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돈에 대한 욕망 앞에 정직해지자

그림. 박구원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함부로 표출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부처님의 제자가 어떻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느냐고 야단 맞을까봐 불자는 더욱 그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리라. 만약 부처님이 우리에게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줄테니 말해보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할까?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해 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부자로 만들어달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로 만들어달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행복하게 해달라고 했다가 행복하지만 가난하게 만들어버리면 큰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부자로 만들어주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도 서점에 가서 행복에 관한 책을 한 두권 펼쳐 들거나, 방송에 행복에 관해 프로그램을 한 두 개만 들어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행복은 내 주변에 널려 있다’ ‘행복이 뭐 별 것인가?’라는 말이다.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면 구태여 부처님께 요청할 필요도 없다. 마음 먹어 버리면 되니까...내 주변에 행복이 널려 있다면 부자는 남보다 훨씬 더 쉽게 주을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내 주변에 있는데 굳이 부처님께 달라고 매달릴 필요도 없다.

행복, 마음먹기 다르다지만
돈에 따라 행복도 증가해
누구나 행복한 부자를 꿈꿔

나는 행복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없다. 행복은 내 주변에 널려 있을만큼 흔하지도 않다. 행복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을 얻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어쩌면 행복을 너무 쉽고 가벼운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행복을 아주 사소한 일로 희화화하면 잠시는 위로가 되겠지만 행복은 더 멀어진다.

돈과 행복에 대해 자주 하는 말이 ‘돈은 행복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최근 들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어쩌면 돈이 행복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꾸 깨닫게 되어서 그런걸까? 요즘은 돈과 행복의 관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예를 들어 ‘돈이 어느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과 무관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말은 돈은 행복과 무관하지 않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무관하다는 말이니 제한적 범위 내에서만 돈이 행복에 기여한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행복에 관한 연구에 보면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돈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도의 증가는 완만해진다. 하지만 돈이 일정 수준을 넘는다고 해도 행복도가 수평이 되거나 하락하지는 않는다. 증가 속도가 완만해질 뿐 여전히 증가한다. 게다가 재산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행복과 돈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할거다.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을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 현재 자기가 가진 재산의 2, 3배는 되어야 행복이 돈과 무관할 것 같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만약 그 수준에 도달하면 어떨까? 다시 2, 3배는 되어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재산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돈 아닌 요소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 주변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돈이 많아도 불행하고 적어도 불행하다면 돈이 많은게 좋지 않을까? 돈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도 돈이 증가하면 행복도가 조금씩은 증가하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행복과 돈의 관계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다. 무엇보다도 행복과 돈에 대해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식을 넘어서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우리가 불자라면 불교적 관점에서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속세에서 이야기하는 엉터리 처방이나 상식의 테두리 내에 갇혀서는 안 된다.

분명 돈이 증가하면 행복도는 조금이라도 증가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하지는 않는다. 나랑 가까운 대한민국의 어느 유명한 조세전문변호사는 업무 때문에 부자를 자주 만난다. 그는 ‘부자 중에 행복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라고 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혹시 우리는 모두 다 불행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돈만 많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게 아니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행복한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행복과 돈에 대해서 올바른 불교적 해법을 얻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욕망 앞에 정직해야 한다. 욕망 앞에 정직하지 못하면 돈과 행복의 본질을 결코 꿰뚫을 수 없다. 자신에게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없다고 거짓말을 하지 말자.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마음을 감추려고 하지 말자. 돈에 관심이 없으면 됐다. 다만 돈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세상의 기준인양 돈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돈에 관심이 없지만 다른 욕망에 관심이 있을 수가 있지 않은가? 다른 욕망이 얼마나 고상하길래 돈에 대한 욕망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돈에 관심이 있으면 불자로서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 자신 있게 말해도 된다. 행복한 부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욕망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

우리는 행복만을 원하지도 않고 돈만을 원하지도 않는다. 행복과 돈은 서로 구별되고 엄격한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적 세상에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독자적 실체가 없다. 행복도 돈도 다른 요인, 조건과 구분되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돈 없이 행복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돈 많고 불행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행복한 부자가 되고 싶다면 제일 먼저 자신의 욕망 앞에 정직해지자.

