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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전법제일 부루나 존자 … “교육 불사가 곧 불교 ‘미래’”이학송 前 교법사(59·생명의 숲 국민운동 전문위원)

 

부처님의 십대제자로 불리는 부루나 존자는 설법의 재주가 뛰어나 ‘전법제일’이 되었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재주가 뛰어나’ 이전에 ‘원력이 깊어서’가 먼저였음을 알 수 있다. 부루나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전법의 원력이 가장 깊었기에 전법제일이 된 것이다. 그 만큼 ‘전법’이란 단단한 원력에서 출발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시대든 ‘부루나’는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지금 부처님 법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전법은 미래를 위한 일이다. 그 ‘미래’를 위해 단단한 원력을 품은 부루나가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그의 전법지는 미답의 ‘청소년.’ 군법사와 교법사로 활동하며 오랜 세월 교직에서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에게 불심을 심고자 진력해온 이학송 前 교법사다.

 

청소년기 불연으로 ‘부루나’서원
중2때 꿈에서 관세음보살 만나
소림사 불교학생회 활동하며
불교학과 군법사 교법사 서원

군포교·청소년 포교 한 길
군법사 시절 사비로 법회 열어
교법사 시절 청소년 포교 진력

 

청소년포교 프로그램 달인
이학송, 그의 이력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 다양한 이력은 한 가지에 달린 것들이다. 다름 아닌 ‘전법’이다. 현재 현역에서 물러난 그는 의정부 광동중ㆍ고등학교와 부산 장안중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임하기까지 오랜 세월 교직에 몸담았다. 교사가 되기 전에는 7년여 동안 군법사로 전법에 힘썼고, 교사가 되면서부터는 교법사로 청소년 포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군법사로 있는 동안 사비를 털어 법회를 열기도 했다. 하루에 두세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차도 많지 않고 길도 좋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는 즐거웠다. 부루나 존자가 그랬듯이 미답의 불모지를 찾아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에게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부루나 존자 시절에 비하면 ‘일’도 아니죠.”
군법사의 이력은 교법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는 아직 부처님을 모르는 학생들을 법당으로 부르고 싶었다. 부처님 가까이 살게 하고 싶었다.
“청소년 시절의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감수성이 한창이고 아직 자아와 인성이 확실하지 않은 청소년들을 부처님 가까이 부르는 일은 그야말로 좋은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원력을 성취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많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부처님 말씀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가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씨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2000년, (사)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이하, 파라미타)에서 청소년문화연구소장을 맡게 된다. 그는 그때 수많은 청소년 포교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일반 학교에서도 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어요. ‘불자’와 ‘비불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할 일도 아니고요. 청소년은 우리 모두의 아이들입니다. 학생들은 물론 모든 이들의 삶에 부처님 말씀이 맑고 향기롭게 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불교를 내세우지 않고 학생들을 불교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많은 학생들을 부처님 가까이로 부르고 싶었어요. 학교 법당을 그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그들을 숨 쉬게 하고 싶었어요.”
그가 개발한 청소년을 위한 ‘불교신행프로그램’은 수없이 많다. △한마음으로 하는 독경대회 △염주(합장주) 만들기 한마당 △불국토 마을 설계도 공모전 △108배의 생활화 △나의 마니또 보살 찾기 △진리의 탑 쌓기 △효도를 위한 신행 실천 기도 △북한 동포돕기 각종 프로그램 △은혜도(인연도) 그리기 등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중 ‘108배의 생활화’는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그가 의정부 광동여고(현 광동고)의 교감으로 재직할 당시 광동여고 학생들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해 108배를 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시작한 학생, 신심을 다지기 위해 시작한 학생, 교법사가 만든 단주선물을 받으려고 시작한 학생, 그 시작의 동기는 제 각각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108배’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 무엇보다 부처님이 계신 법당에 모인다는 것이 ‘의미’였다. 지금도 이학송의 ‘108배’는 여러 교법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유로 시작하든 108배를 하다보면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죠.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도 한 번 쯤은 고요한 곳을 지나갈 때가 오죠. 그렇게 숙연한 시간을 경험하다보면 부처님 가까이 가는 것이죠. 그래서 청소년 시절에 부처님 만나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죠.”
그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그는 2003년에 파라미타 지도자 지침서 <청소년 신행프로그램모음집>을 발간했다. 그렇게 그는 30여 년 간 오직 청소년을 위한 포교에 진력했다. 교육불사야말로 크고 시급한 불사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루나 존자가 불법의 불모지를 찾아 나섰듯 그는 전법의 시선이 많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 나서기로 서원한 것이다. 그의 원력불사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관세음보살을 만나 다시 살다
부산에서 태어난 이 씨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밭에서 자랐다. 본가는 물론 가까운 일가 모두가 부처님의 울타리를 둘렀다. 친척 중엔 절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절 마당에 익숙했고, 법당 좌복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삼촌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절 마당에서 놀다가 큰스님들을 만나기도 했다. 친척의 사찰은 개인 사찰이었지만 사찰엔 큰절 스님들의 왕래가 많았다.
이 씨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긴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지금은 생소한 일이지만 그 시절엔 흔한 일이었다. 누나, 동생과 함께 잠을 자던 이 씨는 꿈을 꾼다. 하얀 법의(法衣)의 관세음보살이 눈앞에 나타났다. 평소 그는 관세음보살을 알고 있었다. 이름은 잘 몰랐지만 늘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나 생생했다. 어떤 존재인지도 이 씨는 알고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글썽거리며 말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말없이 이 씨를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씨는 두 번 세 번 보살님께 서원했다. 그는 그렇게 간절히 용서를 빌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보니 집안엔 연탄가스가 가득했다. 그는 이미 연탄가스로 힘겨운 상태였다. 그는 직감했다.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있음을. 그는 무거운 몸을 간신히 챙겨서 누나와 동생을 깨웠다.
“그때, 관세음보살님이 깨워주셨다고 생각해요. 그때 보았던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꿈속에서 용서를 구했는데, 그 대목이 제 삶의 죽비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날 이후로 보살님의 모습을 잊지 않고 살고 있죠.”
그는 그 날 이후로 불교에 한 발 더 다가간다. 불교에 익숙했던 그였지만 이전과는 다른, ‘귀의’였다. 불교는 이제 그의 ‘종교’였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슴 속에 남은 보살의 모습. 그것이 이학송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었다.

