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성 옥천사 도난 성보들

옥천사 대웅전에 봉안됐던 영산회상도. 화승 효안이 1744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10월 21일 도난됐으나,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 사진 제공=옥천사 성보박물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의 말사인 옥천사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 가운데 하나로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옥천사는 893년에 진경국사 심희(854~923)가 중창한 후, 고려 말까지 여러 차례 중건이 되었지만, 조선전기는 겨우 법등만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사찰의 모든 전각이 소실된 후, 1639년 학명(學明)스님이 의오(義悟) 스님과 함께 중창 불사를 시작해서 1640년에 동상실(東上室)을 창건했고 1642년에 미옥(美玉) 스님이 화주가 되어 승당을 지었으며, 1645년에 심검당을 건립하였다. 1654년에 중심 전각인 법당을 지었으며, 1664년에 정문을 세워 7중창을 완성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사찰 정비가 이루어지고 1800년에 국가에 종이를 바치는 진상(進上) 사찰로 지정되어 사역(寺役)이 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지속적으로 전각의 중수와 성보물의 제작이 이루어진다. 1890년에 옥천사가 왕실의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관청과 세도가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1862년 진주농민항쟁 당시에 중심 전각을 제외한 탐진당, 적묵당, 팔상전 등 수많은 전각이 불타 없어졌다. 1864년부터 용운(龍雲)스님을 중심으로 가람의 정비와 중창불사가 시작되었다. 1895년에 명부전과 나한전이 중건되고, 1897년에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이 새롭게 건립되었다.

임란 後 중창불사된 고성 옥천사
대부분 성보들 17~18세기에 조성
1970년대부터 총 12점 성보 도난

2014년 나한상 반환, 환수 본격화
‘학계·사찰 공조’ 선행 모델 만들어
영산회상도·시왕도 등 아직 못 찾아
“성보 문화재 소재라도 파악되길…”

이와 같은 이유로 옥천사에 소장된 성보문화재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유물이다. 이 가운데 도난문화재는 주로 17~18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성보들이 도난당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1978년 11월 10일자 ‘불도(佛徒) 가장(假裝)한 사찰 도둑, 유명 사찰 탱화(幀?) 절도범의 행각’이라는 기사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

“전국 유명 사찰 문화재 전문절도단 주범 구만춘(36세, 부산 서구)은 유가증권 위조전과자로 76년 4월 부산에서 고물행상을 하면서 골동품상들 자주 드나들 때 골동품 수집가들이 절에서 나오는 탱화를 비싼 값에 사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건이 되는구나’ 싶어 김창욱(37세, 삼천포 용강동), 백춘웅(34세, 부산시 수정동) 등과 법당의 관리 상태가 허술한 절간을 털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으로 76년 11월 5일 새벽 1시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옥천사 대웅전 자물쇠를 드라이버로 열고 탱화 2점을 쉽게 훔쳐 냈고, 다음날엔 부근 하이면 운흥사 법당에서 시왕전 동자상 5점과 업경대 2점을 훔쳐 부산시 동구 수정동 청아당 주인 고정애(46)에게 35만원을 받고 팔았다.”

이들이 훔친 대웅전 2점의 탱화는 구체적 기사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후불탱인 영산회상도가 1997년에 도난당한 것을 보면, 중단이나 하단탱화일 가능성이 높다. 옥천사에 관련된 재산대장은 일제강점기부터 남아있는데 대웅전 불상 다음에 후불탱, 삼장탱, 성왕탱, 신중탱(2점), 독성탱, 산신탱이 언급되어 이 가운데 2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재산대장에는 명칭과 규격 등이 남아있어 현존하는 불화와 비교한다면 잃어버린 불화가 어떤 작품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근대 옥천사 재산대장은 1932년 3월에 공개된 조선총독부 관보 재산대장과 별도로 국립중앙박물관 내에서 두 건의 재산대장이 내용이 약간 달라 작성 시기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재산대장을 통해 20세기 전반에 소장하고 있던 성보물들의 유형과 규격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불교월보〉 1912년 6월호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경남 고성군 옥천사에 봉안하였던 불상은 높이 2척 넓이 1척2촌 무게 5근 가량인데 1912년 4월27일 밤에 도적이 몰래 훔쳐 달아났다.’ 〈통도사 본말사 재산목록(옥천사)〉에서 비슷한 목불이 보이는데 ‘목불(木佛) 도금(塗金) 고2척 경1척2촌 중량100근’이라 하여 크기는 거의 비슷하지만, 무게가 다르다. 그 이후 재정리한 사찰령개정에 따른 〈통도사 말사 옥천사 재산목록(귀중품)〉에도 역시 같은 내용의 불상은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난당한 불상은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후 옥천사에서 도난이 파악된 성보물은 1976년 4월 2일에 신중도(1점), 삼화상(3점), 현왕도(2점)과 1976년에 11월 12일에 시왕도(2점), 나한상(2점), 사자상(2점)이지만, 현재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종단에 신고되지 않았고, 1988년 1월 30일에 나한상과 천부상 등(6점)과 1997년 10월 21일에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도난 신고가 되어 있다.

이 가운데 2014년 여름에 20여 년간 도난문화재를 숨긴 사립박물관 관장이 은닉하던 48점의 도난문화재를 회수하였는데, 그 중에 2점이 옥천사에서 도난 신고한 나한상이었다. 그 후 잃어버린 나한상 5구의 사진을 찾던 중에 1980년대 후반에 나한상을 촬영한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 학술대회에 나한상의 조성 시기와 작가를 추론하면서 최초로 도난된 나한상의 사진을 공개하였다.

