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마음으로써 당당하고 무겁게 두시면서 해보십시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7(男) 이렇게 질문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꼭 질문도 질문이지만 이 질문하는 것도 공부려니 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먼저 재가자로서 현실의 노동을 기피하고 그다음에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힘든 일을 싫어합니다. 그런 쪽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말고 받아야 할 것은 받아야 하겠지. 그리고 또 가는 거 일부러 잡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있지. 그러니까 언제나 진리에 순응하면서 우리가 마음을 턱 놓고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 여여하게 말이야.

똥구덩이라고 태양이 비춰 주질 않고
또는 똥구덩이가 아니라고 비춰 주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단지 빛을 가리고 있으니깐 태양이 들어가지 않을 뿐입니다.

질문자7(男) 부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큰스님 중생이 만들었겠지.

질문자7(男) 마음은 내는 겁니까, 나는 겁니까?

큰스님 내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것도 아니야.

질문자7(男) 흔히 나를 없다고 말합니다. 없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큰스님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거지. 아까도 얘기했잖아. 발자취를 거둬 가지고 왔느냐고. 한 발짝 한 발짝 뗄 때에 ‘한 발짝 떼어 놨으니까, 한 발짝 떼어 놨으니까’ 이러고 걷나? 무심(無心)으로 그냥 걸어왔지. 그 말도 역시 그렇지 않아? 고정된 것도 없고 말이야.

질문자7(男) 감사합니다.

질문자8(男) 전에 법형제회에서 제가 질문을 한번 드린 적이 있는데요, 하나하나 오는 경계가 있을 때에 주인공에게 맡겨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갔고 또 갑자기 많은 경계가 밀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제 자신이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스님께 질문을 드려서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어서 또 제가 가는 길에 어려웠던 모든 일들을 해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다시 뵙는데요, 그래 감사한 마음을 갖다 보니까, 감사한 마음도 주인공 자리에 다시 놓습니다마는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라도 주인공 자리에 회향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데 회향의 도리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몰라서 큰스님께 회향의 도리가 어떤 것이며 회향의 공덕은 어떤 것인지 여쭙고 싶어서 앞에 나왔습니다.

큰스님 항상 하시고 회향하시고, 항상 하시고 회향하시고 이러고 가는데 무슨 회향이 따로 있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써 지켜 나간다면은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회향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질문자8(男) 감사합니다.

질문자9(女) 감사합니다. 한 가닥 접어서 생각하면은 하나도 질문할 것이 없고요, 또 한 가닥 접어서 생각하면 질문할 것이 너무너무 많아서요, 이런 기회에 한번 제가 나와 보았습니다. 저는 선원에 나온 게 한 다섯 번 정도 돼요. 그러나 절을 나간 지는 한 20여 년이 가까이 됩니다. 그래도 그렇게 믿음은 확 오지 않았어요.

제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저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외숙이 목회자였습니다. 저를 전도를 하려고 그래서 교회를 나가 보고 했는데 아무리 애써도 전혀 믿음이 오지 않아요. 기독교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게 도대체가 용납이 안되고, 저는 그렇게 거부감이 들어요.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는 않지 않았는가.’ 하는 그런 거부감도 들더라고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지 말고 법을 따르라.” 하시면서 가셨던 게 참 마음에 스몄어요. 그러나 이렇게 절에를 쭉 다니면서도 별로 그렇게 믿음이 크게 오지를 않았는데 한 2개월 전에 대행 스님의 책들을 좀 봤습니다.

