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극적 경제활동, 불교 속에 답있다

옥스포드 대학에 최초로 경제학과가 설립될 때 반대가 심했다. 경제가 모든 사안의 판단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이러한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모든 일에 있어 경제적 측면은 다른 측면을 압도한다. 어떤 사업을 할 때 ‘다 좋은데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라는 지적을 받으면 그 사업은 즉시 동력을 잃고 만다.

소극적·수동적 관념 탈피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자
부의 창출과 회향 맞닿아

요즘 인물도 좋고 직장도 좋은 뛰어난 여성 즉 골드미스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부모의 걱정이 태산이다. 나에게 좋은 신부감 소개해달라는 사람은 없어도 좋은 신랑감 소개해달라는 사람은 엄청 많다. 만약 내가 어떤 신랑감을 소개하면서 ‘다 좋은데 경제력이 없어서...’라고 한다면 과연 관심을 가질까? 요즘은 일류대학 출신보다 부동산 임대업자의 아들이 결혼 상대로 더 인기라고 한다.

한국에서 20대 남녀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남녀 모두 ‘공부 좀 할 걸’이었다. 30대 남녀에게 물었더니 역시 ‘공부 좀 할 걸’이 1위였다. 20대에야 대학 다니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못 간 것을 후회하겠지만 30대에 가서도 후회한다니 왜 그럴까?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학벌이 좋으면 봉급도 더 많고 남이 알아주는 직장에 취업하기 때문이다. 40대는 어떨까? 40대 남녀 모두 여전히 ‘공부 좀 할 걸’이 1위였다. 직장 생활이 깊어갈수록 학벌이 평생 꼬리를 물고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절감한 탓이리라. 승진도 학벌이 좋으면 유리하다. 50대 남녀에게 역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남자는 여전히 ‘공부 좀 할 걸’이었는데 여자는 ‘아이 공부 좀 더 시킬 것’이었다. 사실 여자의 후회는 부모로서 자식을 더 좋은 대학에 보내지 못한 후회로서 자신의 후회가 자식을 통해 투영된 것이다. 만약 공부 잘해도 좋은 직장 얻지 못하고 돈을 잘 벌지 못한다면 이처럼 ‘공부, 공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60대가 되면 어떨까? 남녀 모두 ‘돈 좀 벌 걸’이 1위다. 미국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가장 후회되는 일 1위는 ‘젊어서 저축 좀 할 걸’이었다. 역시 돈이 최고다.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50대 이상의 남성은 은퇴 후 가장 중요한 것으로 1위 건강, 2위 배우자, 3위 돈을 꼽았다. 여성은 1위 건강, 2위 돈, 3위 배우자를 꼽았다. 여성은 배우자보다도 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남녀를 막론하고 노년기의 고민은 1위가 건강, 2위가 경제문제였다. 한국은 자살 1위의 국가이며 여성보다 남성의 자살률이 2배이상이다. 나이가 들 수록 자살률은 급등하고 남성의 경우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이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고등학생 절반가량은 '10억 원 정도가 생긴다면 감옥에 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초중고생에게 인생에서 가장 추구하고 싶은 목표를 물었더니 돈이 압도적 1위였다. 문제는 학년을 올라갈 수록 돈을 선택한 비율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녹색평론’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서울대 학생들한테 부모가 언제 죽으면 좋겠냐고 물으니 63세라고 답했다. 63세가 은퇴해서 퇴직금 남겨주고 바로 죽는 가장 적절한 나이이기 때문이라는데 가슴이 섬뜩하다. 서강대 교수가 대학생들, 그러니까 베이비부머의 자녀들에게 ‘아버지한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돈밖에 없다’는 답이 40% 이상 나왔다. 전국 20세 이상 39세 이하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행복의 조건을 조사한 결과도 1위 경제력, 2위 건강, 3위 이성과의 사랑이었다.

자살률 최고의 나라라는 대한민국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원인이라고 하니 돈이 원수가 아닌가? 노인빈곤률도 OECD 1위인데 노인자살률도 경제적 요인이 크다. 게다가 요즘 우울증이 급증하여 건강보험에서도 보험처리가 되는데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요인이라고 한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돈이 최고라는 답변이 1위를 차지하다니 명실공히 돈이 최고인 세상이다.

