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비선이란 무엇인가?-① 명상을 왜 해야 하는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명상이 주는 신체적·심리적 효과는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특히 명상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며 명상수행을 시작하는 이들 또한 과거에 비해 대폭 늘었다. 하지만 단기적인 효과나 신비체험 등을 목적으로 명상을 하는 이들이 많아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명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자비선 명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지도하는 보리마을 자비선명상원 선원장 지운 스님이 길잡이를 맡았다. 〈편집자주〉

보리마을 자비선명상원의 자비선 명상 과정.

영생 꿈꾸는 인간의 욕심
누군가가 나에게 왜 명상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명상하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이유가 다 다르겠지만 나는 단연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의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번뇌는 붓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일어나며 이 번뇌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그 괴로움은 다시 번뇌와 무지를 일으키고, 이렇게 번뇌와 괴로움과 무지는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며 우리의 삶을 고로 이끌고 있다. 그 괴로운 삶 중 가장 큰 괴로움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망이 있다. 생로병사의 삶속에서도 죽지 않는 영혼 또는 불멸의 자아가 있다고 믿으며 산다. 그래서 창조주를 매개로 하는 종교에서는 사후에 천국에 태어나는 영생을 꿈꾸고 불교에서도 28개의 천국을 이야기하며 또한 아미타의 정토에 나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이렇게 종교를 통하여 영생을 구한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과학을 통해서도 영생을 꿈꾼다. 구글은 AI의 힘을 빌려 인간유전자 데이터와 가계도를 분석한 뒤 난치병을 치료해 인간수명을 500세까지 연장하겠다는 ‘AI 칼리코 프로젝트’를 2013년부터 진행 중이라 한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며, 우리 생활 전체를 관리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나아가 영원불멸을 꿈꾸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처럼 생명 연장과 노화에 도전하는 인간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재단이 있다. 1982년 설립된 미국 애리조나주 스콧데일 공항 근처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에는 현재 미국은 물론 일본·중국 등지에서 온 냉동인간 150여 명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미래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재단은 의학적으로 이미 숨진 이들을 ‘냉동 시신’이 아닌 환자(patients)로 부른다. 알코어 생명재단의 냉동인간은 죽음마저 넘어서려는 21세기 인류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과학발달에 따른 영생 도전
무시간 갇혀 가치도 사라져
불교 역시 영생 부정 않지만
본성만 알면 영생 해결된다

지금까지 생명체에 대한 물리학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에서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보면 에너지가 무질서의 방향을 보이기 때문에 생명체 내부의 활동도 무질서하게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곧 노화이고 죽음이라는 것이다. 찻잔이 깨지면 원상복구 되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은 뇌와 기계를 결합한 영생을 꿈꾼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란 SF 애니메이션을 다시 개봉했는데, 2029년을 배경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뇌를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형이상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과연 미래에는 이 영화처럼 인간의 뇌를 다운로드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최근 영국 가디언의 자매지인 옵저버에 재미있는 기사가 소개되었는데 2050년이면 인간의 기억을 슈퍼컴퓨터로 다운 받아 저장할 수 있으며, 2075∼2080년까지는 이 기술이 널리 보급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사실 이렇게 된다면 육체의 죽음은 사실상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육체를 선택하고 난 뒤 기억을 옮겨 가면서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삶이 가능한 것인지 반문해 본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기억들을 슈퍼컴퓨터로 다운 받아 저장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장된 그 기억들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사는 것이지 현재 이 순간의 활발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기억은 대상에 반응하여 매 순간 생성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을 저장하고 보존하고 출현시키는 마음을 알고리즘화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마음은 모양도 색깔도 없으며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음은 신비하며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마음의 본성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정형화할 수 없다. 그래서 외부 대상을 인지하듯이 마음을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왜 늙고 죽는가에 대한 문제는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뇌과학과 인공지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노화와 죽음은 자연스러운 질서이다. 만약 인간이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생한다면 무시간의 세계에 갇혀버리므로 인과와 생멸의 변화로 일어나는 아름다움과 다양한 가치들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아마 삶의 재미도 없어져서 혹 삶이 지루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시간으로 영생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타고 생로병사의 인간다움과 생멸의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영생은 과연 없는 것인가?

