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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지상중계] “부처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

국회정각회 수요정기법회...주제 : ‘나를 바로 보자’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선방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벌써 1년째이다. 지난해 2월 26일부터 장좌불와를 하며 수좌들이 용맹결사 대정진중이기 때문이다. 첫 출발에는 22명이 동참했지만 현재는 16명이 정진중이다. 6명의 수좌가 중도 포기하고 출문했다. 하지만 이번 결사에 일대사를 마치겠다는 수행 열기만큼은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하다. 
이 용맹결사는 당대의 선지식이자 명안종사인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 큰스님의 원력으로 마련됐다. 대원 스님은 “쇠퇴일로에 있는 간화선 중흥을 위해 시작과 승풍진작을 위해 시작했는데, 매일 경책을 통해 용맹정진하는 이 납자들을 마주대하며 한국불교의 큰 희망을 보았다”고 피력했다.
새해 벽두, 지난해 다리를 다친 대원 스님이 불편한 노구를 휠체어에 의지한 채 오랫만에 바깥 나들이에 나서 대중들에게 법석을 펼쳤다. 1월 10일 국회의사당 정각회법당서 열린 국회정각회 및 직원불교신도회 수요법회에서다. 주제는 ‘나를 바로 보자’이다. 이 법문을 지상중계한다. 
정리=박진형 기자

대원 스님은…1957년 상주 남장사로 출가해 윤고암 스님을 은사로,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득도수계 했다. 88년에 고암 상언 대종사께서 입적하시자 그 유지를 받들어 계룡산에 소실된 옛 제석사터에 학림사를 다시 창건하고 1995년에는 오등선원의 낙성식때 조실로 추대되어 현재 스님들과 일반 시민들의 참선수행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머무르는 바 없는 응무소주
진리의 무아 세계 이생기심
마음으로 양변이 없음 알고
밖으로 자비로운 마음 써라

무술년 새해를 맞이하여 정각회 여러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계 모든 중생들에게 이 소식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바로 목전에서 이 소식을 확연히 깨달아 아신다면 영원히 대안심입명처(大安心立命處)를 수용할 것이요, 머무름이 없이 머물 것이며, 무심으로 행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장자 머리 위에 해와 달을 걸고 광명을 대천세계에 비추니 천하가 태평하고 즐거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청풍무종적(淸風無蹤跡)하고
- 맑은 바람은 지나가도 자취가 없고
백운자거래(白雲自去來)한데
- 흰 구름은 스스로 오고 가는데
통신무장애(通身無障碍)하며
- 몸을 통하여 걸림이 없으며
명주자희롱(明珠自戱弄)이로다
- 밝은 구슬을 스스로 희롱함이로다

아시겠습니까? 부처가 있는 곳에 가서는 머무르지 말고 지나가고, 부처가 없는 곳을 만나거든 급히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란 말입니다. 이 두 길을 여의고 대중은 바로 일러보십시오.

우리는 두 양변을 벗어나야 합니다. 상세히 설명해서 말씀 드리자면 여당과 야당을 뛰어나고 미국과 중국을 뛰어나고, 남과 북을 뛰어나서 양변에 머물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양변을 벗어난 세계, 그런 세계를 우리는 살아가야만합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양변서 놀아나면 우리 인생은 자유로운 생활을 못합니다.

지식에도 무식에도 머물지 마십시오. 지식은 양변의 시비를 가지고 있어서 불완전한 것입니다. 모든 중생은 나 자신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밖을 향해 해결하려고 하면 도리어 전도몽상을 이룹니다. 나를 바로 보면 모든 것에 걸림 없는 큰 지혜를 발휘하게 됩니다. 지혜 있는 자는 시작도 멋지고 중간도 멋지고, 끝마침도 멋지게 합니다. 또한 과감하게 모든 것을 책임질 줄 압니다.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는 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유와 무가 융합하는 것을 중도라 이름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첨단 과학 시대가 오늘날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준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무한한 불안과 공포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것은 편리함도 주지만 공포도 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편안함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식을 가지고 좋게도 쓸 수 있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자기들 나라의 패권을 위해서, 또 개인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 좋지 못하게 쓸 수도 있는 것이 지식입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욕망이 있는 한 지식을 가지고는 완전한 인류의 편안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벗어난 세계야말로 인류에게 영원한 편안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
그러면 지식을 벗어난 세계는 어떻기에 그렇게 영원한 편안함과 즐거움과 복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것은 부처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요, 신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요, 사람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또한 중생에게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성품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에 머무르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각각 국가를 자기 것이라고 하는 집착된 생각, 대한민국, 중국,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를 다 가지고 있는 그런 테두리에 머무르는 것도, 사상이나 학문이나 종교에 머무르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도 여기에 붙일 수가 없는 것. 세상의 모든 학문이나 종교나 이런 어떤 모양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차원의 세계를 응무소주(應無所住)라고 합니다. 응무소주의 실체가 양변을 뛰어난 세계, 대립된 양변을 뛰어난 차원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실체이기에 귀천이 없고, 고하가 없고, 성인이니 중생이니 신이니 하는 일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자성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응무소주라는 머무르는 바 없는 그 실체를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누구나가 다 평등합니다. 그 세계를 우리가 어떻다고 말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불가사의하다고 합니다. 불가사의한 세계를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 하고 그 세계를 밖으로 드러내서 마음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드러내서 쓰는 사람은 내가 없는 무아의 차원이라 하기도 하고, 그것을 무아라고도 하며 무주라고 하기도 하고, 머무르는 바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무아와 무주의 마음을 쓰는 것을 무한대한 마음을 밖으로 쓰는 것을 곧 대자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아와 대자비의 그 마음을 밖으로 쓰는 사람은 이 세상이 그야말로 천국이고, 극락세계를 정착시키고 살아가는 그런 차원의 세계로 발돋움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3차원, 4차원, 5차원 어떤 차원을 벗어난 시공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무애자재합니다. 이것을 서로가 걸림이 없는 세계라고 합니다.