2007년 광동중학교 교장 재직 시절 61회 졸업생들과 함께.
장안중학교 교장 재직 때 학생들과 야외수업 장면.
양주 흥국사(육군 60여단) 법회(앞줄 맨 우측 이학송)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 인식
‘108배의 생활화’ 등 수많은
‘청소년 불교신행프로그램’ 개발
“청소년기 경험 인성형성에 중요”
퇴임 후 학교 숲 짓기 봉사
‘불교 식물원’ 짓기 남은 원력

 

한 길 걷게 한 불교학생회
이 씨는 그로부터 얼마 후 부산 소림사에서 불교학생회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누나가 소림사 청년부 회원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바로 소림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불교학생회 활동을 시작한다.
“다니던 학교와 절의 거리가 제법 멀었는데, 학교 수업이 끝나고 절에 가는 일이 너무 좋았어요.”
그랬다. 이 씨를 평생 ‘부루나’로 살게 한 중요한 계기는 바로 불교학생회였다. 꿈속에서 본 관세음보살로 인해 다시 살게 된 이 씨였다. 절에 가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꿈속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착하게 살겠다는 서원을 구체화하게 된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스님과 지도교사로부터 법문을 들었는데, 그 설법의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는 그때 동국대 불교학과를 가기로 서원한다. 그리고 하루는 군법사가 법문을 하는데 그 모습이 또한 그를 사로잡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는 군법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역경원 연구원을 거쳐 1982년 12월 군법사 임용을 위해 속리산 법주사와 수원 용주사에서 5개월 동안 수련하고 광주 훈련소에서 군종장교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8월 강원도 철원군 3사단 사령부 백골호국사 주지법사로 임명된다. 최전방에서 교육활동과 법회활동을 이어갔고, 1986년 안양시 수도군단 충의사 주지법사 시절엔 서해안 일대, 수원, 김포 등 전방 지역을 돌며 법회와 교육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7년 동안의 군법사 활동을 끝낸 그는 교단에 서게 된다.
이렇듯 그를 불교학과로 이끌고 군법사와 교법사의 길로 이끈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불교’였다. 꿈속에 나타나 목숨을 건져준 관세음보살, 소림사 불교학생회, 매주 만났던 스님과 지도교사 그리고 군법사. 이 모든 경험이 그의 인생을 결정한 것이다. 이 씨의 청소년 포교 원력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청소년기에서 싹튼 것이다.

