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있는 데가 부처님 자리이고, 생활이 그냥 부처님 법!

오늘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또 한자리를 하면서 서로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밝히기 위해 자리를 갖췄습니다. 지금 시쳇말로 공부하는 과정을 시(詩)로 한마디 읊겠습니다. 잘 파악해서 들으시고 또 이날까지 가르쳐 드린, 가르쳐 줬다고도 할 수 없지만, 우리 자가발전 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숭상하던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같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 불이 진동하여
이름 없는 이름이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줘서 하는 말도 아니요, 누가 지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또 살핌 없이, 자기가 스스로 한 티끌만도 못하고 깨알 쪽만도 못한데…, 다 실은 뜻입니다. ‘또 한 말 다시 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읊은 그것은 우리가 제일 첫 번에 “들고 나는 모든 것을 주인공(主人空)에 놔라. 맡겨 놔라.” 이래서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 결국은 그때에 진짜 관(觀)해야 됩니다. 편안해졌을 때 ‘주인공 당신이 있다면 대답해 봐.’, ‘당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느냐?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좌선을 하고 편안해졌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편안한 것이 공부라면 이것은 영 발전이 없습니다. 좌선을 해서 편안하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묵인하고 ‘이만하면 족한 것을….’ 한다면 그걸로써 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공(空)에 빠지고. 그다음에 내 마음을 발견했을 때, 내 대답을 내가 들었을 때, 그때는 앞서의 그 습을 다 놨기 때문에 미비한 점이 없어. 그래서 일 단계는 다 놔야 된다. 그다음에 편안해지면 나를 발견해야 한다.

그다음에 발견해 가지고 진짜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때는 다시 체험하고 실험을 통해서 생활에 조금도 걸림 없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시 보임(保任)을 하면서 다시 굴리면서, 안으로만이….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고 남 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볼 겨를이 없는 게 아니라 남의 잘못, 잘된 것을 말할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건 바보가 아니냐?” 이러겠지만,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겁니다. “나와 남이 더불어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두루 같이’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모든 게 두루, “두루 같이 죽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면서 체험하면서, 남한테 잘못했다 잘했다 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이 안으로 굴려서 안에다 놓고 말을 하면서, 안에다 놓으면서 말을 했어도 말을 한 사이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럼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나를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발견했어도 만약에 그 습이 앞을 가린다면 자꾸 내가 잘났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제일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다면 그 ‘깨달았다’는 거기에서 그만 더 진전을 못하고, 더 계발을 못하고, 두루 물리가 터지지 못한 채 그냥 멈춰 버리고 말고 미(迷)해집니다. 해산을 해서 어린애를 낳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지 않고 어떻게 어른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육조 스님이 십육 년 동안을 그렇게, 깨달아서 바리때를 이어받아 가지고도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달마 대사 역시 면벽을 했고, 깨달았어도 그렇게 했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같이 두루 나투는 방법을, 둘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그것을 아주 정열적으로 확고히 알려고 했던 거죠.

“들고 나는 모든 것을 주인공(主人空)에 놔라. 맡겨 놔라.”
이래서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
결국은 그때에 진짜 관(觀)해야 됩니다.

생활이 불법이자 진리이자 과학이기도 합니다. 안에서 생각했으면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니깐요.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깨달아 가지고도 내가 ‘나’라는 게 없는 공부가 바로 진짜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승을 따라가면서 자기가 배우는 거죠. 자기는 시자로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공부 가르치는 자기로서, 자기는 공부를 가르치고 또 배워야 합니다. 자기는 놔야 하고 자기는 바로 항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데는 역시 각오가 튼튼해야만 합니다. 앞서 그 “같이 나투고 두루 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나 물 흐르는 데 붙지 않듯이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활과 부처님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건 정말 오산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생명들과 보이는 세계의 생명들이 둘이 아닌 까닭에 여러분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이 두 분이서 어린애를 다섯을 낳을 수도 있고 한 명을 낳을 수도 있지만 저 짐승들이나 저 바다의 모든 생물들이 낳는 알 수효를 보십시오.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데서도 한생각에 그렇게 수효가 많은, 모습 없는 모습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거를 어떻게 산 사람들이 감당해 나갈지, 그것도 모르는 데다가 함부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겁니다.

