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왔다.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시간을 낚시질하여 조각하는 존재는 이 지구촌에서 인간만이 하는 행위인 것 같다. 이것은 좀 더 풍요롭고 뜻 깊은 삶을 항해하고자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래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문턱에 들어서면 각종 자선 행사가 풍성하게 이루어진다. 인간의 착함을 증명하려는 듯. 이것을 위선이라고 할 수 없다. 자선 행위는 선과 위선의 동전 양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관하는 ‘사랑의 탑’의 온도가 매우 낮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온다. 구랍 30일 현재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65.2도를 나타내고 있다. 목표액의 1%가 모일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 사랑의 온도탑은 지금 한파에 얼어있다. 언론에서는 그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기부문화에 대한 불신을 거론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은 그렇다 치고 자선모금 단체에 대한 불신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128억 원의 기부금을 유용한 ‘새희망 씨앗 사건’과 희소병을 앓는 딸의 치료기부금 12억 원을 탕진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이다. 이를 어쩌랴. 가짜 구세군 자선냄비도 생겼다니.

광화문 사랑의 탑 온도 저조해
기부 불신 등이 원인으로 진단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사회인
무연사회화도 기부를 않는 이유
인간 관계망 해체로 온정 사라져

‘사회구조 자비화’가 필요한 시점
이젠 ‘이 우얏꼬’ 자비 화두 들자
저금통 기부한 천진불들에 감사를

<냉정한 이타주의자(Doing Good Better)>라는 책이 생각난다. 이 책은 감정과 열정으로 선행을 하지 말고 결과의 효율성을 고려하는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되라고 주장한다. 이 말에 이해는 가지만 보통 일반인이 그 결과의 효율성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또한 자선 행위 자체가 개인에게 주는 자존감과 행복감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기적 이타심은 자선 행위의 원천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필자는 사랑의 탑의 온도가 낮아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사회의 무연사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연사회는 혼자 살고 또 혼자 죽기도 하는 사회이다. 무연사회라는 용어는 불교신자에게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붓다의 핵심 가르침이 연기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연기론의 핵심은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연사회는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사회”이다. 모든 존재는 여러 연결망으로 얽혀서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무연사회는 그 연결망이 훼손되고 끊어지고 있는 사회다. 우리 사회는 결혼의 기피와 저출산, 1인 가구와 독거노인의 증가, 이혼 등 가족 해체 현상 등 무연사회의 특징이 가득하다.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홀로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홀로 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에 불편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축소시키는 홀로족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홀로족이 된 사람도 본질적으로 사회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혼자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은 일종의 피난 생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는 ‘함께 사는 것’에서 나온다. 인류 정신사의 중요 덕목들, 즉 자비, 사랑, 중용, 인, 의, 예 등은 다 함께 살기 위한 지혜들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무연사회 속에서 불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불교는 자비라는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자비의 실천은 많은 지혜를 요구한다. 그래서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지신다.

무연사회를 넘어 따뜻한 공동체를 어떻게 구현하느냐? 이제 자비 실천 과제는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개인윤리적 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의 자비화라는 사회윤리적 차원으로의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한국불교는 ‘이 뭣꼬?’의 화두보다도 ‘이 우얏꼬?’의 자비화두가 절실하다. 사족 하나, 저금통을 깨 사랑의 탑에 기부하는 어린이가 많다하니 천진불이 아직 살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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