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며

아침 뉴스에서 ‘국정농단의 시작과 끝으로’ 지목되는 최순실 씨의 구형 25년과 벌금 1185억 원이 발표되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그녀의 ‘억’ 소리에 나는 ‘일조진(一朝塵)’이 떠올랐다. 욕심껏 모은 돈이 기껏 하루아침의 티끌이라니. 자고로 분(分)이 아닌 복과 까닭 없는 돈은 횡재가 아니라 재앙이라고 했던가. 수갑을 찬, 한때 실세였던 사람들을 보니 <채근담>의 일구가 떠올랐다.

“도덕을 지키는 이는 일시 적막이나, 권세에 아첨하는 자는 처량 만고라.” 선인들의 말씀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달인은 ‘물외지물(物外之物)’을 보고 ‘신후지신(身後之身)’을 생각 하나니 살아 있는 몸보다도 죽은 뒤의 이름을 걱정해야한다고 하셨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萬古)의 처량을 취하지 말라는 뜻이다.

고지식했던 아버지의 딸이었던 난
호사 같은 것을 누릴 수가 없었다
수학여행 대신 갔던 덕수궁 산책서
맑은 가난 속 자유가 왠지 뿌듯해

수필가가 돼 첫 수필집 발간 당시
법정 스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에는
“가난이 우리를 이만큼 키웠다”

배고픔 모르면 남의 배고픔 모르듯
남의 아픔 같이 느끼는 것이 자비
헛것 아닌 성스러운 샘물을 키우자

나는 변통없고 고지식한 아버지의 딸이라서 호사 같은 것에는 일찍이 물들지 않았다. 첫 번 째는 기차에서 의문사한 야당 출신의 대통령 후보와 가깝다는 밀고로 옷을 벗어야 했고. 두 번째는 공금을 강요한 상사의 구속으로 면직되었다. 저축도 없이 실직당한 가장에게는 가솔이 딸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들고 시외 어느 파출소로 찾아가 그걸 건넸고, 답장을 받아왔다. 내 등록금이 들어 있었다. 그 후론 아버지께 나는 어떤 요구의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친구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남은 아이들은 모여서 덕수궁 산책을 하게 했다. 이른 아침, 고궁의 뒤뜰에서 만난 고요한 마음의 평정, 맑은 가난 속에 포함된 자유가 어린 마음을 뭔가 모르게 뿌듯하게 했다.

1969년부터 ‘신행불교’의 편집일을 맡아 10년간 봉직하는 동안 언론매체에서 청탁이 왔었고 발표된 글에는 ‘수필가’라는 호칭이 뒤따랐다. 이름의 도(盜)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나는 수필가가 되었고 1996년 첫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을 출간 하였을 때 법정 스님께서 보내주신 엽서에는 낯익은 만년필의 굵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가난이 우리를 이만큼 키웠습니다.”

스님은 ‘내 가난’을 편드느라고 ‘우리를’이라고 덧붙이는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내가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봄, 조계사 근처 어느 지하 다방이었는데 그때 합석한 홍정식 선생님은 스님께 내 취직을 부탁했고 덕분에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신문’에 잠시 취직해 다닌 적이 있다.

미당 선생은 자신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으나 돌이켜보면 나를 키운 것은 법정 스님 말씀대로 가난이 맞는 것 같다. 분(分) 외의 것을 바라면 죄를 짓게 되거니와 또한 남을 원망하게 된다. 조금 덜 갖고 덜 쓰는 편이 내겐 훨씬 쉬웠다. 나는 한 끼 밥이 어려웠던 작가들이나 고흐를 생각할 때가 많다.

따뜻한 불빛 아래 식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으면 평범한 일상사가 왜 이렇게도 어려웠을까, 그리고 한편 이 작은 평화에 무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 전도가 양양하던 젊은 가장의 실직은 가족을 불우한 그늘로 이끌었다. 사실상 가난의 대물림에서 용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불우함을 넘어서려면 불우함을 싫어하지 않아야 하고 가난을 넘어서려면 가난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주(周)나라 문왕은 유리옥에서 저 유명한 <주역>의 괘사를 썼고, 다산은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썼다. 사마천도 불우함 속에서 <사기>를 썼다. 나는 험난한 때를 어떻게 보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근심’과 ‘곤란’에 ‘가난’ 하나를 더 보탠다. 배고픔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남의 배고픔을 알지 못한다. 남의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자비가 아닌가.

하루아침의 티끌 같은 ‘헛것’에 매달리지 말고, 맑은 가난 속에서 성스러운 샘물을 키워나가자. “가난이 우리를 이 만큼 키웠습니다.” 내 가슴속 깊은 샘물에 떠 있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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