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욱 불화장(62·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7호)

이연욱 불화장은… 1956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문익점 비각 단청 작업 차 내려온 김한옥 선생을 만나면서 불화에 입문했다. 김한옥 문하와 조정우 문하를 거치고 덕문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며 1989년 화공 제1088호로 등록됐고,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을 이수했다. 1996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불교미술과정을 수료했으며, 201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7호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지금까지 없었던 황금탱화 기법을 완성했으며, 2005년 특허출원했다. 네 번의 개인전과 60여 회 회원전에 참여했다. 1992년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 우수상, 2008년 문화재청장상 등 다수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안성 칠장사 오불회괘불탱화’ 모사도, 낙산사 소장 ‘황금33관세음보살도’ 등이 있으며, 현재 (사)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이사, 경기남부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부처님이 다녀가신 지 2천50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긴 세월을 지나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부처님을 볼 수 없는 시절이 오면서부터 우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그 일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시켜온 일을 어쩐단 말인가. 보지 못한 부처님의 세계가 그리워 그리는 것을. 무엇인가를 그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시작이 아닐까. 40여 년 동안 불보살을 그리며 부처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가 있다. 지금까지 후불탱, 천정화, 벽화, 별화 등 5천여 폭의 불화를 3백여 사찰에 남긴 이연욱 불화장이다.

대 이은 불연 불화장으로   
부친 매일 새벽 <천수경> 독경
16세, 김한옥 문하 단청 입문
하루 두세 시간 자며 불화 습화
덕문 문하 수학 단청장 이수

독창적 황금탱화 완성, 특허  
1992년 불미전 우수상 수상
낙산사에 ‘황금33관음도’ 보시
“전승은 전통 방식 계승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부친의 돈독한 불심 이어받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이 불화장은 어린 시절부터 부처님 세상에서 자랐다. 깊은 새벽, 어린 이연욱은 잠결에 들려오는 독경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부친의 <천수경> 독경 소리였다. 이 불화장의 부친은 새벽 3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 관세음보살님 전에 올리고 <천수경>을 염송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 불화장의 모친 역시 불심이 깊었으며, 부친의 불심은 더욱 각별했다. 이 불화장은 부친의 불연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잘 모른다고 했다. 짐작하건대 그저 부처님이 좋으셨던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이유를 댈 것이 없다고 했다.
“제가 살던 마을에 80가구가 살았는데, 아버님은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었습니다. 제일 먼저 길어 올린 물을 관세음보살님께 올리고 독경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어요.”
콩 심은 곳엔 콩이 난다고 했던가. 훗날 불화장이 된 이연욱 역시 불심이 깊다. 불화장이 된 것도 그렇고, 평소 생각과 살아가는 모습이 부친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관세음보살을 좋아하는 것 하나만 봐도 그 모습은 그 모습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이 불화장이 제일 좋아하는 불화의 대상은 관세음보살이다. 두 사람 모두 먼 보살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아버님의 공덕으로 불화장이 된 것이 아닐까 늘 생각해요. 불화를 시작하고 나서 어쩌다 불사 도량에서 독경 소리를 들을 때면 아버님이 염불하시던 모습이 많이 떠올랐어요. 이제는 아버님도 관세음보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세음보살이 된 아버지와 관세음보살 그리는 불화장 아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인연’ 뒤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과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문…단청과 만나다
16살 때였다. 이 불화장은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단청이었다. 목화시배지인 경남 산청엔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비각이 있다. 비각이 오래 되어 단청이 다시 필요했다. 김한옥(단청 전문위원) 선생이 단청을 하기 위해 산청을 찾았다. 비각의 단청작업이 시작됐고, 어린 이연욱은 우연히 비각에 단청을 하고 있는 김한옥 선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붓 끝에서 그려지는 오방색의 단청을 보게 된다. 평소 절에서 단청과 불화를 보기는 했지만 눈앞에서 그려지는 단청은 또 새로웠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어린 이연욱은 그림에 대한 열망이 솟기 시작했다. 그 그림이 불화였던 것이다. 절에서 보았던 단청과 불화들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이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소년 이연욱은 부처님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김한옥 선생을 졸랐다. 당돌한 생각이었다. 그를 따라가면 그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을 약속하고 서울로 올라간 김한옥 선생은 연락이 없었다. 김 선생의 연락을 기다리던 이연욱은 김한옥 선생에게 편지를 쓴다. 답장이 올 때가 되어서도 답장이 없자 이연욱은 재차 편지를 보냈다. 수차례 편지를 보낸 끝에 이연욱은 김한옥 선생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이연욱이 처음 부름을 받은 현장은 진주 향교 단청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 불화장은 실망한다.
“저는 그림(불화)을 배우고 싶었는데, 단청만 칠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단청이 아니라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단청부터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는 단청과 불화가 하나의 일이었다. 단청장이 불화까지 했던 것이다. 불화를 하기 위해선 단청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2006년부터 단청과 불화는 분리됐다.
이 불화장은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불화를 배우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번째 현장인 양양 낙산사 홍련암 단청 작업과 속초 설악산 신흥사 명부전 단청 작업 등에 참여하며 단청을 배워나갔다.