사람이 귀신 짓을 하기 때문에 귀신이 있는 거지 귀신 짓을 안 한다면은 귀신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과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그거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죠.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또 잊어버리시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다시 한번 말을 하겠습니다. 깨달았어도 타의에서, 여러분이 바깥에서 산기도를 간다 또는 법당에서 부처님을 찾는다 또는 무엇을 바깥에서 찾는다고 할 때, 관세음보살이든지 뭐든지, 이름은 상관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찾기만 하면 잘못되는 수가 많습니다.

정신질환이 생기는 원인이 어디에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세 가지 여건이 있죠. 바깥에서 찾는 데서 오는 게 있고, 유전성으로 오는 게 있고, 내 마음 속에서 어떠한 쇼크를 받아서 오는 게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 처리를 하시렵니까. 바깥에서 찾는 것은 그렇게 타의에서 와 가지고 “얘, 난 아무개다. 난 아무개야. 난 네 할아버진데. 난 네 아버지야. 나는 아무 때 죽은 누구다.” 이러고 달려든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게 다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요. 이건 미쳐 죽을, 환장해 죽을 노릇이죠. 내가 여러분을 접해 가면서 수없이 겪어 왔던 일입니다.

너무 지겨워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것을 딱 뒤집어서 말입니다, “이건 바로 너니까 너한테다 너가 장난을 하는 거니까, 이건 장난하는 그 이름들이 너를 떠보기 위해서 이름을 이거다 저거다 들고 나오는 거다. 바로 그것이 타의에서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조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너다, 바로.” 이렇게 얘길 하죠. 그러면 다행히 그걸 들으면 즉시 낫고 그걸 안 듣고 고집을 부리면 낫지도 않죠. 타의에서 온 거는 참 빼득빼득하니 이런 말을 해 줘도 듣지도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사실은 더뎠습니다. 그 사람이 그러든지 말든지 무조건 심부름을 해 줘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도 같이 들면은 쉬울 것을, 들지 않을 때는 같이 들지 못해서 쉽지가 않더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에 그런 걸 조심해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살면서 여러 자녀들을 기르시고 또는 부모들을 모시고 살면서 병에 휘둘리는 게 아주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야, 너는 얼마만치 남한테 이익을 줬느냐.’ 하고 항상 반문합니다. 남한테 말하기 이전에 자기를 한번 돌아보고서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너는 말보다도 행이 그렇게 됐느냐? 말로는, 이론적인 말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행 한 번 그대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한번 옷깃을 여미고 참작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기복으로 나갈 때엔 이득이 없고, 내 몸에도 이득이 없고 내 가정에도 이득이 없고, 나라에도 이득이 없고, 사회에도 이득이 없어요. 이건 하나가 잘못됨으로써 여러 가지가 무너지는 겁니다.

