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심(大疑心)은 큰 의심이란 말인데, 이는 화두를 철저하게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무문 혜개선사는 “삼백육십개의 골절과 팔만사천개의 털구멍으로 온 몸을 다 들어 의심하라”고 말했다. 화두를 일단 들면 철저히 의심하라는 메시지다. 화두로 간절한 의심, 근원적 의심을 마음속에 품고 삶을 관하고 살피며, 부처님 가르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을 남들보다 의미있고 값지게 사는 길이다. 우리가 화두를 드는 순간,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는 순간, 내가 본래 그 자리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생각을 늘 해보자. 화두를 들고 거기에 간절한 의심을 품고 수행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 본연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백육십개의 골절과 팔만사천개의 털구멍으로
온 몸을 다 들어 철저히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서산대사 송(頌)에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 의래의거의자간(疑來疑去疑自看)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는 말이 있다. 의미를 해석하면 “만가지 의심을 다 몰아 한 의단으로 나아가라.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서 의심하는 자신을 보아라. 모름지기 용을 잡고 봉황을 잡는 용맹한 사람이라야 한주먹으로 처서 쇠로된 성벽관문을 부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렇듯 자신을 비춰보는 금강보검(金剛寶劍)인 신무기가 바로 ‘이 뭣고’인 것이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의심을 이어가는 데는 처소(處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승상포단(不僧上蒲團)이라, 한번도 방석위에 앉지 않고, 지시종조지모(只是從朝至暮)하며, 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보불리(步步不離)라, 걸음걸음마다 화두를 놓치지 않고, 심심무간(心心無間)하여, 마음가운데 간단이 없어서, 여시경급삼년(如是經及三年) 증무일념해태심(曾無一念懈怠心)하듯이 삼년이 흘렀는데 일찍이 한 생각도 게으른 생각이 없다는 마음으로 한다면 성불할 수 있다.

꼭 포단에만 앉아서 만이 아니고 이렇게 포행하면서 ‘이 뭣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 가면 반드시 깨달음을 기약하게 된다. ‘이 뭣고’는 집에서 빨래하고 밥 짓고 청소하고, 농사 짓고, 직장서 근무 하면서 눈을 감으나 앉으나 서나 누워서도 해보자. 차를 타고 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무슨 일을 하면서도 항상 ‘이 뭣고’가 끊어지지 않아 쌀 한톨이 모여 한홉이 또 모여 한말이 되듯이 차츰 응집력이 쌓이게 되면 마음이 불안에서 벗어나 평온해 진다. 이렇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서 벗어남은 물론 찰나간 생사(生死)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또한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분별심 작용이 완전히 멈춰져 색상경계의 실체감이 사라져 버리면, 그 색상 경계가 실상(實相)이 아니라 본연청정(本然淸淨)의 상(相) 즉 비상(非相)임을 알게 되며, 내면의 성품 또한 비상이어서, 경계가 없이 툭 트여 통해 있음을 보게된다. 즉 내면의 성품과 바깥 색상 경계가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며, 삼라만상이 하나의 마음 즉 일체유심(一切唯心)을 깨닫게 되며, 천만(千萬) 가지 생각을 하나에 다 모아 버리는 것을 전제한 현전일념(現前一念)인 ‘이 뭣고’가 끊이지 않아야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 뭣고’가 내몸과 하나 되어 의심 덩어리만 홀로 빛나는 것을 의단독로(疑團獨露)라 한다. 생각이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는 순간, 앞뒤로 꽉막혀 오도가도 못할 때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마치 코뿔소 뿌리 저 안쪽에 있는 먹이를 찾아 들어간 쥐가 뒤돌아 나올 수가 없는 경지서 뚫고 나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을 말한다.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처럼 인생사는 궁하면 통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을 때 화두가 타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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