두 번째 입문…불화
이 불화장이 단청 일을 시작한 지 3년 째 되던 1974년이었다. 마침내 그는 불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인연은 서울 조계사였다. 단청은 김한옥 선생이 맡았고, 벽화를 그리기로 한 조정우(대구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장) 선생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그때부터 조정우 선생에게는 벽화 골채를 시작으로 습화(習畵)를 배우게 된다.
“낮에는 단청 일을 하고 일이 끝난 저녁엔 숙소 구석에서 습화를 했죠. 어느 날은 산신각 맨바닥에서 촛불을 켜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추운 겨울이었는데 스님이 좌복을 가져다주신 적도 있었죠.”
원하던 붓을 들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낮에는 단청작업을 하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초(밑그림)를 습화했다. 넘어야 할 산이 수 없이 많았다. 시왕초, 사천왕초, 금강역사초, 부처님초, 용, 봉, 학 등 초만 해도 수 십 가지였으며, 불화에 들어가는 전통문양 모두를 그릴 수 있어야 했다. 모두 안 보고 그릴 수 있어야 했다.이 불화장은 하루 두세 시간씩만 자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십 수 년을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불화장은 잠이 적은 편이다. 이 불화장의 그림은 날로 달라졌다. 그의 그림에서 소질이 보였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기회가 점점 많아졌다.

300여 사찰에 5천 폭 불화 그려  
108배, 기도로 하루 시작
“불화는 부처님 따르겠다는 서원,
깨끗한 心身으로 그려야 ‘불화’”
“한마음선원 불사 기억에 남아”

“붓 잡으면 석달이 사흘처럼 흘러”  
불보살들과 함께 삼매 들어
2015년 경기 무형문화재 지정
“앞으로 아난존자 그리고 싶어”

황금탱화 기법으로 제작해 낙산사에 기증한 ‘황금33관음도’ 중 ‘수월관음도’
칠장사 삼불회괘불탱화 중 문수보살 모사도

  

불모(佛母)의 길
이 불화장이 불화에 입문한 지도 10년이 흘렀다. 그는 김한옥 선생 문하를 나와 조정우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불화를 배우고 불모로서의 길을 시작한다.
“어느 날, 불화를 그린다는 것이 다른 그림을 그리는 일과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붓으로만 그림을 그려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붓으로만 그린 그림은 ‘불화’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보살을 그리는 일은 성화를 그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는 사람 자체가 신성함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기도와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죠.”
이 불화장은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매일 관음기도와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기도라는 것은 자기 잠재의식을 일깨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늘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는 일이죠. 그래야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잘 때도 원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면서도 원하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죠.”
그는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 꿈에서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이 꿈속에 나타나 그림을 보여줬다. 잠에서 깬 뒤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보여준 그림을 기억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이 불화장은 불화에 입문한 지 10여 년 동안 100여 사찰의 불화를 그리며, 불모로서의 길을 걸었다.
1987년, 이 불화장은 더욱 공부를 넓히기 위해 덕문(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스님 문하에 입문한다. 그는 1989년 문화재청에 화공 1088호로 등록됐으며,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을 이수했다. 덕문 스님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고 적멸에 들었다. 그는 공부의 끈을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 1996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불교예술과정을 수료했다.