지금 현실에 앞장을 서야 할 지도자들이 과학자들 뒤에 서서 따라가지도 못한 채 근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따라가는 분들도 있고, ‘어차피 선은 어려우니까 그냥 생활 불교로써 나가자.’ 이러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선(禪)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활입니다! 참선은 생활이지, 불법이 따로 있고 참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와선(臥禪)이니 입선(立禪)이니 무슨 좌선(坐禪)이니, 이런 것은 이름이지 그 이름조차 없어야 합니다. 뭐, 정법(正法)이니 사법(邪法)이니 이단이니 이런 것도 전체 몰락 다 버리고 자유권을 얻어야 된다 이 소립니다. 자유권을 얻는다면 계율을 지키는 사람보다도, 지킨다고 지키는 사람보다도 지킨다 안 지킨다를 다 버린 사람이 계율은 더 잘 지켜요. 그리고 행을, 그대로 행을 하고 나갑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이득이 있네 없네, 이득이 있기 위해서 하는 거냐 이러겠지마는 그럼 뭣 때문에 이럭하고 공부하려고 애를 씁니까? 나오지 않는 거 무엇 때문에 합니까? 나는 그전부터 천당에 가려고, 아니 그런 데 가려고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도 이렇게 생각했죠. 구더기도 구더기 살림이 있고, 파리도 파리 살림이 있고, 또 개구리는 개구리 살림이 있고, 부처는 부처 살림이 있고, 살림은 크고 작을 뿐이고 미(迷)하고 미하지 않을 뿐이지 똑같아요. 그것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걸. 그래서 나는 살고 죽는 데는 절대 개의치 않았습니다. 또 무슨 승천을 한다, 천당엘 간다, 잘된다 못된다, 나를 잘해 주시오, 못해 주시오 이걸 떠나서 말입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는지, 지금 어디를 보고서 이렇게 걷고 있는지 이것을 알려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몸 하나를 크게 생각하면 은하계라고도 볼 수 있고 작게 생각하면 어느 혹성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마는, 석존(釋尊)께서 새벽 샛별을 보시고 깨달았다고 한 말씀이 여러분한테 이해가 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인간도 저 별을 볼 때, 별 하나 나 하나라고 할 때, 하나뿐이 아니라 이 속에 (배를 가리키시며) 은하계처럼 수없는 생명들이 지금 돌고 있습니다. 작동을 하고 있습니다, 반짝거리면서. 그런데 선장은 누구인 것입니까? 여러분이 한생각을 잘하면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지마는, 한생각을 잘못하면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는 누가 끌고 다닙니까? 여러분이 끌고 다니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몸뚱이를 지금 끌고 다니는 겁니다. 선장이 배에다가 지금 자기 중생들을, 자기 부처가 자기 중생들을 배에다 싣고, 지금 여러분도 배에다 싣고 지금 오셨습니다. 오고 간 사이 없이 말입니다. 이건 자동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움죽거린 것뿐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 몸 안에서 어떤 병이 났든지 가난하든지 일이 안되든지 그 모든 일체를 막론하고 내가 여기에서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한생각으로 주인공을 잡았을 때, 깨달았든지 못 깨달았든지 우선적으로 자기 참주인공을 들고 나갈 때에, 거기다가 모든 거를 맡겨 놓고 나갈 때에, 가정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잘 이끌어 나갈 때 이 몸뚱이에 어떠한 병이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병이라는 놈도 바로 ‘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은 없거든.

그렇기 때문에 병도 잘 생각하니깐 자기가 죽겠거든. 전자에 둘로 볼 때는 ‘내가 너를 이렇게 하면은 파워를 일으키지.’ 하는데, 하나로 볼 때는 ‘아하! 이거 파워를 일으키면 내 가정이 다 없어지니까, 이거 안되겠구나!’ 하고선 파워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걸 전제하고 믿기 때문에 걱정이 하나도 없죠. 어디 옆구리가 쑤셔? ‘어허, 신호가 왔구나. 네가 끌고 다니는 네 시자를 네가 고쳐! 고쳐 가지고 끌고 다녀! 나는 알 바 없다. 너 알아서 해라!’ 이러거든. 자기가 형성시킨 것 자기가 끌고 다녀야지 누가 끌고 다니느냐 이거야.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미생물에서부터 지수화풍으로 뭉쳐서 이날까지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주인이 바로 누구인 것입니까? 참자기인 것입니다. 수없이 겁을 거쳐 오면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해 가면서 나온 그 역사를 볼 때에는 정말이지 보배입니다. 실험을 통해서 너무 아프고 좋고 즐겁고 이런 것을 수차에 걸쳐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뜻이란 말로 형용할 수도 없고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보배인 것입니다.

