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신라의 걸작 토함산 석굴암

인도에서 출발한 석굴사원. 계속 동쪽으로 진행하다보니 중국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다. 대륙의 끝,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대륙의 끝에서 장쾌한 대미(大尾)의 결정판을 이루었다. 석굴사원의 길은 신라로 이어졌고, 그 종점은 바로 토함산 석굴암이다. 8세기 통일신라의 위대한 걸작이다.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난공사는 시작되었지만, 김대성이 죽자 국가가 완공했다는 신라의 자존심이었다. 신라 문화의 절정에서 이룩한 쾌거이다. 성덕대왕신종 같은 걸작이 나온 시대와 함께한다.

신라 문화 절정서 이룬 쾌거
中 석굴과 다른 인공적 축조
전후 없을 불교 예술 결정체
겹쳐진 오른 2,3번째 손가락
세계 유일의 상징성이 표현돼

토함산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 크게 다른 특징 하나가 있다. 인도와 중국의 석굴은 천연 암벽을 파고들어가 만든 석굴이었다. 모래 성분이 많은 돌이어서 그만큼 파기 좋았다. 하지만 단단한 화강암의 나라 신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토함산 석굴암은 인공석굴이다. 즉 목조건축물을 세우듯 돌을 일일이 깎아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린 것이다.

전방후원(前方後圓) 형식으로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것도 12자(尺)라는 기본 척도를 원칙으로 하여 비례의 극치를 보였다. 무슨 말인가. 토함산 석굴암은 치밀한 계획에 의한 인공의 축조 석굴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그 자리일까. 어차피 바위산을 파고들어 간 석굴이 아니라면, 토함산 높은 자락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를 진행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석굴암 본존상의 시선과 마주하는 곳은 동해의 입인 감포이다. 바로 신라 통일의 영주인 문무대왕의 해중릉이 있는 곳이다.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바다 속의 왕릉이다. 대왕암 곁에 감은사가 있고, 오늘날 폐허의 절터에 신라 쌍탑이 눈길을 이끌고 있다. 토함산 서쪽에는 불국사가 있고, 그 곁에 문무왕의 화장터인 낭산(狼山)이 있고, 그리고 서라벌 시내로 이어진다.

토함산은 신라인의 성지였다. 특히 석굴암 자리는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불린 샘물이 있었다. 바로 석탈해 사당의 자리이다. 석굴암은 요내정 위에 건축되었다. 신라 성지의 조형적 실현이다. 그래서 바위산도 아닌 바로 그 자리에 석굴암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신라 석굴암은 상징성의 집적이었다. 돔 형식의 천정조차 돌의 부재는 모두 108개로 이루어졌다. 108번뇌의 상징이다.

이 대목에서 커다란 의문의 하나는 석굴암의 조형적 족보이다. ‘돌출’, 그렇다, 전무후무한 독존이다. 한마디로 석굴암 이전에 석굴암 없었고, 석굴암 이후에 석굴암 없었다. 미술사는 인생과 같아 생로병사라는 과정을 보이면서 진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성장기, 절정기, 노쇠기 같은 과정을 보인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 세계에도 어디 없을 인공 석굴 사원이다. 이는 실크로드의 종점에서 집대성된 문화예술의 결정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석굴암은 전후의 과정을 생략하고 절정기의 화려한 모습, 그 하나만 보여주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나는 해답의 하나로 실크로드의 산물로 믿고 있다. 동서문화 교류의 현장인 실크로드. 그 실크로드의 종점에서 집대성한 문화예술의 결정판, 그것이 석굴암이다. 간다라 문화 이후 수당(隋唐)문화의 결정체가 삼국시대를 거친 통일신라 문화와 결합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요즘 표현처럼 국제 컨소시엄의 결정판이다.

석굴암 본존상은 항마촉지인의 좌상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과연 모델이 있었을까. 있다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인도, 그것도 붓다가야이다. 석존께서 깨달았던 현장, 바로 그곳이다. 깨달음의 현장 붓다가야. 그곳에 정각(正覺)의 불상 한 분이 앉아 있다. 신라를 비롯한 중국의 그 많은 구법승들이 찾았던 현장이다.