마음은 본래 죽음이 없다
불교는 불멸의 영혼 또는 불멸의 자아를 부정한다. 그렇다고 불교가 영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영생과 비슷한 개념으로 열반이 있다. 열반은 불사(不死)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처의 가르침인 열반은 원각·보리·법계·불성·심지·지신(智身)·법신(法身)·심광명·청정심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사의 가르침에 나오는 무저발·몰현금·무진등·무근수·취모검·심인·심경 등도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불교에서는 아미타 정토와 같이 영생의 장소를 얘기하기도 하지만 〈유마경〉에 보면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는 유심정토를 설하고 있어 굳이 영생의 정토가 따로 필요 없다고도 본다. 또한 〈화엄경〉 범행품에서도 ‘모든 것이 마음자체 성품인줄 알면 지혜의 몸을 이루니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라며 삼라만상우주 그대로가 마음이라 본다. 이는 곧 마음의 본성이 바로 영생이며 열반이며 정토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의 본성을 알기만 하면 영생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본다. 마음이란 본래 죽음이 없는 자유롭고 활발한 존재이므로 굳이 다른 것에서 영생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음의 본성을 알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의 본성을 알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이며, 그 방법들 중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도 가능한 방법이 있는 것인가? 물론이라고 답하며 앞으로 소개될 글에서 이러한 방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음광명은 본각(本覺)인 어머니와 같다. 마치 하늘에서 생긴 구름이 하늘에서 사라지듯이, 물거품이 물에서 생겼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듯이, 〈대승기신론〉에서는 자녀인 시각(始覺)이 어머니인 본각에서 나와서 무명 불각(不覺)을 소멸하고 다시 어머니인 본각으로 되돌아가서 하나가 되는 것을 구경각이라고 한다. 〈원각경〉에서는 청명한 마음빛[원각]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가 다시 마음빛으로 되돌아감을 설한다.

모든 것이 원각에서 나와서 원각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멸의 모습이다. 잠들 때도 생각들이 희미해지면서 주객이 하나가 되는 순간 잠속으로 사라지고, 새벽에 의식이 돌아올 때도 주객이 딱하고 떨어지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잠뿐만 아니라 재채기를 하고 재채기 끝낼 때도, 기절했다가 일어날 때도, 마음자체를 중심점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원각을 중심으로 소멸과 재생의 반복은 마치 허공에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다. 허공에 꽃이 수없이 피고 지더라도 허공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병 든 눈으로 허공을 볼 때 허공 가운데에서 꽃이 피는 것일 뿐 눈병이 치유되면 그 꽃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허공의 꽃은 본래 생겨날 곳이 없고 또한 사라질 곳도 없다. 이와 같이 원각은 바뀌지 않아 청량불변(淸凉不變)이다. 오염되지 않아 청정하며 가림이 없어 두루 비춘다. 무지가 없어 밝은 빛인 심광명(心光明)이다. 모든 존재와 모든 것의 재생과 소멸은 원각이라는 마음자체의 현상이다. 오직 마음뿐 다른 경계가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생사(生死)가 없어 열반이다. 그래서 생사 윤회하는 것도 바로 꿈속의 경계와 같고 또한 허공의 꽃과 같다. 있음과 없음을 근거로 견해를 펴는 것은 단지 허망한 견해가 생겨나고 멸하는 것을 볼 뿐 그 근본 마음인 원각에는 없다.

청정한 심광명인 원각에 머물 수 있다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는 분별심과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면 업은 멈추게 되고 업에 의한 생사의 괴로움은 없다. 이러한 청정한 근본마음인 원각에 머무는 방법이 바로 집중명상인 ‘사마타’와 분석명상인 ‘위빠사나’이다. 청정한 심광명에 머물러 마음의 본성이 본래 죽지 않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이 없는 근본 마음인 원각에 머물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이 명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노화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 평소 명상을 하여 의식이 깨어있게 되면 몸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호흡이 멈추었을 때도 의식이 깨어있게 되면 깨어있는 의식은 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죽음의 공포도 사라지고 없으며 그래서 수행자는 죽는 순간에도 그 과정에서도 수행을 하는 것이다.

명상은 바로 우리 괴로움의 근원을 없애는 방법이며 우리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며 굳이 영생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명상해야하는 이유를 알았으면 명상의 과정과 그 결과도 알아야 한다. 바른 명상방법과 과정, 결과들을 전제로 이제부터 명상의 길로 가고자 한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지도’ 명상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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