보면서 ‘아,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공부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랬는데 지나온 세월을 보면 ‘아, 대행 스님이 말씀하셨던 책 내용하고 내 생활하고 어쩌면 이렇게 같은가’ 하면서 참 공감이 가고 ‘아, 이랬었구나!’ 하면서, 더듬어 보면은 ‘아, 그 마음자리로 살아왔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지금도 그렇게 믿음은 확 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절에도 한 번씩 나가고 또 선원에도 한 번씩 나오면서 조금 혼돈이 오기 시작해요. 그리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종교를 갖지 않은 무신론자들에게도 적극적인 마음만 내면은 그 신비로운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그것과 불교와의 차이는 어떠한 것인가? 그 한마음 공부와의 차이는 어떠한 것인가? 그게 궁금하고 또 한 가지는, 저는 그래요. 저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슬플 때는 슬퍼하고, 기쁠 때는 기뻐하고,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면서 그렇게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마음으로는 아, 그런 모든 내 마음을 내가 내려다보면서 또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 마음공부 하는 데는 주저주저하면서도 내가 그 한마음이나, 선원이나 불교에 매달리지 않고 생활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모든 삶을 하루하루 생각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혼돈이 와서 믿음이 잘 안 오는데 스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큰스님 아휴 참, 이런 종교인을 다 봤나. 하하.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 쳐놓고 아 세상에, 생활하고 불교라는 그 단어하고 어떻게 떨어져? 불교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야. 우리가 말하고 돌아가는, 이 같은 마음으로써 말을 하고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교(敎)야. 일체 만법의 생활이 그대로 불법이야. 우리 인간들의 법이란 얘기야. 그런데 뭐가 따로따로 있다고 따로따로 생각을 하게 됐소? 그대로가 한마음의 근본이며 진리다 이거야. 불교가 어느 한쪽에 국한돼 있는 것이 불교가 아니야.

질문자9(女) 그렇죠. 그러면 절에 안 나오고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잘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한마음으로 그냥 무신론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불교이긴 불교인데 그것도 옳은 일인가요?

큰스님 어허. 이거 봐요. 당신네 자녀들을 당신네들이 가르칠 수 있으면 가르치지, 왜 학교에 내보내요?

질문자9(女) 감사합니다. 열심히 더….

큰스님 허허허. 하여튼 모두 다양하게 이렇게 질문들을 해 주니까, 모두 주변에서도 듣고….

질문자10(女) 한마음선원에 세 번째 찾아왔습니다. 먼저 큰스님을 만나뵙게 돼서 무척 반갑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미래에 백년해로할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격 탓인지 사이가 안 좋습니다. 이렇게 주인공을 믿고 관(觀)하면 어떻게 서로 한마음이 될 수 있는지요.

큰스님 그렇게 한마음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잘해서 잘 분간을 해야 돼. 내 그릇이 얼마만한 그릇인가? 그쪽 그릇은 얼마만한 그릇인가? 잘 봐서 같은 그릇으로써 인연을 맺는 게 좋겠지. 그거를 봐야 하고, 또 그렇게 봐서도 그 경로가 마음이 잘 통하지 않고 그런다면은, 통할 수도 있어. 그러나 너무 엄청나게 기울어진다면 통할 수가 없겠지, 자연적으로 그건.

질문자10(女) 지금 군인입니다. 장교 출신으로 있습니다. 삼사 출신으로 가서요. 그런데 성격 탓인지, 너무 사이가 안 좋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큰스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한마음 주인공 당신만이, 되든가 안 되든가 그건 당신만이 이끌어 줄 수 있다고 믿고 거기다가 맡겨요. 알았어요?

질문자10(女)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큰스님! 제 성격이 날카로워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제 목에 갑상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이렇게 치료가 되지 않거든요.

큰스님 그것도 내 주인공만이 그것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고 거기에 놔요. 성질이 올라오거나 성질이 나는 것도 거기서 나는 거니까, 성질이 안 나게 할 수도 있는 것도 거기라고 믿어요.

질문자10(女) 감사합니다.

큰스님 성질을 자꾸 내지 말아요. 성질을 내면요, 몸이 첫째 망가져요. 왜 망가지느냐? 내가 성질내는 대로 이 속의 의식들도 다 성질을 내거든. 그러니깐 몸이 망가질 수밖에. 허허허. 이거 거짓말 아니에요. 허허허.

질문자10(女) 감사합니다. 열심히 믿겠습니다.

큰스님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알리는 주지 스님에게) 가만히 있어. 이렇게 좋고 좋은 날,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리. 멀고 먼 데서도 찾아왔는데.