전승의 길…황금탱화
어느덧 이 불화장은 불모로서 전승을 길을 걷고 있었다.
“스승인 덕문 스님께서는 만년에 불화에서 손을 떼고 산수화를 그리셨는데, 금박바탕에 그리셨어요. 그런데 그 그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불화도 그렇게 그리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스승께 여쭈었더니 가당치 않다는 듯이 말씀하셨죠.”
그는 그날로부터 ‘황금탱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불화엔 금박바탕을 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부분적 사용이었지 전체가 금박바탕인 불화는 없었다. 이 불화장은 왜 선조들이 불화에 부분적이지만 금을 썼는지 생각했다. 이 불화장은 전통기법인 생채색 기법과 고분채색 기법을 연구하고, 부분적으로 적용된 예전의 탱화를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15년 만에 바탕 전체를 금박바탕으로 하는 ‘황금탱화’를 완성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독창적인 ‘불화’다. 검은 바탕에 금선을 넣은 먹탱화, 붉은 바탕에 금선을 넣은 홍탱화 등 전통의 탱화와는 다른, 한 걸음 더 나아간 불화였다. 이 불화장의 황금탱화는 바탕에 옻칠을 하고 순금을 입힌 후 채색을 했다. 금박을 입혔기 때문에 밑그림 없이 채색을 해야 한다. 초를 옆에 놓고 눈으로만 금박 위에 밑그림을 그리면서 채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붓을 잡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법이다. 황금탱화는 빛을 받으면 금이 빛나고 빛이 줄어들면 채색이 빛난다. 황금탱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선조들도 그런 이유로 금을 썼던 것이다. 이 불화장은 자신이 완성한 황금탱화 기법으로 그린 ‘삼세여래후불탱’으로 1992년 제14회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2005년 황금탱화는 특허 출원했다.
“전승이라는 것은 전통의 기법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유지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그 이전의 전통에서 한 걸음 씩 나아간 것들이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전승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불화장은 봉녕사 현왕탱화(경기 유형문화재 제152호) 원형 모사, 안성 칠장사 삼불회괘불탱화(보물 1256호) 중 문수와 보현보살 생채색 기법 원형모사 등을 통해 전통불화의 맥을 이은 지 오래다. 손수 만든 천연염료를 주로 사용해온 그는 어느새 전통을 넘어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 있었다.
또한 그는 미국 LA카운티박물관 소장 지장시왕탱화(1841년 대구 동화사 염불암 봉안) 모사,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 소장 직부사자탱화 모사 등을 통해 전승 작가들의 모임인 ‘나우회(회장 한봉석)’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곁을 떠난 문화재 찾기와 재현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마음선원 부산 지원의 중앙 천정 ‘쌍용도’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여시아문도’

 불심이 그리는 그림
2005년, 양양 낙산사가 화재로 소실됐었다. 도량은 석탑만을 겨우 남겨둔 채 모두 화마에 스러졌다. 안타까운 소식에 이 불화장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불사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불사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마음은 온통 낙산사에 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꿈을 꾼다. 수많은 관세음보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꿈이었다. 잠을 깬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원력을 세운다. ‘황금33관세음보살도’였다. 그는 그 날로 서른 세분의 관세음보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장장 1년여에 걸쳐 황금탱화 기법으로 ‘황금33관세음보살도’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불사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그림을 낙산에 기증한다. 하지만 그림을 받은 낙산사는 불사를 위해 그림을 팔거나 하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없는 그림이었기에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의상기념관에서 일반에게 전시됐다.“부처님 세계를 그린다는 것은 지구상의 그 어떤 일보다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획 한 획 그려지는 불보살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붓질을 하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릅니다. 보통 후불탱 하나 완성하는 데 석 달이 걸립니다. 불보살 틈에 앉아서 한 획 한 획 붓을 놓다보면 석 달이 3일처럼 지나갑니다.”
‘삼매’란 멀리 있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하고자 하는 일을 기꺼이 하면 따라오는 것이 바로 삼매였다. 이 불화장은 남의 손을 빌어 할 수 없는 불화가 좋다고 했다. 결국 불심으로 그려야 하는 일이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해 네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불사의 생업 틈틈이 그린 불화들을 모아 전시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여시아문도’이다. 그림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아난을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이다.
“앞으로 아난의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어요. 아난을 그린 그림이 많지 않아서요.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난존자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너무나 고마운 ‘보살’인 것이죠.”
관세음보살을 많이 그려온 그는 앞으로 아난존자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이 새로운 원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마음선원과 월정사, 전등사 등 전국의 사찰 300여 곳에 5천여 폭의 불화를 그렸다. 그 중 이 불화장의 기억에 남는 것은 한마음선원 불사 때 그린 불화와 낙산사에 기증한 ‘황금33관음도’다.
“40여 년 탱화와 별화, 벽화 등의 불화 작업을 해오면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기도 안양 한마음선원 법당의 천정화와 별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 중 별화는 단청 위에 그려 넣는 그림을 말하는데, 6개월에 걸쳐 그린 것으로 200여 폭에 각기 다른 구성과 색채로 그려 넣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선원 법당에 들어서면 극락에 온 느낌이 든다고 말했는데, 작가로서 마음이 뿌듯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성규 선생의 작품인 법당 내부의 단청 또한 지금까지의 전통 단청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법당 단청이 이처럼 아름답게 장엄된 곳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낙산사에 기증한 ‘황금33관음도’는 저의 황금탱화 기법으로 완성되었다는 점과 불자로서의 염원을 담아 조성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습니다.”
이 불화장은 한마음선원의 본원 외에도 부산과 울산, 제주 지원의 불사에도 동참해 300폭 이상의 불화를 그렸다.
불보살을 그리는 일은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서원이라고 말하는 그는 “황금탱화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그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곤란할 때가 있다”면서도 자신의 그림으로 불사가 회향될 때면 그저 기쁘다고 했다.
그는 2015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7호 불화장으로 지정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불모’였고 ‘불화장’이였다. “훗날의 불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불모가 되고 싶다”며 또 다시 석 달을 사흘처럼 살기 위해 늘 부푼 마음으로 새 날을 기다리는 이연욱은 천상 불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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