그 보배가 그렇게 능동력 있게, 생동력 있게 과학적으로, 지금 내가 생각하면 바깥으로 반드시 나오게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정을 안 합니다. 왜 인정을 안 합니까. 여러분이 배고프다 하는 생각을 했다면 바로 밥을 먹으면서도 그것이 과학이 아니라고요? 인정이 안 된다고요? 똥이 마려우면 얼른 가서 똥을 누면서도 인정을 안 하는 겁니다. 왜? 왜 인정을 안 합니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뜻이, 팔만사천법문이 다, 이것은 과학이기보다 진리이지만 이름을 그렇게 지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 과학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벌써 삼천 년 전에 해 놨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렇게 좋은 법이니 너희는 너희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남을 알지 못하느니라. 병 자체뿐이 아니라 병으로 꼬집어 비유를 들어 말했지마는, 일체 만법이 다 거기에서 나오고 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기복으로 하면 어째서 공덕이 없다는 건지, 왜 양 무제더러 달마 대사가 그렇게 말했는지 그것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금 우리가 배우는 것이 저 뒤에 계신 부처님…, 여러분은 자꾸 내가 이렇게 십 년, 이십 년, 근 삼십 년 가깝게 여러분을 접해 오니까, ‘아하! 이래서 부처님을 조성해서 모셔 놓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마디 한다면 처음에는 ‘그거는 형상이니까.’ 이러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생각하지 말고 둘로 보지 말라는 얘깁니다. 여기서 (가슴을 가리키시며) 부처님을 볼 때는 부처님과 자기와 둘이 아니에요. 자기가 여기 있기 때문이에요. 타의에서 어떠한 상대를 만났을 때도 둘이 아니죠. 그러니까 나툰다는 말이 거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하면 법신(法身)이고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化身)이에요. 물리가 터진다면 보신(報身)이고, 문수보살도 있고, 보현보살도 있거든. 자기한테 모든 게 있는 거라. 그런다면은 산신(山神)이 따로 없고, 신중단(神衆壇)이 따로 없고, 용왕(龍王)이 따로 없고, 지신(地神)이 따로 없고, 약사(藥師)가 따로 없고, 칠성(七星)이 따로 없고 모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나투면서 찰나찰나 칠성이 될 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고 법신이 될 수도 있고 약사가 될 수도 있죠.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그 광대무변한 보배를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활용 못합니다. 이 도리를 가르칠 때 여러분이 편안하게 이 도리를 알아서 잘 살라고 그랬지 방황하라고 가르친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랑할 때 사랑하고 자녀들을 돌볼 때 돌보고 애정을 느끼되 착은 두지 말고 찰나찰나 그렇게 하라고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데에 끊임없는 그 날을 이렇게 살아나가는 데에 조금도 어김없고 걸림 없이 우리가 해 나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요기 놓으면은 요기서 걱정이고, ‘우리 남편이 명이 짧다는데, 어디 가 보니까. 칠성에다 놓지 않으면 이거 큰 걱정이야. 그러니까 요기다가 놔야 하고 또 어디 가서 보니깐 독성(獨聖)에다 놓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게 돼.’ 그러니깐 내가 또 독성한테다, 산신한테다 놔야 돼. 명이 짧다니까 칠성 찾고, 좋은 데로 가려고 또 지장 찾지, 병이 났으니까 약사 찾아야지?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여러분이 가정에 살면서 남편과 자녀들과 재밌게 살면서도 때로는 아침 새벽이면, 도대체 자기 있는 데가 부처님 자리인 것을 가지고, 또 생활이 그냥 부처님 법이거늘 어찌 그저 앉아서, 참선한다고 앉아 있고 또 염불한다고 앉아 있고 절을 삼천배나 백팔배 한다고 하고, 또 때로는 뭐 비린 것도 안 먹고 누린 것도 안 먹고 목욕재계하고, 애가 어떻게 되든 남편이 어떻게 되든 그냥 기도하러 간단 말입니다. 불교 신도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자기 앞도 못 가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하나하나 정돈하면서 해 나가는 대로 그러한…. 그래 어떠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죠. 어쩌다가 방에 들었더니, 벌이 말입니다, 반사된 창문을 문인 줄 알고 입으로 쪼다 보니 몸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입 떨어지니 말도 떨어지더라. 여러분이 아무리 염불을 하고 경을 읽고 온통 야단을 해도 몸으로써, 말로써 그렇게 하는 거는 아무 이득이 없어요.

