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재를 시작하며

며칠 전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교유(交遊)했던 이들의 편지를 완역했다. 자료마다 간략한 내력과 특징을 수록한 원고는 오랫동안 필자의 손때가 묻은 것이다. 일단 초의선사에 관련된 자료 중에 지금까지 발굴된 편지들이 대부분 필자에 의해 수집 정리되었다는 점에서 그 감개무량함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다른 한편으론 스승 응송 스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 냈다는 안도감뿐 아니라 이를 수행하는 동안 도움을 주었던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95통의 초의 서간문 새로 발굴
당대 문인부터 스님까지 다양해
시대 상황·茶 문화 확인할 단초
조선 미시사 연구에도 도움될 것

이번에 탈고된 초의선사와 관련된 편지와 시첩들은 원래 응송 스님(應松, 1893~1990)이 수습했던 자료 중의 일부이다. 17세에 대흥사로 출가한 응송 스님은 초의선사의 방계손(傍系孫)으로, 초의의 수행력과 차에 대한 식견을 흠모하여 이에 관련된 자료를 수습, 연구하였다.

실제 그가 초의 관련 자료를 수습할 무렵, 다시 말해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초의에 관련된 자료는 그 중요성에 비해 아는 이가 드물었던 시절이다. 소수의 추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나 초의가 거론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질된 초의 관련 자료를 수습한 응송 스님의 판단은 정확했으며 시대를 앞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던 셈이다. 후일 그가 수습한 초의의 〈동다송〉, 〈다신전〉은 한국 차 문화의 자긍심을 드러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뿐 아니라 그가 소장했던 금령 박영보(錦 朴永輔,  1808~1872)의 〈남다병서(南茶幷序)〉는 초의차를 칭송한 장편의 시로, 초의와의 증교(證交)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2000년 초에 발굴된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의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는 박영보의 다시에 화답한 시로,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애호와 관심이 초의에게 의해 촉발되었음을 확인해 준 자료였다. 특히 이 두 편의 다시(茶詩)는 스승과 제자가 초의차를 감상한 후, 이에 대한 감흥을 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자료라 하겠다.

필자가 이런 자료들을 연구할 수 있는 계기는 1970년대 말 응송 스님과의 학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응송 스님의 슬하에서 공부하던 필자에게 ‘전다게’를 내린 것은 1985년경이다. 스승은 ‘전다게’를 내리면서 초의선사에 대한 연구를 함께 부촉하였다. 이로부터 필자의 초의선사에 대한 연구, 즉 문헌 연구 뿐 아니라 응송 스님이 전해 준 제다법대로 차를 만들며 우리 차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을 숙명처럼 이어갔으니 초의선사에게 관한 자료가 필자에게 모여든 인연은 이처럼 우연에서 시작되어 필연으로 이어진 셈이라 하겠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간찰, 즉 편지는 시대를 막론하고 개개인들이 나눈 오롯한 사연이 담겨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편지는 개인사 연구뿐 아니라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의 편린이며 사실을 연결하는 퍼즐 같은 것이다. 바로 역사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물론 이들이 화답했던 시들도 간과할 수 없는 역사 자료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나 시문은 초의 연구의 기초 자료일 뿐 아니라 그와 교유했던 이들이 남긴 편지와 시문은 조선후기 풍속, 사회, 정치, 종교, 문학, 차 문화뿐 아니라 인물사(人物史)를 조명할 기초 자료인 것이다. 그러므로 편지는 미시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초의선사는 해남 대흥사에서 수행했던 승려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을 갖춘 수행자로, 불교, 문학, 불화, 차 문화에 끼친 그의 영향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특히 차 문화에 미친 그의 영향은 지금도 성성하다. 가만히 그와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그의 영향력은 자신의 수행력만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때때로 만난 인연들의 도움 속에서 함께 형성된 것이었다. 이는 그의 교유 관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특별히 초의의 인연사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다. 초의의 학문 세계뿐 아니라 경향(京鄕)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만남은 다산과 맺은 학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1783~1859)과는 다산초당에서 만나  평생 교유했으며 후일 초의의 후원 세력으로 경향의 뜻있는 선비들과의 인연은 정학연에게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뜻을 나눈 벗, 정학연은 초의의 인연을 확대해 준  실질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초의의 관계망은 정학연의 자제들과 김정희와 그 형제들, 신위, 홍현주, 이만용, 신헌, 박영보, 황상, 허련, 이용현, 김각 등으로 확대되어 북학에 관심을 두었던 인물들과 교유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대흥사와 관련이 있는 승려들, 해남, 전주, 남편 등지의 아전 및 지방 관속들과 나눈 소소한 일상사가 이들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를 통해 초의가 맺은 ‘인연의 인드라망’이 거미줄 보다 촘촘히 얽혀져 있다는 사실도 이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쓴 편지에는 각각의 인연에 따라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을 토로하고 환희와 이상을 함께 공유하려는 흔적이 역역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더욱 친근함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발굴된 초의선사에게 보낸 사람들의 편지는 2014년에 번역, 출판한 〈추사와 초의〉 속에 수록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편지 70여 통이 있다. 그리고 과천 추사박물관소장본 〈산천척소(山泉尺素)〉이 있는데 이 서간첩에는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1788~1857)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8통과 김상희(金相喜, 1794~1861)의 편지 1통이 들어 있으며 이는 대략 1832~33년경에 보낸 편지들이다.