돈의 위력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고 돈이 정치권력도 좌지 우지하기에 이제는 독재권력을 두려워하는게 아니라 경제권력을 두려워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불교는 경제와 아주 거리가 먼 종교처럼 생각된다. 스님의 소욕지족의 생활은 금욕주의의 극단처럼 보인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베스트 셀러는 불교를 무소유의 종교로 각인시켰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회과학자를 선정한다면 아마 막스 베버가 압도적 1위로 선정되리라 생각한다. 막스 베버의 저서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인용된다. 나는 그가 불교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아주 실망했다. 그는 분명 위대한 학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아주 얇고 단견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위빠사나 명상을 배우며 불교를 접했다. 물론 명상을 배우기 전에도 불교에 대해서는 대충 들은 바가 있었지만 상식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흔히 사람들이 모여서 ‘불교란 이런거야’라는 식의 대화 수준 말이다. 명상을 배우다보니 점점 불교 경전에는 명상에 대해 어떻게 쓰여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기 위해 조계사 불교대학, 동국대학교 불교학 석사, 동국대학교 불교학 박사를 마쳤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불교 상식과 실제 불교교리는 얼마나 다른가 하는 점에 놀랐다. 즉 불교에 대한 오해가 세상에 너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제와 정치에 대한 불교 사상에 가장 놀랐다. 나는 명상을 더 배우고 싶어 불교공부를 시작했는데 명상보다는 경제와 정치에 대한 불교 교리에 빠져 들어갔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돈을 좋은 것이며 열심히 벌어야 한다고 수없이 말씀하셨다. 그것 뿐이 아니다. 불교는 소극적 수동적 허무주의적 종교로 이해되고 있는데 불교의 핵심 교리는 정반대의 논리를 설하고 있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하면 불교를 공부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식의 반응이 나온다. 마치 불교를 겉으로 내세우며 고상한 척하고 속으로는 돈을 좋아하느냐는 식의 반응인데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나는 속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겉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돈이란 나쁘니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고상한척 한적도 없다. 그리고 돈은 나쁘니 멀리해야 한다고 말해야 불교적일까? 내가 불교와 경제에 대한 책을 썼다고 하면 온통 돈이란 나쁘니 멀리해야 한다고 썼을 것으로 기대한다. 불교 신도는 가난해야 되고, 가난해져야 되고, 돈을 벌어서는 안 되고, 돈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고정관념부터 없애야 불교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고 이해를 할 수 있다.

내가 불교의 경제관에 대해 설명하면 많은 불자가 불교의 경제관은 다른 불교교리와는 매우 다르고 상충된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경제관은 다른 불교교리와 전혀 상충되지 않고 다른 불교교리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우리가 불교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돈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를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허무주의적 종교로 이해한다면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불교는 결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허무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슬로우 라이프라는 삶의 양식이 사람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미친 듯이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슬로우 라이프는 불교적 삶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슬로우 라이프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허무주의적 삶이라면 슬로우 라이프는 결코 현대인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슬로우 라이프가 지향하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니다. 단순 소박한 디자인을 흔히 젠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최소표현주의로 지칭하기도 하는데 불교가 스스로 젠스타일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사람들이 그러한 디자인을 불교적인 디자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젠스타일적인 디자인을 소극적 수동적 허무주의적 불교로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단순 소박한 디자인 뒤에는 정제되고 세련된 열정과 창의성이 숨어 있다. 이제는 하다가 귀찮아서 포기할 때, 게을러서 뒤로 미룰 때 자신이 불교적으로 살고 있다는 합리화에서 벗어나자. 불교는 결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업장을 소멸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신의 업에 갇히면 결코 업장을 소멸하지 못한다. 자신의 업에 갇혀 있으면 누가봐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허무주의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업을 애주 중지 신주 모시듯 하면 불교 신도이고 업을 소멸하면 불교 신도가 아닌가? 요즘 대한민국 빈부격차 논쟁에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에 이어 ‘무수저’까지 등장했다. 수저가 아예 없는 ‘무수저’에 비하면 흙수저는 그나마 낫다는 자조적인 단어이다.

만약 누군가 금수저로 태어나서 평생 부모 돈으로 편안하게 살며 노력하지 않고 돈 쓰며 살아간다면 불교적일까? 부모로부터 받은 종자돈으로 열심히 더 큰 돈을 벌면 비불교적일까? 만약 흙수저로 태어나 평생 내 팔자는 이러니 난 그냥 이대로 살거야 하면서 소극적 수동적 허무주의적으로 살면 불교적이고 열심히 노력하여 흙수저 업에서 벗어나면 비불교적일까? 게으른 성격으로 태어나서 부모가 야단치면 난 이대로가 좋아요 있는 그대로 받아주세요 하서 소극적 수동적 허무주의적으로 살면 불교적이고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여 열심히 노력하며 살면 비불교적일까?

오늘날 현대인이 겪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문제는 상당 부분 불교교리가 해결해줄 수 있다. 불교를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현대인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다. 불교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현대인의 고통을 직시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의미를 살릴 수 있다. 현대인의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이 경제 문제로 인한 고통이다. 경제 문제로 인한 고통부터 불교적으로 해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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