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발심자경문>에 삼일수심은(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盡)이라는 말이 나온다. 3일동안 닦은 이 마음은 천년 보배요, 백년을 탐해 모은 재산은 하루 아침에 먼지가 된다는 의미이다. 탐심을 내려놓으라는 경책이다.

내가 본래불이라는 신심축이 바로서야 원각 이뤄
집착의 혹(惑)만 떼내면 부처님과 꼭 같은 본래불

하지만 생활속에서 이 탐심, 집착심을 뿌리뽑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믿지 못하므로서 오는 중생병 때문인데, 금생에 이 병을 치유하는 가장 유일한 처방약은 참선이며 간화선 의 ‘이 뭣고’ 라고 생각한다. 중생의 미(迷)한 분별심 때문에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진심으로 믿고 행하지 못하고, 저 강물처럼 흘러 보내며 육도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 첫째는 대신심이다. 대아(大我)인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는 보이지 않는 중심에 있는 묘각인 축의 작용에 의해서이다. 우리들도 마치 콤파스(compass)의 축에서 원(圓)이 그려지듯이 그 축과 함께 돌아가는 것인데, 그러려면 내가 본래불이라는 신심의 축이 바로 세워져야 흩어지지 않고 해매지 않아 그 자리 원각(圓覺)과 하나를 이룰 수 있다. 동시에 주인이 되어 당당히 생사영단(生死永斷) 즉 생사의 고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종(從)노릇 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최상승법에서 신심(信心)은 내가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求)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영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이뭣고’로 내 안의 자성불(自性佛)을 철견(徹見)한다는 믿음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보면 ‘기제기제(奇哉奇哉)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 단이망상집착(但而妄想執着) 이불증득(而不證得)’이라고 했다. 의미를 풀어보면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널리 일체중생을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을 똑같이 갖추건만 단지 망상(妄想)과 집착(執着) 때문에 깨달아 쓰지 못하는 구나”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망상과 집착의 혹(惑)만 떼어버리면 부처님과 꼭 같은 본래불인 것이다.

통현(通玄)장자의 화엄론 게송에 “불시중생심리불(佛是衆生心裏佛) 수자근감무이물(隨自根堪無異物) 욕지일체제불원(欲知一切諸佛源) 오자무명본시불(悟自無明本是佛)”이 있다. “부처란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이니 자신의 근기에 따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일체 부처님의 근원(根源)을 알려고 하는가? 자신의 무명(無明)만 깨달으면 그대가 바로 부처라네” 하여, 중생이 한 생각 무명인 탐진치 삼독심서 벗어나면 그대로 부처라 하였다. 한 생각 이전의 허공같이 텅빈 자리가 적멸(寂滅)이며 우리의 본래 성품인 원점인 것이다. 이름 붙이기 이전의 이 자리는 오직 모르고 모를 뿐이다. 그 이름도 모양도 말길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자리, 나와 대우주와 일월성신 산하대지가 딱 하나가 된자리를 들어내는 유일한 통로(通路)가 바로 ‘이 뭣고’인 것이며, 이는 곧 부처이고 화두인 것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것이 없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이고, 모든 생명은 본래부터 깨달음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깨닫는 자와 깨닫는 대상은 둘이 아닌데, 둘로 나누어 놓고 깨달으려 하니 남북이 갈라진 것이다. 깨달아 증득하는 마음이 앞에 놓여 있으니 장애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고, 깨달음을 구(求)하는 것은 자기 집 안방에 앉아서 자기집을 찾는 격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생사가 없는 불성 확인을 위해 부인 야소다라와 부귀영화를 버리시고 설산으로 향하신 깊은 뜻을 믿는 것이 바로 대신심이다. 최상승법인 화두 ‘이뭣고’는 승속을 떠나 최상승근기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사회에서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활구참선 ‘이 뭣고’를 수행하는 불자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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