우리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과거를 잘못 안다면 미래를 또 다시 잘못 판단하기 쉽다. 부처님 당시에 불교는 부자의 종교였다. 불교가 부자의 종교였다고 말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불교는 가난한 사람의 종교가 아닌가? 심지어 가난해지려고 하는 종교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스님의 생활을 보면 이런 생각이 당연해 보인다.

부처님 당시는 농업 생산성이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였다. 즉 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숫자가 증가하자 모든 사람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됐다. 잉여 노동력이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상업, 공예, 인테리어, 건축 등의 산업이 발달했다. 도시가 팽창하고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의 실내를 잘 장식하는 미술가와 인테리어 업자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찰은 산 속 깊은 곳에 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모두 도시에 있었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계급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사, 수드라의 4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브라만은 사제계급, 크샤트리아는 왕족과 귀족, 바이사는 평민, 수드라는 노동계급이었고 수드라 밑에는 불가촉 천민이라는 계급이 또 하나 존재했다. 도시의 부자는 주로 평민 계급이었던 바이사 계급이었다. 평민이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부자가 되자 일부 브라만이 체면 불구하고 수공업에 종사해서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일도 있었다.

불교 가르침은 욕망 직시
부자 되려는 욕망과 함께
행복한 세상 위한 노력 필요해

주로 평민이었던 도시 부자들은 가장 혁신적인 종교인 불교에 매료된다. 자신이 평민이기에 계급제도를 부인하고 능력과 노력을 강조하는 불교에 끌렸다고 보아야 할까? 인도는 당시 기존 종교인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신흥 종교인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을 사문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은 사문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문이었다. 불교가 부자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불교 교리가 도시 귀족의 문화에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는 서양 학자도 있다. 오늘날 불교를 고루하고 가난한 종교로 인식하는 사람의 눈에 이러한 주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리라. 게다가 불교는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 2,600년 전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지금도 개신교는 여성 목사가 없고 천주교의 수녀는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가 아니다. 불교에서 여성은 당당한 성직자이다.

경전에 부자는 ‘장자’라고 표현한다. 불교 최초의 사원도 어떤 장자가 기부한 땅에 왕이 건물을 지어준 사원이다. 불교는 부자의 기부에 의해 크게 흥성하였고 부자의 무역로를 따라 전파되었기에 불교를 상업불교(mercantile Buddhism)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역상을 따라 출가자가 전법 활동을 했는데 밤에는 출가자가 설법을 하고 낮에는 무역상과 함께 이동했다. 이처럼 부자와 불교 출가자는 서로 상부상조하였다.

얼핏 생각하면 동남 아시아의 불교국가가 가난하기에 불교 믿으면 가난해진다는 주장이 잘 먹힌다. 그러나 일본과 싱가포르는 불교국가지만 가난하지 않다.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개신교 신도와 천주교 신도보다 불교 신도의 소득이 평균적으로 더 높았다. 게다가 불교 신도의 평균 학력이 제일 높았다. 한국은 어떨까? 조사한바를 접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한국에서는 불교 신도의 평균 소득이 개신교나 천주교보다 낮을지도 모르겠다. 평균 학력은 어떨까?

불교가 가난하고 저학력자인 사람의 종교가 된다 해도 문제 되지는 않는다. 불교가 꼭 부자와 고학력자의 종교일 필요는 없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이기만 하면 된다. 다만 원래 부자가 좋아하던 종교가 왜 부자에게 외면 받는 종교가 되었는가를 한번쯤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불교가 고통 받는 현대인에게 해법을 주고 부처님 말씀 대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면 오늘날 불교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많은 불자가 막상 불교교리의 핵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불교교리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면 왜 부처님 당시의 부자가 불교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자는 불교를 어떤 종교로 보고 있을까? 만약 불교가 대한민국 부자의 눈에 매력적인 종교로 보이지 않는다면 불교의 진짜 모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불교의 혁신성을 되살려 불교를 부자도 좋아할 수 있는 종교로 만들어야 한다. 불교 신도로서 올바른 경제생활을 하려면 우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욕망 앞에 정직해야 돈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불교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면 우리의 신행 생활 또한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부처님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고 불교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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