구법(求法) 인도여행을 간 중국의 구도승은 많았다. 그 가운데 〈불국기(佛國記)〉의 법현 스님은 5세기 초에 인도여행을 했다. 하지만 〈대당서역기〉의 현장법사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의정(義淨) 등은 7세기 중엽에 인도 체험을 했다. 특히 의정의 책에는 56명의 인도 구법여행자를 기록하고 있다. 활발한 실크로드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인도 왕래는 자연스럽게 불교미술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역경(譯經)의 대가 현장법사는 인도에서 귀국할 때 불경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불상도 모시고 왔다. 그것도 인도 각 지역의 불상이어서 흥미롭다. 의정은 ‘금강좌(金剛座) 진용상(眞容像)’을 가지고 왔는데, 이를 마하보리사 정각상(正覺像)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약 이 같은 추정이 맞는다면, 토함산 석굴암 본존상이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게 한다. 당나라 시절 즉 7세기 중반, 그러니까 토함산 석굴암 공사를 착수하기 이전, 이미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도상이 극동아시아 지역에 퍼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당나라 황실의 칙사(勅使) 왕현책(王玄策)은 여러 차례 인도여행을 했다. 왕현책 일행 속에 화가 송법지(宋法智)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마하보리사의 불상을 묘사했다. 왕현책 일행의 정각상 그림은 당나라의 장안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 때 왕현책은 인도 불상 등 ‘불교미술’을 기록한 책을 짓기도 했다. 인도미술의 본격적 소개의 계기라 할 수 있다. 하기야 용문석굴 빈양동에 왕현책 발원의 기록도 남아 있다.

붓다가야를 모사해 온 당나라는 그것을 석굴사원에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전(東傳)한 석굴사원의 역사, 그 장쾌한 결정체가 토함산까지 이르렀을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토함산 석굴암은 국제적 최고의 기술과 정신을 담보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라의 개방적이고도 적극적인 국제 감각에 바탕을 둔 결과이다.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상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기술되어 있듯, 붓다가야 정각상과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크기의 불상이다. 바로 정각의 순간을 형상화한 깨달음의 실체이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경악한다. 명품은 음미할수록 맛을 낸다. 세계 최고수준의 조각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석굴암은 종교적, 사상적, 과학적, 예술적으로도 최고수준이다. 그래서 나는 석굴암 예찬으로 이런 표현을 한 바 있다. “만약 한반도가 침몰된다면, 그래서 단 한가지의 아이템만 건지게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토함산 석굴암을 건지겠다.” 석굴암에 보내는 예찬이다.

하지만 석굴암과 첫 대면할 때, 나는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석굴암 기행이라는 단원이 있었다. 교과서에서 이르기를, 석굴암 본존상은 따스하고 맥박이 뛴다고 했다. 중학교의 가을 수학여행은 경주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석굴암 안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관광객들은 석굴암 내부를 출입할 수 있었다. 나는 본존상을 살짝 만져보았다. 하지만 교과서의 표현과 달리 불상은 차가웠다. 웬 맥박? 친구들은 떠들면서 장난을 쳤지만 나는 좌절을 안았다.

성장하여 나는 석굴암 앞에 정좌했다. 석굴암은 무엇 때문에 걸작이라고 부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해결해 줄 문헌자료는 없었다. 신라시대의 역사 책 한 권 반반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일제 식민지 시절과 1960년대의 ‘복원공사’는 석굴암 이해에 혼란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석굴암 논쟁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원형논쟁이 그것이다.

논쟁 가운데 하나는 본존상의 이름이다. 석가상이냐 아미타상이냐, 등등. 혼란 속에서 석굴암 연구는 이어졌고, ‘드디어’ 석굴암 본존상과 붓다가야의 정각상은 같은 모습이라는 논고도 나왔다. 그렇다면 석굴암 본존상은 정각상일 수 있다. 깨닫는 순간의 모습. 그 거룩한 순간의 조형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순간은 이런 모습일까. 모든 종교미술은 종교 도상학에 의거하여 조형화된다. 그래서 불경의 가르침대로 불상을 조성해야 한다. 바로 32상 80종호이다. 불상의 모습을 문장으로 규범화했다. 작가 마음대로 불상을 만들 수 없다. 불상의 명호(名號)를 알려주는 장치 가운데 하나로 수인(手印)이 있다. 손의 자세에 따른 구별법이다. 석굴암 본존상은 항마촉지인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세계 어느 곳의 불상을 보아도 있지 않은 특징 하나가 있다. 이 대목에서 역시 나의 체험을 반추하게 한다. 어느 날 나는 본존상 앞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정신이 혼미해졌는가 보다. 석굴암은 무엇일까, 고심하고 있는 청년을 위해 부처님은 ‘드디어’ 따듯한 손길을 내려 주었다. 부처님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 겹쳐진 손가락!

석굴암 본존상은 오른 손을 아래로 향하면서 두 번째 손가락을 세 번째 손가락 위로 포개놓았다. 바로 겹쳐진 손가락이다. 깨달음의 법열(法悅)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깨닫는 순간의 에너지가 손가락 끝으로 모아졌는가 보다. 세계 유일(?)의 상징성이다. 신라의 조각가는, 아니 신라인은 이렇듯 창의성 있게 석굴암을 만들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자신감에 넘치는 문화예술은 ‘겹쳐진 손가락’을 만들 수 있었다. 실크로드의 종점이자 출발점인 신라. 토함산 석굴암의 가치는 세계적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장편시집 〈토함산 석굴암〉으로 압축한 바 있다. 오늘날 석굴암의 존재가 너무 묻혀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아, 토함산 석굴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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