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 스님의 생활속 ‘이뭣고’ 수행

수행(修行)이란 지금 이 순간마다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화선에서 간(看)은 ‘볼 간(看)’ 자를 써서 빛을 안으로 돌이켜 화두를 본다는 의미인데, 동시에 오직 모르고 모르는 마음자리를 대의심(大疑心)으로 지어 간다. 마음은 전도몽상(顚倒夢想)서 깨어나기 전에는 결코 이치로는 알 수 없다. 유무를 넘어선 절대 가운데 머물러 쉬는 것이 머무름 없는 무주(無住)이다. 제불보살 께서는 언제나 이곳에 계신다. 그곳이 바로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지만, 무명(無明)에 눈이 가려진 중생들은 눈 뜬 장님이 되어 망상(妄想)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다.

생활속의 ‘이뭣고’ 수행, 다름의 차이 인정 가능
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지 강함의 증거가 아니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그에 따라 온갖 경계가 펼쳐지는 법이고, 한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경계도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억지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만들려면 외도가 된다. 만들려는 그 마음이 본래 자리를 가릴 뿐만 아니라 밖으로 찾아 나서게 하여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보리자성(菩提自性)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꼭 믿고 모든 망상(妄想)을 알아차려 ‘이뭣고’ 하면 저절로 근본이 드러날 터인데, 원숭이같이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며 온갖 좋다는 법을 다 배워 채워 넣어 알음알이만 오히려 가중시키니 소화도 못시키고 본래 자리로 돌아올 날은 더욱더 아득하기만 한 것이다. 불법은 본래의 보리자성을 생활속에서 ‘이뭣고’로 활용함으로써 우주(宇宙)의 정기(精氣)인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사이에도 얼마간의 작은 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있기에 나무들은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어우러져 숲을 이루며 살아가듯이, 사람이 함께 살아 가는 것도 너와 내가 같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각자 아름다운 꽃동산을 이룰 수 있다. 즉 나무와 같이 각자의 다름과 틈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때 조화를 이루며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려면 상대방으로 인해 화(禍)나 짜증이 났을 때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이뭣고’ 하고 내 자신을 객관화 시키면 마음이 그 짜증과 미움의 대상에 끌려가지 않고 멈추게 된다.

한 예로 옆 차선서 달리던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끼어 들었을 때, “가족중 누군가 위중해서 병원에 저렇게 급하게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지” 하고 ‘이뭣고’ 하면 화는 금방 사라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저 차가 내 차와 충돌해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것만 천만다행이네” 하고 또 ‘이뭣고’ 에 감사하면 만사가 형통해 진다. 바로 이것이 생활속의 ‘이뭣고’ 수행이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이지 강함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했다. 부처님도 “자비심(慈悲心)이 분노심(忿怒心)을 이긴다”고 설하셨다.

우리가 베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이뭣고’로 매사에 잘 인내하는 것이다. 화두(話頭)는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이론적으로 중생의 사량, 분별심이나 교리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 알아 맞히는 것은 활구(活句) 참선이 아니고 사구(死句) 참선이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그것이 슬프고, 기쁘고, 노엽고, 괴롭든 그 생각을 억지로 지우려 애쓰지 말자. 그 자리에 ‘이뭣고’ 하며 생각하는 이놈이 과연 무엇인고? 하면 묵은 업장(業障)까지 소멸되면서 만병의 근원인 모든 스트레스서 벗어나게 된다. ‘이뭣고’가 최상승의 활구 참선이요, 정법임을 믿고 수행하는 불자에게는 그 번뇌망상이 불보살의 손이요, 극락세계서 보낸 반야용선(般若龍船)이 된다. 하지만 믿지 않고 기복에만 매달리며 밖으로 헤매인 다면, 윤회의 굴레서 벗어날 수 없는 원수(怨讐)가 되는 것이다.

새해 벽두 저자와 함께 생활속에서 ‘이뭣고’ 수행을 시작해 보자.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