당시 학술대회에 참석한 원명 스님(옥천사 성보박물관장)이 공개된 사진을 바탕으로 여러 박물관에서 간행된 도록을 검토하던 중에 이전에 나한상 2점이 출품된 것을 확인 후, 전시회를 주최한 본태박물관에 문의한 결과 개인 소장품을 대여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후 소유자에게 나한상이 도난품이라는 것을 알렸고, 소장가가 그런 유물이라면 원 봉안처로 돌려보내겠다는 의사를 밝혀와서 2구의 나한상은 옥천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사찰, 연구자, 소장가들이 공동으로 도난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성 사찰로 환수되는 선례가 되었다.

결국 도난문화재인 줄 모르고 구입했지만 유물의 원봉안처로 돌려주겠다는 소장가의 판단, 그리고 사찰에 대한 배려는 도난문화재 회수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옥천사 청련암 범종. 1987년 12월 13일 도난됐고,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사진 제공=옥천사 성보박물관

또한 올해 미국의 경매회사에 옥천사 나한상 1구가 출품되어 문화재청과 조계종 문화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이 경매회사를 통하여 소장가에게 도난 상황을 설명했고 소장가도 무상으로 기증 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옥천사 나한상은 20년 전에 도난당했지만 사찰과 연구자,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4년 만에 도난당한 8구 가운데 5구의 나한상이 돌아오게 되었다.

이외에도 옥천사 소임을 맡은 스님들의 노력으로 프랑스에서 시왕도 1점(제2초강대왕도)이 돌아왔고,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는 관계 기관이 소재를 파악하게 되어 환수가 진행 중이다. 1744년 화승 효안 등이 주축으로 제작된 옥천사 대웅전 삼장보살도의 경우 장물임을 알고서도 구입한 사립박물관장의 박물관에서 찾았다. 서울 광진경찰서에서 문화재보존처리업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삼장보살도 등 문화재 15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도록과 대조하는 등 치밀한 조사와 추적 끝에 옥천사 대웅전 삼장보살도의 환수가 추진된 것이다.

현재 옥천사에서 찾으려는 도난문화재는 대웅전 영산회상도(1점, 경남 유형문화재 299호), 명부전 시왕도(1점), 청련암 범종이다. 이 가운데 영산회상도는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 뒤에 걸려 있던 불화로, 기존 조사된 화기에 “乾隆玖年甲子四月日」新畵成大靈山會奉」安于晋陽蓮華山玉」泉寺大法堂寶座… 金魚 曉岸比丘」最賢比丘」尙悟比丘」抱勤比丘」證淳比丘…”로, 영산회상도가 1744년에 옥천사 대법당에 봉안하기 위해 효안, 최현, 상오 등 13명의 불화승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부전에 봉안할 지장보살도와 시왕도 및 삼장보살도가 동시에 제작되었음을 남아있는 화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산회상도의 규격은 재산대장에 세로 11척(또는 11척 6촌), 가로 10척 7촌으로 적혀 있어 거의 정방형이다. 이는 대략 3m에 이르는 큰 작품으로, 화면 구성을 비롯하여 여래와 보살상의 온화하고 단정한 얼굴과 신체의 형태, 가늘고 탄력 있는 묘사, 대의에 장식된 섬세한 작은 문양, 채도가 낮은 적색과 녹색 위주의 설채법 등이 17세기 중반에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임한스님의 화풍을 계승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 보물 제 1956호로 지정된 청도 용천사 영산회상도와 화면 구도와 존상 배치 및 설채법 등이 유사하다.

그리고 1987년 12월 13일에 도난된 옥천사 청련암 범종은 최근 사진이 확보되어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 도난신고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재산대장에는 옥천사와 암자에 범종이 5점이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재산대장Ⅰ에는 범종의 비고란에 “乾隆41年丙申7月(1776년, 정문, 現 성보박물관)”, “康熙47年 7月 製作(1708년, 現 대웅전)”, “乾隆37年壬辰5月日製 作者 白鳳翼(1772년, 적묵당)“라 적혀 있고, 나머지 2점은 규격을 제외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당시 범종들은 정문, 대웅전, 적묵당, 연대암, 진주 포교당에 소장되었는데. 현재 옥천사에 남아있는 범종은 대웅전에 1708년(강희47) 범종과 성보박물관에 1776년(건륭41) 범종, 옥천사 백련암에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을 받은 범종이 남아있다. 따라서 진주 포교당 것을 제외하면 청련암 범종은 백봉익이 1772년에 만든 범종일 가능성이 높다.

이 범종을 만든 주성장 백봉익은 1785년에 전남 순천 송광사 천자암 범종을 만들었다. 도난된 청련암 범종은 윗부분이 좁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넓어지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범종 형태이다. 범종의 천판 위에는 연판문이 새겨져 있고, 용뉴는 천판에 발을 딛고 정면을 향해 이빨을 세운 용의 모습이 단룡으로 조각되고 옆에 음통이 길게 세워져 있다. 복련대 아래에는 원형 안에 실담자를 띄엄 띄엄 배치하였고, 바로 아래에는 정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입상이 교대로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보살입상은 보관과 두광을 갖추고 합장을 한 입상이다. 유곽과 보살상 아래에는 두꺼운 하대에 연화당초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련암 범종이 백봉익이 만든 기년명 범종인지는 현재 단정할 수 없지만, 범종의 전체적인 형태와 세부 표현에서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옥천사만큼 도난문화재가 회수된 곳은 없다. 이는 새로 소임을 맡은 주지 원각 스님과 성보박물관장 원명 스님의 문화재 환수 노력 그리고 학자들의 조사와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울러 아직도 만행 중인 옥천사 관련 문화재 각각의 소재만이라도 파악되어 잃어버린 사찰의 역사가 하나씩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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