첫째, 이득이 없거니와 둘째, 남편이 하루 종일 나가서 일하는데 아침에 마나님들이 좀 재밌게, 좀 따뜻하게 해 줘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넌 시간 되면 이렇게 하겠지.’ 하고 밥이나 해 놓으면 그저 그뿐으로 알고 이렇게 하는데, 사람이 오고 가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의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고달프고 외롭고 바깥에서 어떠한 속상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말 한마디 아내가 슬기롭게 싹 해 주는 데 사는 보람을 느끼고 마음을 턱 놓고 나가요.

여러분,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머슴이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식모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여자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여자는 또 남자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아내의 행동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머니의 행도 해야 하고 또 아내의 행도 해야 하고, 나중엔 딸의 행동까지도, 동생의 행동까지도, 친구의 행동까지도 해 줘야만이 다복하고 융합이 되는 겁니다. 이게 조화를 이루는, 이것이 바로 포근한 살림이요, 포근한 삶이요, 생동력 있는 삶이요, 의지력 있는 삶이요, 진실한 삶이란 말입니다. 이것저것 빼놓고 불법이 어딨습니까? 여러분이 없으면 불법이라는 것도 없는데요.

제가 차근차근히 얘기는 못해 드려도 알아들으시겠죠? 뜁니다, 저는. 뭐 체계도 없습니다.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합니다. 그렇지만 듣는 분들이 체계 있게 잘 들으세요. 이건 듣기에 달린 겁니다. 한 마디에 열 마디가 거기 포함됐다는 걸 아시고, 한 마디 한 뜻에 일체가 거기 다 달려서 돌아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무로 표현을 한다면, 무 맛은 한 맛입니다. 그런데 거기 깍두기를 만들어 놓으면, 양념을 했기 때문에 깍두기라고 이름이 붙었습니다. 무라고 안 그럽니다. 그럼 이 깍두기 한 가지 가지고 착을 둘 겁니까? 무는 숫장아찌도 하고 장아찌도 하고 채장아찌도 하고 깍두기도 하고 김치속도 넣고 무국도 끓이고 그런다는 걸 안다면 이 깍두기 하나 가지고 착을 두지 않으시겠죠.

지금 이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 부처님 이름들을 죽 놓고 찾지 말라는 얘기죠. 절할 때도 그렇습니다. 생각을 한번 착 둥글리면 그냥 하나입니다. (주먹을 쥐어 보이시면서) 하나를 딱 쥐고선 한번 탁 절하면 그걸로써 족한 겁니다. 거기 조상도 부처도 중생도 없이 몽땅입니다.

좀 간편하게 살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공부하다가 좀 어려운 것 같으면 “그분이 그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으면 우리가 편안할 걸 그랬다.” 그러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니 그럼, 먹어 보지도 않고? 하하. 아니, 맛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단군이나 또는 석존이 그렇게 가르쳤고 사대 성인들이 다 그렇게 가르쳤고,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가 그것을 거름으로 삼아서 생각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이 그렇게 무시하겠습니까?

우리가 또 제일 무시하지 못할 것은, 자기 몸뚱이가 허무하다는 겁니다, 지수화풍이. 근본적으로 지수화풍으로 인해서 모두가 이루어진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수화풍이 허무하다, 물질들은 전부 허무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허무한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한 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7년 1월 18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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