걸림이 없는 세계
그러면 걸림이 없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서로 눈만 마주쳐도 척 알아차리고 다 압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압니다. 통해버리죠. 서로 상통해 버립니다. 그래서 융합이 됩니다. 융합이 되고 다 잘 됩니다.

그 세계의 마음을 쓰는 사람은 오늘날 정말 어려운 이 시대에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직장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다 내 책임이요 합니다. 만약 모든 직장인이 다 스스로가 똑같이 내 책임이라고 같이 들고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게 해결됩니다. 서로가 모두 내 잘못이요, 내가 책임진다고 나온다면 얼마나 일이 쉽게 해결되고 잘 되겠습니까.

그런데 전부가 명예로운 것은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고 불명예스런 일이 생기면 뒤로 빠지고 책임 안 지려고 합니다. 그런 속성은 오늘날 명예와 불명예 양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양변의 마음을 벗어나려면 우리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뭔지, 나란 존재가 뭔지를 바로 알면 그 사람은 응무소주를 알게 되고, 그 때 자기의 무한대한 무아·자비의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본래 응무소주라는 무아의 세계에서는 귀천이 없고 고하도 없지만, 오늘날 이 세계에는 귀천도 있고 고하도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다 이겁니다. 왜일까요? 응무소주라는 이 무아의, 자비의 마음을 널리 밖으로 옮겨 쓴 사람은 쓴 것만큼 무한대하게 밖으로 창조하게 되지만, 그 마음을 도외시하고 버리고 중생의 양변을 가지고 있으면서 좋고 나쁜 것을 가리고 따지고 좋은 것은 내가 차지하고 나쁜 것은 내가 안 하려고 하는 그 마음 자체로는 밖으로 크게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은 창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의 마음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오늘날 이 지식정보 사회, 첨단 과학시대에 우리는 이 땅에 정말 영원한 행복과 편안함을 정착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지식이 다시 새로운 어떤 패러다임에 의해서 잠식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또 새로운 지식을 개발해서 드러내면 오늘날 쓰는 이 지식은 다시 잠식돼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보다는 우리들이 응무소주의 이 마음을 바로 알아야 되는데, 이것을 알자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이 확실히 어떤 것인지 알아봐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바로 보고 아는 사람, 그 사람을 바로 자기를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깨달아 아는 그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완벽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완벽하게 편안하고 행복한 그런 청정극락 국토를 이 땅에 바로 세우고 정착시키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아는 사람은 밖으로 자비로운 마음을 스스로 쓰게 되는데 그 쓰는데 있어서는 사념처, 사섭법, 사무량심이 있습니다.

사섭법이란 보시섭(報施攝)·애어섭(愛語攝)·이행섭(利行攝)·동사섭(同事攝)이고, 사무량심은 자(慈)·비(悲)·희(喜)·사(捨)입니다. 자(慈)는 일체 중생을 내 몸과 하나같이 사랑하는 것이고 비(悲)는 내가 일체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을지언정 일체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희(喜)는 일체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捨)는 일체 중생의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생각을 다 버리고, 일체 중생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던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되고 이렇게 물질 만능으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 살려면 바로 우리들이 나 자신을 바로 보고 나 자신에게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의 머무르는 바 없는 마음을 낸다는 이런 차원의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보고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깨달아 알았을 때 이 세상의 모든 모양은 바뀌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대해탈인 것이고, 대열반의 세계인 것입니다.

박진형 기자  realjeanp@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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