가장 큰 원력…종립학교, 불교식물원
2013년, 2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친 이 씨는 현재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학교숲특별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봉사활동 중이다. 그가 재직 중에 이미 매진해 왔던 일이다. 학교에 나무를 심고 숲을 짓는 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청소년 포교에 진력하면서 그는 또 하나의 커다란 원력을 품게 됐다. 청소년을 위한 포교 프로그램도 분명 필요한 불사이지만 그는 그보다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더 많은 종립학교 설립’이었다. 교육은 ‘미래’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는 불사를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청소년 시절에 보고 듣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다. 인생을 그리는 일이다. 그는 그 중요한 시절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불법을 심고 싶었다.
그는 퇴임 후, 그와 관련된 일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 씨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 일에 당연히 관심을 보여야 할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많이 아쉬운 일이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긴 시간을 두고 해야 할 일이죠. 제가 교직 생활을 통해 느낀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꼭 종교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더라도 교육은 중요한 일입니다. 기왕이면 부처님 그늘에 세워진 학교가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타종교에 비해 불교 종립학교는 너무 적습니다. 지금도 타종교는 학원 인수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쉬운 일이지만 원력을 접었다고 했다. 이 씨와 생각을 같이 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립학교를 늘리는 일 대신 많은 학교에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특히 요즘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자연은 인성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부처님 대신 자연을 심는 것이다. 꽃과 나무를 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비와 개구리를 보면서 청소년기를 보낸다면 미래의 우리 아이들 모습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동안 그는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 학교숲 특별위원회’와 함께 전국의 학교 1천여 곳에 숲을 만들었다. 그가 오랫동안 재직했던 광동고등학교에는 룸비니동산이 있다. 이 씨가 재직 중에 만든 숲 한 쪽에 이 씨가 붙인 이름이다. 이 씨가 생각하는 전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불교를 외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심는 것이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룸비니 동산’에서 살다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숲을 부처님 대신으로 생각한 이유는 불교가 숲의 종교라는 생각에서다.
“부처님은 숲에서 태어나, 보리수 아래서 수행하며 깨닫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셨습니다. 달이 밝은 보름날에는 숲에서 설법을 하셨고, 중요한 대목에서는 늘 숲에서 법회가 있었습니다. 불교의 시작은 룸비니 동산이고, 보리수 아래이고 녹야원입니다.”
그는 얼마 전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 식물원’짓기 운동에 나섰다. 기왕이면 불교라는 테마에서 시작하는 숲을 만들자는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식물이나 불교문화, 사상과 관련된 식물을 한 곳에 모은 ‘불교식물원’이다. 자연과 환경이라는 테마에도 맞을뿐더러 불교 자체가 갖고 있는 자연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불교식물원이 꼭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부처님 당시 부루나 존자는 외도의 주먹질과 흉기를 기꺼이 받으며 전법의 길을 폈다. 부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많은 부루나가 그 법을 지켜왔다. 탑을 세우고, 경전을 찍고, 가람을 지으며 지키고 넓혀왔다. 시절마다 불법이 중생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이름 큰 조사와 문중의 업적만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 시절의 부루나와 이후 수많은 부루나처럼 단단한 원력의 의지를 놓지 않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가까이 부루나가 있기에 이 시절에도 불법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생이 돌고 또 도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부루나 존자’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학송 위원은…195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교 교육대학원 종교교육학과를 수료했다. 동국역경원 편집실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1983년~1989까지 군법사로 복무했다. 1992년 의정부 광동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교법사)로 시작하여 교감과 교장을 지냈고, 2011년 부산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사)파라미타청소년협회 청소년문화연구소장, (사)한국청소년연합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통일바루(조계종 민추본) 회장과 생명의 숲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경기도 교육감상(2005), 보건복지부장관상(2009), 조계종 총무원장상(2000), 포교대상 원력상(2000), 국무총리 표창(2014) 등 다수 수상했다.

박재완 기자  waniholl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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