아, 그러면 갔다가 와. 그거 뭐, 걱정할 거 없다. 갔다가 와. 아냐, 갔다 와! 여러분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자기 발로 자기가 갈 거라고. 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안 갈까, 갈까?’ 이거 생각 안 한다고. 그냥 갈 수 있다면 그냥 가는 거지 뭐, 변소가 없나 뭐가 없나, 뭐. (대중 웃음)

질문자11(女) 아래층에 있다가 용기를 내서 올라왔습니다. 저희들도 온 식구들이 다 주인공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당뇨로 눈도 안 보이시고 뭐, 수술도 하시고, 병석에 오래 누워 있어서 바깥출입을 못하고 있는데, 한 몇 달 전부터 주인공 공부를 하면서 인슐린도 안 맞고 병원에서 약 타 오는 것도 안 하고, 어머니도 마음을 내서 약을 안 먹고 해서, 그전까지는 방에서 옆방으로 움직이는 것도 잘 못했는데 주인공 공부 하면서 몸이 많이 좋아지셨거든요. 그래서 참 고마운 일이다 하고 딴 사람들에게도 주인공 공부를 하니까 이렇게 좋더라 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얼마 전 밤에 화장실을 가시다가 넘어지셨어요. 그런 일이 있을 때 ‘이것도 우리 공부시키는 것이다. 주인공한테 놓자.’ 이렇게 생각은 하는데 자꾸 엄마가 고통스러워하시니까, 간절한 마음이 부족한 것인지, 맡기는데 맡기는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큰스님 못하는 게 아니라요, 잘하십니다. 잘하시는데,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어요. 죽는 거든 사는 거든 양면을 다 놓으셔야 됩니다. 죽는 거를 살리려고만 애쓰면 저울이 기울어져요. 그러니깐 죽는 거든 사는 거든 양면을 다 놓으셔야 빛,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시고) 광명이 탁! 번쩍 일어나죠, 예? 죽는 거를 두려워하고 살리는 것만 애쓴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죠. 그 도리를 파악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 믿음을 가지려면 올바르게 양면을 다 놓으시는 작업을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질문자11(女)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큰스님 열심히 감사하게 생각하시고요.

질문자11(女)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큰스님 네.

질문자12(女) 스님, 저는 맏이인데요. 막내 시동생이 스물일곱 살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지금 서른한 살인데 애들도 어리고 아직도 젊고, 그래서 항상 마음이 아파서 이 주인공 공부를 배운 뒤로는 늘 지극하게 마음을 내서 계속 관(觀)을 합니다마는 제 정성이 부족한 탓인지 아직 낫지를 않고 또 그 시동생이 교회를 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도 스님 말씀처럼 “하나님이 네 가슴속에 함께 계시다. 밖으로 하지 말고 기도를 해도 안으로 해라.” 하고 제 나름대로 말을 하긴 하지요. 그래도 낫지를 않고 그래서 오늘은 이 법회 오기 전에 광주에서 생각하니까 ‘내 아들딸이었다면 스님한테 진작 먼저 달려왔을 터인데, 내 정성이 부족해서 내가 아직까지도 용기를 내서 스님 앞에 나가지를 못했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가면 스님 앞에 꼭 말씀을 드릴 테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큰스님 부처, 태양은, 즉 말하자면 똥구덩이라고 태양이 비춰 주질 않고 또는 똥구덩이가 아니라고 비춰 주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단지 빛을 가리고 있으니깐 태양이 들어가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면 알아들으시겠지요. 그와 같은 겁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여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면의 세계에 들어가서 뭉쳐지는 그 마음, 한마음 내서 이끌어 가는, 그 다스리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몸이 좋아지는 결과가 나오죠. 그런데 마음에서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길 인도하는 나를, 길잡이를 잘못됐다 생각하지 마시고, 그 본인한테 몸 나을 때까지라도 그렇게 하라고 그래 보십시오.

풀 한 포기도 불교 아닌 게 없습니다, 생명 아닌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불교가 따로 있고 기독교가 따로 있고 이런 게 어딨습니까? 그렇게 마음들을 좁게 쓰니까, 그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질문자13(女) 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대구에 있는 보살입니다. 전번에 스님 친견을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심장을 많이 다쳤는데, 정신이상이 돼서 스님한테 한번, 공부하는 도중에 어떤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공부하는데 그 후에 또 11월달에 정기법회에 왔다가 가니까 스님이 공부하는 도중에 저한테 줄을 하나 던져 주시는데 줄을 받아 쥐었는데, 줄이 아니고 토큰이었어요. 토큰이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이 숙제를 풀어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큰스님 이 마음을, 죽는다 산다를 그냥 놓고 작업하는 것이 둥굴리는 겁니다. 모가 나지 않게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돈이죠, 뜻을 본다면요.

질문자13(女) 네.

