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순 박사, 〈대각사상〉 28집 기고논문서 주장

제주 추사관에 있는 추사 김정희와 초의 선사의 교류 재현 장면. 김정희의 불교적 성향은 제주도 제자들과 유림에 그대로 이어졌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불교가 다시 형성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에 따르면 현재 제주도민 중 23%이상이 불자로, 한국서 가장 불심이 높은 곳 중 하나다. 하지만, 제주도는 조선 숙종 시절 이형상 목사가 절오백 당오백이었던 제주도의 사찰들과 불상을 모두 파괴해 200여 년간을 무불(無佛)시대로 살아간 아픈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 불교는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제주불교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한금순 박사(제주대 사학과 강사)는 최근 발간된 〈대각사상〉 제28집 기고논문 ‘유배인들이 제주 불교에 끼친 영향’에서 제주도에 유배왔던 유학자들의 영향과 이로 인한 제주 유림들의 불교 활동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불교에 조예 깊었던 추사 김정희
제자 양성하며 제주 유림에 영향
3년 유배 김윤식, 귤원 시회 결성
경전 읽고 승려 교류 등 불교활동

제주서당 30곳 초파일 행사열어
김석윤, 승려이자 유학자로 활동


한 박사가 꼽은 대표적 불교적 성향의 유배인은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금석문 학자인 추사 김정희였다. 김정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초의 스님과 각별한 교류를 이어갔고, 초의 선사는 그를 위해 6개월여 동안 제주 산방굴사에 머물기도 했다.

이 같은 김정희의 불교적 성향은 제주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시문이 뛰어난 제자였던 이한진의 경우 초의 스님과 그 제자들까지 교류하며 불교 활동을 했다.

또한 온건개화파였던 김윤식은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제주도 유배하며, 당시 유림들에게 불교적 영향을 줬다. 그는 유배인 7명, 제주도 거주 육지인 논객 5명, 제주인 11명으로 구성된 ‘귤원 시회’를 만들었고, 시회에서 불교 활동을 진행했다. 당시 활동을 적어놓은 김윤식의 〈속음청사〉에 따르면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연등을 달거나, 〈전등록〉과 같은 불교 관련 서적을 읽고, 승려들과도 교류하는 기록들이 담겨있다.

또한, ‘귤원 시회’에 참여했던 김종하, 홍종시, 최원순은 제주불교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대정군수였던 김종하는 제주불교협회 창립 당시 고문으로 참여했고, 워싱턴 평화회의에 제출된 독립청원진정서에 서명한 제주읍장 홍종시는 협회 시회장으로 제주불교포교당 건립에 건축비를 희사하기도 했다. 제주 지역서 변호사로 활동한 최원순 역시 제주불교포교당 건립에 힘을 보탰다.

이에 대해 한 박사는 “시회의 불교 활동이 김윤식과의 교류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며 “추사 이후 이어져 온 불교적 성향이 김윤식을 만나면서 짧은 시기에 함께 불교 경전을 돌려 읽는 등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유학자였던 김석윤이 스승의 영향으로 출가했던 점도 유배 유림의 영향임을 제시했다. 김석윤은 광양서재에서 수학 당시 유교경전 뿐만 아니라 〈금강반야경〉을 스승 김병규에게서 배웠다. 이 영향으로 17세인 1894년 전북 위봉사에서 출가하게 된다. 유학과 불교를 함께 공부한 그는 출가 승려이면서도 훈장으로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제주 유림들과 함께 제주의병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근대 제주불교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관음사 창건을 돕기도 했다. 창건 이후에도 관음사 서무와 관음사 해월학원 교사를 역임했다.

한 박사는 제주 지역 서당에서 부처님오신날에 맞춰 특별행사를 열던 사실들도 주목했다. 한 박사는 “실제 제주도 전역 32곳의 서당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연등달기, 씨름대회, 글짓기 등의 행사를 진행했다”면서 “여기에는 학부모도 참여해 음식을 준비하는 등 일종의 마을 잔치로 치러졌음을 짐작케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배 유림으로 시작돼 제자들로 이어진 다양한 불교 활동들이 제주불교가 조선시대 이후 쇠퇴한 상황에서도 근대에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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