추사와 초의의 교유는 유명하다. 추사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추사체를 완성했던 예술가다. 차에 대한 그의 안목은 초의차를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차를 즐겼던 그의 다벽(茶癖)은 제주 유배시절 강화되는 경황을 보인다.

특히 1840년 제주로 유배된 그의 삶은 유배지의 척박한 환경과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불교와 차, 그리고 서예로 적거지의 고달픔을 승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초의가 보낸 차는 추사의 속내를 풀어 줄 유일한 해방구였기에 초의차(草衣茶)는 그의 걸명(乞茗)에 대상품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배경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편지들은 추사와 그 형제들과 초의의 관계를 조명할 자료가 집중되었다는 강점도 있지만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초의의 교유를 폭 넓게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한계를 지닌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행히 이번 발굴된 95통의 편지는 이런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지금까지 발굴된 초의에게 보낸 편지들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는 점도 눈에 띈다. 바로 초의와 교유했던 다양한 계층들의 편지라는 점에서 심층적인 초의 연구에 토대를 삼을 수 있다는 것 이외에도 초의가 처한 시대 상황, 그리고 교유를 통한 세세한 역사 사실을 촘촘히 엮어 갈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이라 하겠다.

연재에 앞서 이번 발굴된 편지의 인적구성을 살펴보면 승려들의 편지가 18통이다. 대부분 불갑사 도영(道影)과 안국암 우활(宇?), 도선암 성활(性闊) 등이 1840년경 초의와 표충사 원장 직과 관련한 분쟁의 여진을 담고 있어 조선 후기 승직과 관련하여 대흥사 초의와 불갑사 도영, 안국암 우활, 도선암 성활과의 대립적인 입장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 후기 승직과 관련하여 승과가 실제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묵시적으로 승직이 수행되었다는 방증 자료를 삼기에 충분하다. 이밖에도 설두나 성원, 원장, 석훈 등의 편지도 확인된다. 이들의 세세한 당시 상황이나 이들이 처한 정황도 편지에서 밝혀질 부분이다. 

초의와 교유했던 다양한 인사들 중에 아전의 수탈 편지도 눈에 띈다. 특히 괄목할 자료는 1818년 7월 23일에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보낸 편지이다. 홍현주의 형으로, 자는 성백(成伯)이며, 호는 연천(淵泉)이다. 그가 보낸 이 편지에 초의가 “향기로운 차(香)를 보내주셨으니 먼 길을 떠나온 행장이라 취사 선택하셨을 것인데 어떻게 가져와 이 사람에게 보내주실 수 있었습니까.(香之惠 長路行裝 便是取間 何能携來有此相贈耶)”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초의는 첫 상경 시기인 1815년경부터 차를 가져와 그와 교유했던 인사들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초의가 1830년경 두 번째 상경 길에 차를 가져와 그와 교유했던 인사들에게 선물했다는 기존의 설은 이 자료로 인해 수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이처럼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번 자료 발굴은 조선 후기 소치 허련(小癡 許鍊)의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소치의 1839년 12월 3일 편지에 자신의 이름을 허유(許維)라 표기했는데 소치의 본명에 대한 학설은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근역서화징〉에 “소치의 본명은 유(維)이고 후일 련(鍊)으로 고쳤다”고 기록한 이래 이 내용이 답습되었지만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 견해이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이는 모 학자가 〈소치 허련〉에서 “오히려 본명이 련(鍊)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여 오세창의 설이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1839년 12월 소치의 편지 말미에 ‘허유 배수(許維 拜手)’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오세창의 기록이 명확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밖에도 나머지 90여 편의 편지는 초의의 교유뿐 아니라 차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이 더욱 촘촘히 밝혀질 여분을 제공할 것이라 기대한다.

현대불교에 연재하는 글은 이번 발굴된 편지를 중심으로 엮어 나갈 것이다. 이미 추사의 편지는 연재된 결과물이 책으로 출판되었기에 이 연재는 새로 발굴된 초의 관련 자료 중에 중요한 내용만을 선별하여 1년 동안 연재할 예정이다.

물론 원문에 충실할 뿐 아니라 편지 속에 함의된 시대의 언어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될 수 있도록 성의를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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