조주·남전·백장·황벽·위산, 그리고 임제할·덕산방·운문 간시궐 등 이른 바 조사선의 맹주들은 날카로운 취모리검과 같은 지혜의 소유자들이었다.

‘취모리검(吹毛利劒)’이란 머리털 한 가닥을 칼 날 위에 올려놓고 ‘훅’하고 불면 두 조각이 날 정도로 예리한 칼(劍)이다. 반야지혜를 상징하며, 선에서는 너무나 당연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선실(禪室)이나 좌선당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문구다.

당대 조사선의 선승들은 〈금강경〉 등 대승경전과 반야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일체 신상(身相) 등 형상적인 존재들을 부정했다. 율종·정토종 등 여타 종파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불상을 허상이라고 파악하여 모시지 않았다. 동시에 불전(佛殿, 대웅전)도 폐지했다. 가람설계도에서 대웅전을 삭제해 버렸다[不立佛殿].

‘대웅전 폐지’ 이것은 일찍이 불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목석으로 만든 부처는 반야지혜의 작용이 전혀 없으므로 모실 필요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그 대신 방장(주지)이나 조실의 설법 공간인 법당(法堂)을 크게 건축했다[唯樹法堂]. 법당은 방장(혹은 조실)이 법신불을 대신하여 법을 설하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양억(楊億)은 〈선문규식(禪門規式)〉에서 “불조로부터 친히 법을 전수받은 당대의 주지(住持)를 존숭하기 위함(不立佛殿, 唯法堂者, 表佛祖親受, 當代?尊也).”이다. 그리고 〈송고승전〉의 저자 찬영은 〈백장회해전(百丈懷海傳〉에서 “법은 언어와 형상을 초월했기 때문(不立佛殿, 唯樹法堂, 表法超言象也)”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 ‘가불매조’(呵佛罵祖,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짓다)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불상 등 유형적인 것과 권위에 대한 부정이었다. 권위를 걷어 버리고, 그리고 형상에 가려진 진실한 부처의 실체를 보라는 것이다.

달마-혜가 시대에 선불교의 소의경전은 여래장을 설한 〈능가경〉이었다. 그러나 오조홍인(594-674) 시대에 와서 공(空)과 반야지혜를 설한 〈금강경〉으로 교체되었다. 홍인은 복잡하고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능가경〉을 과감하게 2선으로 후퇴시키고 〈금강경〉을 새로운 선(禪)의 경전으로 채택했다.

더구나 금강경은 육조혜능(638-713)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글귀에서 깨달음을 얻은 경전이다. 그것도 출가 이전에, 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속인 시절에 만났으니 금강경과 육조혜능의 만남은 세칭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강경〉은 공(空)과 반야지혜의 관점에서 모든 유형적인 존재들을 부정했다. 부처도 부정했고 불상도 부정했다. 금강경 제5장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은 ‘이치대로 정확하게 여래의 진상(眞相)을 보아야 한다’는 장이다. 거기서 대승의 여래(부처)는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나의 제자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묻겠는데, 훌륭하고 거룩한 신상(身相, 신체적인 모습, 형상)에서 여래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체적인 모습[身相]이나 형상적인 모습에서는 여래의 참모습(眞相, 法身)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형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말과 같이) 무릇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존재는 다 허망한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존재가 다 허상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곧 여래를 보게(친견)하게 될 것이다.(〈금강경〉 제5, 「如理實見分」.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붕어빵 속에는 붕어가 없다. 그런데 왜 ‘붕어빵’이라고 하는가? 단순히 빵 모양이 붕어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아무리 훌륭하게 조성된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불상이라고 해도 그 속에는 부처의 참모습은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금강경〉 제20장은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이다. ‘색상(色相),’ 곧 ‘겉모습’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속담에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처럼, 표면적인 겉모습만 가지고 진불(眞佛)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여래는 더욱더 강한 어조로 신상(형상)을 부정하고 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부처’라는 것을, 32상 80종호를 모두 갖춘 색신(具足色身, 잘 조성된 불상, 형상)에서 불(佛)의 참모습[眞相]을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비록 32상과 80종호를 모두 갖춘 완벽한 색신(불상)이라고 해도, 거기서는 여래의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완벽한 색신이란 곧 완벽한 색신이 아니고 그것은 단지 이름일 뿐입니다(〈금강경〉, 「離色離相分」.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모든 명칭은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절 이름이 ‘성불사’이고 ‘불국사’이고 ‘견성암’이고 ‘극락암’ 일뿐이다. ‘성불사’라고 해서 그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성불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쫓아가지 말고 거창한 명칭 이면의 실체를 보라는 것이다. ‘화장 빨 미인’에 속지 말고 ‘민낯 미인’을 보라는 것이다.

중국 조사선의 선승들이 이와 같이 ‘불상’을 허상으로 파악한 것은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100% 〈금강경〉 등 대승경전에 의거한 판단이었다. 〈금강경〉에 의거해 봤을 때, 목석으로 조성한 불상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속에는 부처의 참 모습이 없었다. 반야 공사상의 관점에서 봤을 때 깨달음과는 무관한 부질없는 일이었다. (앞의 금강경 구절 중 “곧 여래를 보게(친견) 될 것이다”는 말은 형상적인 여래가 아닌 법신의 여래(법신불)를 친견한다는 말이다. 곧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조사선의 선승들은 치열한 오랜 사상적인 투쟁 끝에 권위와 이름, 그리고 허상 속에 가려진 부처의 실체를 찾고 발현하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뛰어 들었다. 그리하여 반권위, 허상 타파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어마어마한 사상적 투쟁에 나선 첫 번째 주자(走者)가 ‘할(喝)’로 유명한 임제의현(?-867)이었다. 그는 독창적인 언어로 법상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도반 여러분! 그대들이 여법한 견해를 갖추고자 생각한다면, 정안(正眼)이 없는 자들의 말을 함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내외(內外)를 불문하고 만나는 것은 모두 죽여야 한다(否定).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권속을 만나면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투탈자재한 사람(자유인)이 될 수가 있다(道流. ?欲得如法見解, 但莫受人惑. 向裏向外, 逢着便殺.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逢父母殺父母,逢親眷殺親眷,始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臨濟錄〉)”

 

부처도 살(殺)이고, 조사도 살(殺)이고, 아라한도 살, 부모도 살이다. 대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권위와 관념의 대상은 모두가 ‘살(殺)’의 대상이었다. 놀라운 확신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살(殺)’의 대상은 명칭·형상 등 유형적인 것들과, ‘언어문자’ ‘명상(名相, 명칭과 모양)’이었다.

박제화 된, 박제 속에 갇힌 ‘부처와 조사’의 상(相)이었고, 경전과 조사어록에 쓰여 있는 언어문자였다. 거기에 매달려서는 도저히 본질에 다가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반야지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문자에 속지 말라,’ ‘남의 말에 속지 말라(莫受人惑)’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록〉은 시종일관 이와 같이 ‘참다운 견해,’ ‘참다운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갖출 것을 촉구하고 있는 어록이다. ‘정안(正眼)을 갖추어야만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인, 해탈인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임제록〉은 선어록의 정상(頂上)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임제록〉이 개판(開版, 출판)되거나 간행된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거의 읽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임제록〉이 출판, 간행된 것은 70년대 서옹 연의(西翁 演義)의 〈임제록〉(1974년)이 처음이다. 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강독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몽산화상어록〉은 조선-근대를 통하여 가장 많이 간행된 선어록이다. 한국선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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