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봉은사 일요법회... 주제 : 복과 불교의 연관성

새해가 되면 자연스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덕담을 한다. 무언가 잘되고 못 되고는 복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1월 7일 봉은사 일요법회서 ‘복과 불교의 연관성’을 주제로 법문했다. 원명 스님은 “복을 짓기 위해 불자들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 한다. 스스로 공덕을 많이 짓기 위해 노력해야 생기는 것이 비로소 복”이라며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허송세월을 보내는 ‘죽이는’ 시간보다 ‘살리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며 사람들에게 복을 짓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박진형 기자
원명 스님은… 1975년 월정사에서 능혜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7년 탄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1979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용주사 중앙선원, 불국사 선원, 마곡사 태화선원, 고불총림선원, 칠불사 운상선원, 법주사 총지선원, 봉암사 태고선원, 상원사 청량선원 등에서 정진했으며, 삼화사 주지를 역임했다. 2013년부터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과 조계사 주지, 2015년부터 현재까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복은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
비우고 나눠준 자리에 복 들어온다
허송세월 보내면 시간 죽이는 것
주어진 시간 잘 써서 시간 살려야

2018년 봉은사 첫 법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는 새해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하죠? 복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삶의 전체를 봤을 때, 우린 복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다 그만한 복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우리 세상이 험난한데 이런 험난한 세상에서 복이 받쳐주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재물도 있어야 하고, 집 살 돈도 있어야 하고, 우리가 먹고 살 만큼의 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복은 우리 삶에서 절대적입니다. 무엇을 한다 해도 복이 많으면 됩니다. 복이 부족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복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복불교의 근원
한국불교는 기복불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복을 구하고, 복을 기원하고, 복을 바라는 그런 종교라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기도 하고 우리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부처님에게 복을 달라고 기원하기도 합니다. 사실 복은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복 지을만한 행위를 함으로써 그 행위에 따라서 복을 받습니다. 그만큼 복을 받을 마음을 지녀야 하고, 또 복 받을 그 마음에서 말이 나오고 행동이 나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내 마음이 얼마큼 복 받을 마음이 되어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절대 내가 복을 받기를 많이 원한다고 해서 복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항상 비워주는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자꾸 비워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 작게 비운 것보다 크게 비운 만큼 복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혼자 질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있어야 해요. 상대는 우주 만물에 두루두루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있습니다. 자연을 우리가 잘 살아가게끔 하는 것도 공덕으로 곧 복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힘든 삶을 좀 더 편하게 살게 해주는 것도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기복불교라고 많이들 하는데, 실제로 불교는 기복불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불교를 중시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 해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는 억압하는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특히 벼슬에 나가려는 사람이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교가 아주 억압받고, 부처님 말씀에 대해 얘기할 수 없었던 시대가 바로 조선시대였습니다. 당시에는 부처님 말씀을 얘기하면 끌려가서 맞을 정도로 불교를 얘기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가 500여 년 지속됩니다. 우리는 500여 년간 불교를, 부처님 말씀을 일반 대중에게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한국불교가 여성불교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절은 보살님들만 간다’는 DNA가 500년 간 축적돼 있어요. 거사님들은 유생으로서 불교를 핍박하고, 보살님들이 뒤로 살짝 절에 가서 우리 가족의 평화, 건강, 장원급제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가정의 복락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져 지금의 불교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기복불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불교가 있을 수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절에 와서 불공드리고 기도하면 집안이 편안하고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기복을 가졌습니다. 이 세월이 500년입니다. 500년간 기복불교가 자리잡았고, 여성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보살님들만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영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바뀌어서 거사님들도 오시지만 주로 보살님들이 다녔습니다.

기복불교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스스로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내가 절에 다니고, 절에서 기도한 첫 시작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세요. 내가 부처님 법을 잘 공부 하고, 부처님처럼 수행해서 도를 통하겠다고 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절에서 기도하고 부처님에게 불공드리면 집안이 편안하다는 마음으로 옵니다. 많은 분들이 복을 구하는 심정으로 절에 들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작이 그렇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공을 열심히 드렸다는 과정도 중요하고요.

우리에겐 점차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알게 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처음부터 부처님 말씀대로 배우고 익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복불교가 불교에 입문하는데 좋은 방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세월은 그야말로 덧없습니다. 어느새 60대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60대를 눈앞에 마주할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관념 속의 시간입니다. 언제 돼서야 ‘내가 늙었구나’ 하시나요? 몸이 안 따라줄 때, 몸이 아플 때, 이럴 때 내가 나이가 들고 시간이 많이 흐르고 몸과 인연이 다 됐다는 것을 압니다. 아파야만 알죠. 시간은 관념 속에만 있습니다. 내가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아픔을 수행의 벌판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프고 굶주리는 것이 도를 닦는데 발판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시간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잔고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은행의 잔고뿐 아니라 내 삶의 잔고. 새해에 들어와서 내 삶의 잔고가 얼마 남았는가, 얼마큼 지나왔고 얼마큼 남았는가 하는 것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계기가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남은 잔고를 어떻게 유익하게 보낼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젊었을 땐 시간이 안 갔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귀중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잔고를 어떻게 활용할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빠르지 않지만 나중이 될수록 빠르게 지나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속이 붙습니다. 매 순간순간 스스로 시간적 관념에서 나라는 몸이 과연 잔고가 얼마나 남았나 생각해보세요. 은행 잔고가 안 남으면 걱정하잖아요. 몸 잔고 안 남은 것도 걱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공덕을 많이 지어도 살아있을 때 한 순간 깨달음을 위해서 얼마만큼 내가 유익하고 사람답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 낮과 하루 밤 사이에 만 번 죽고 만 번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하루 순간순간에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다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지금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 만나서 다른 사람 비난하며 한 세상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불교적 수행을 하고 좋은 덕담을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쓰면 시간을 살리는 것이고, 잘못 쓰면 시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잘 살리면 살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시간을 죽이면 그만큼 허송세월이 많아집니다. 자기 시간을 유익하게, 얼마큼 살릴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이 귀중한 시간을 가치 없이 흘려보내지 말고, 죽이는 시간보다 살리는 시간을 많이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만나서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시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잡담을 하고 엉뚱한 일을 한다면 시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간을 죽이는 삶보다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엄청난 많은 정보가 굉장히 빠르게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은 정보를 가졌다고 해서 결코 행복하거나 시간을 살리는 삶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을 단순하게 사는 것이 더 좋을 수 도 있습니다. 내가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앎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의 불입문자에 대해 알음알이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많이 알게 되면 거기서 생각이 많아지고 번뇌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행복을 보고 가는 길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남 험담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죠. 사람 안에 안 좋은 습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잘못되는 꼴을 아주 고소하게 생각하는 안 좋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히려 시간을 죽이며 헛되이 보내는 삶이 되는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말과 행동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유익한 쪽으로 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올 한 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순간순간 얼마큼 유익하게 시간을 살리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살리는 삶이 복을 짓는 삶이며 시간을 죽이는 삶이 업을 짓는 삶입니다. 시간을 잘 살려서 새해에 복을 많이 받는 그런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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