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분심(大忿心)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욕망의 굴레서 벗어나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이라고 했다. 해석하면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가 더 어려운 것인데, 금생에 이몸을 받었을 때 불도를 이루지 못하면 어느 생에 다시 인간몸 받을 것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이 뭣고’는 육도윤회서 벗어날 수 있는 금강보검
뼈에 사무친 분심 있어야 이 참선문에 들 수 있어

〈잡아함경〉에 보면 맹구부목(盲龜浮木)이란 말도 있다. 눈먼 거북이가 1백년마다 한번 떠올라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조그만 판자에 뚫린 구멍 속으로 목을 내미는 것보다 인간 몸 받기가 더 어려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 보다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 중에서도 참선문에 들어오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며, 활구 참선법인 간화선 ‘이 뭣고’는 육도윤회의 굴레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금강보검(金剛寶劍)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대생겁래로 일대사(一大事)를 해결 못하고 생사고해의 바다서 해매고 있을까? 깊고 깊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뼈에 사무친 분심(忿心)이 있어야 이 참선문에 들어 올 수 있다. 피기장부아역이사(彼己丈夫我亦已俟)라고 했다. “네가 장부면 나도 역시 장부다”라는 기개와 용기를 가져야 원력이 쌓이고 히말라야 정상에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삼계유여급정륜(三界猶如汲井輪) 백천만겁역미진(百千萬劫歷微塵)이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삼계윤회에 오르고 내림이 우물 속의 두레박처럼 백천만겁이 지나도록 벗어나기 어렵다” 라는 말이다. 이렇게 어려운 생사문제를 벗어나는 것은 내가 풀어야할 영원한 숙제이니 금생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인간 몸을 받아 불법을 만날 수 있는 기약을 할 수 있겠는가?

선도대사송에 인간총총영무중(人間??營衆務) 불각년명일야거(不覺年命日夜去) 여등풍중멸난기(如燈風中滅難期) 망망육도무정취(忙忙六道無情趣)라고 했다.

“인간이 바쁘게 일에 끄달려 묵숨이 줄어 드는 것을 알지 못하네, 바람 앞 등불이 위태 하건만 육도에 바빠 정처가 없네”라는 뜻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에 쫓기며 허망한 경계에 탐착해 헐떡거리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 무상한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몸에 좋은 것만 골라 먹고,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욕심으로 가득 채워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다 무상하고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분명 그것은 뒤늦은 후회일 뿐인 것을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대분심을 통해 화두참구에 철저해야 한다.

화두(話頭)는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께서 자신이 깨달은 본래면목을 목전(目前)에 훤히 들어내 보인 것이다. 사중득활(死中得活)이란 말처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꽉 막힘을 당해 크게 한번 죽어 다시 살아난다는 대분심으로 활구 참선법인 ‘이 뭣고’를 생활속에서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면 금생 성불은 보장된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해 농사를 짓는데, 가뭄이 들어 모든 농작물이 말라죽게 되자 아무리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오지 않는데,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가뭄이 해소되자, 그 비법을 인디언에게 물어보니, 비가 올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도 금생에 성불의 원력을 세웠으면 그것이 이루어 질 때까지 하루, 100일, 1000일,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사력을 다해 온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고 정진해 일생을 마친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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