큰스님 그러니까 이 오온(五蘊)의 진리가 그대로 인간의 마음에 모두 직결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다가, 직결돼 있는 그 자가발전소에다 모든 걸 놓으세요. 거기다가 맡기시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정코 가져 보세요.

질문자13(女) 그래서 저번 첫째 주에 법회에 와 가지고 스님께 두서없는 글월을 올렸습니다. 총무 스님께서 몇 자 적어 놓고 가라 해서 적어 올렸는데 전화도 몇 번 올렸고, 행여나 토큰이라서 차를 타고 오면은 약이 있을까 해서, 심장을 많이 다쳤으니까. 그래서….

큰스님 걱정 마시고요. 어서 그렇게 해 보세요.

질문자13(女) 네, 감사합니다.

큰스님 부처님도 죽고 사셨는데, 이 몸뚱이야 늦게 가나 빨리 가나 가기는 일반입니다. 하지만 벗을 때가 되면 벗는 거고 또 나을 때가 되면 낫는 거죠, 뭐. 열심히 해 보십시오.

질문자14(女) 큰스님, 감사합니다.

사회자 공부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큰스님 그저 아주 낮고 중간이고 제일 위고, 삼합이 다 맞아서 돌아가는 이치니까 내버려 두자. 허허허.

질문자14(女) 스님! 감사합니다. 먼저 대구에서 사위 때문에 온 보살입니다. 천도재 이후에 유방암이 골수암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피부가 새록새록 살아나는데 아픈 거를 저렇게 못 견디니까 아, 답답해서 여쭈어 보는 겁니다.

큰스님 나야 뭐, 의사가 아니니 무슨 다른 말을 해 주겠습니까? 의사들도 못 고치는 병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저 아까와 같이 이 세포 하나하나에 그 의식들이 기능을 해 준다면 해결할 수 있겠죠.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내 발목을 붙들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여기 (왼쪽 목을 가리키시고) 목이 굳어지는 병입니다. 굳어져서 병원에서 뚫었는데도 뚫은 자체도 움죽거리지를 않아요. 그러니깐 먹지도 못하고, 그냥 다 죽게 됐다고 붙들고 우는 겁니다. 가질 못하게 하니 어떡합니까? 그랬는데 그렇게 하라고, 진정코 이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육체를 이렇게 만든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해결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그랬습니다. 지금 어린애를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아, 그게 그냥 그날부터 움죽거리더라는 거죠. 그래 가지고 그걸 빼도 아무 탈 없이 그냥 말하고 그냥 먹고, 그래서 상까지 받았죠. 무슨 상이냐 하면은요, 감사하다는 상요. 허허허. 무언의, 무심(無心)의 상 말입니다.

질문자14(女) 저번 토요일 날 그날 한 세 번 일어나서 밤을 새웠어요, 하도 아프다니깐요. 그런데 그날 꿈에 스님께서 “한번 해 보자” 이런 말씀을 하셨고, 또 어젯밤 꿈엔 밤을 새워서 기도를 하니깐 뭐, 최씨 성을 가진 사람 발목을 잡으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이게 허황된 꿈인 줄은 아는데 스님께 여쭈고 싶어서요.

큰스님 꿈이 허황된 것도 아니고 안 허황된 것도 아닙니다. 생시가 꿈이고 꿈이 생시니깐 말입니다. 이 모두가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마음을 먹고 꿈도 꾸는 거고, 꿈을 꾸는 것도 이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저 마음으로써 당당하고 담담하게, 믿는 마음으로써 당당하고 무겁게 두시면서 해 보십시오. 그게 발목 붙드는 얘깁니다.

질문자14(女) 본인도 열심히…. 감사합니다.

사회자 질문하시고 싶은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다음 주 법회에….

큰스님 세상이 모두가 그러그러하니까, 그저 그러그러하게 여여한 마음으로써 마음을 턱 놓고 인생살이를 해 봅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우주 천지도 없으며

사생(四生)과 사계절도 없으며

동서와 시간도 없으며

공(空)한 것도 없으며

없는 것조차 없는데,

곳곳마다 바람과 물 없는 곳 없고

꽃 안 피우는 곳 없고

두루 푸르지 않은 곳 없으니

앞산 뒷산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며 화(化)하여 나투는데

발은 발대로 있고 손은 손대로 있더라

어찌 광대무변하다 아니 하리.

(게송을 읊으신 후 법좌에서 내려오심)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12월 15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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