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현 송찬우 거사

동현 송찬우 거사의 생전 모습. 승속을 초월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금생에 부처님 가르침을 의지해서 흩어진 마음 없이 간절하게 한 구절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임종할 때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여 아미타부처님을 직접 뵙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게 된다.” - 〈지관수행〉(송찬우 역해)

아미타불 접인 받으며 좌탈입적

“저 위하여 아미타불… 저 위하여 아미타불… (아미타부처님께서 오셨군요)”
2015년 1월 27일 새벽,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좌탈입적(坐脫入寂)한 동현(東玄) 송찬우(宋燦禹, 1951~2015) 거사의 최후법문이다.

유식 바탕 독자적 경전 해석
선·교 함께 닦는 수행결과물
〈지관수행〉서 염불의 가치 밝혀

동현 거사는 직장암 투병 중 기력이 소진한 상태에서도 지성으로 ‘아미타불’을 염하였다. 왕생하기 직전, 몸을 일으켜 달라고 손짓을 하여 앉혀드리자 천장 한곳을 응시하면서 “저 위하여 아미타불…”을 혼신의 힘을 다해 끓어질 듯 끓어질 듯 이어가며 반복했다. 호흡이 멈춘 이후 거사는 앉은 상태에서 순간 저절로 눈꺼풀이 사르르 감기며 편안한 모습으로 입적했다고 한다.

정토법문 강의 발원하고 왕생

이는 임종 직전에 윤회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인 정토(淨土)를 감득(感得)하고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ㆍ대세지보살 등 여러 성중(聖衆)의 인도를 눈앞에서 마주한 광경(阿彌陀佛 與諸聖衆 現在其前)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동현 거사는 투병 중에도 세친(바수반두)보살의 〈왕생정토론〉을 마지막으로 강의했는데, 남은 생애는 정토법문을 강의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세친보살이 염불삼매에 들었을 때 극락세계를 친견하고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왕생정토론〉은 극락정토에 화생(化生)하기 위한 염불수행법과 왕생의 공덕을 논리적으로 밝힌 정토문 최초의 논서이다.동현 거사가 이 논서를 강의하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은 투병 중임에도 얼마나 치열하게 염불에 매진하며 왕생극락을 발원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언이기도 하다.

생사자재의 수행력 보인 재가 선지식

평생 선(禪)과 유식(唯識)을 비롯한 가장 난해한 경전과 어록들을 번역하고 강의하면서 청빈과 탈속의 무애자재한 삶을 살다가, 말년에 염불수행에 매진한 거사는 오탁악세에서 보기 드물게 아미타부처님의 접인(接引)을 받는 놀라운 회향을 보이니, 후학들에게 큰 감명과 함께 재발심의 기회를 선사했다. 수행풍토가 해이해진 오늘의 현실에서 그가 보여준 생사자재(生死自在)의 걸출한 수행력은 사부대중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특히, 염불왕생의 성취는 많은 정토행자들에게 자신감을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불교계에 모처럼 신심을 불러일으킨 서상(瑞祥)을 보여주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의 구도역정(求道歷程)이 어찌 우연히 이뤄진 것이겠는가. 치열했던 일생을 살펴보면 동시대를 산 한 거인의 족적(足跡)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성수ㆍ탄허 스님께 선(禪)과 교(敎) 배워

195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동현 거사는 16세에 불문에 입문할 때 이미 4서와 〈시경〉을 보았을 정도로 한학 실력이 출중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 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을 수료하고 고려대 한문학과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강의하며 원전 독해와 강의 실력을 철저히 연마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과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면서 부터는 본격적인 역경 불사와 경전 강의의 외길을 걸었다.
조계종 원로의원을 지낸 성수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20세에 당대 최고의 대강백이자 선사인 탄허 스님 문하로 들어가 〈서경〉〈주역〉〈좌전〉〈노자〉〈장자〉 등 최고의 동양고전을 섭렵한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13년 동안이나 유불선에 달통한 탄허 스님 곁에서 선(禪)과 교(敎)를 함께 닦았으니, 장년의 나이에 이미 법사의 반열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승조ㆍ감산대사 논서 읽고 심안 열려

1982년, 32세에 그는 16년간 머물렀던 절 생활을 청산하고 승복을 속복으로 갈아 입었다. 불교에 절망했다기 보다는 특정한 형식에 구애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옷만 바꿔 입은 스님”이라는 평을 들으며 장자(莊子)와 같은 자유인으로 살았던 그는 간경(看經)수행과정에서 세 차례, 문자반야를 통해 마음의 이치를 터득하는 계기를 얻는다. 30대 중반에는 승조(僧肇) 법사의 〈조론(肇論)〉과 감산(?山) 대사의 여러 저서를 통해, 40대 초반에는 〈기신론〉과 〈유식론〉을 통해 공부의 큰 전기를 마련한다. 마치 감산 대사가 〈조론〉의 ‘물불천론(物不遷論)’과 〈금강경〉을 간행하여 강의하다가 심안이 열려 활연대오한 것처럼, 그 역시 경전을 보다가 공부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경전 번역의 의지를 심화시켜 준 인연은 승조 법사의 〈조론〉에 있었고, 거기에 주석을 단 감산 대사와의 만남은 단연코 그의 안목을 깊고 넓게 해준 큰 계기가 되었다.

‘선림고경총서’등 40여 경전 역경

탁월한 한문 실력에 불법에 대한 깊어진 안목을 바탕으로 그는 감산 대사가 해설한 〈조론〉을 비롯해 〈대승기신론〉〈금강경〉〈장자〉〈노자〉의 주해서와 지욱 대사의 〈금강경 파공론〉〈종경록 촬요〉 등을 잇달아 번역해 불교 내외의 지식인층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감산 대사의 주해서들은 그간의 여러 주석서의 잘못을 시정하고 정법을 되살리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담긴 결과물이었다. 〈뜻으로 읽는 금강경〉〈법상유식학으로 풀이한 반야심경〉 등의 저서를 통해서는 유식(唯識)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안목으로 경전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가 문사철(文史哲)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선지(禪旨)를 갖춰야만 강의할 수 있는 〈벽암록〉을 비롯해 〈종경록〉〈능가경〉〈육조단경〉〈달마대사 혈맥론〉〈이입사행론〉〈전심법요〉 등을 원문으로 강의한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울러 〈전심법요〉〈백장록〉〈동산양개화상 어록〉 등 23권의 선어록을 완역, 성철 스님의 ‘선림고경총서’ 가운데 3분의 2 정도를 번역한 것은 선리(禪理)에 달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선교(禪敎)를 함께 닦은 수행의 결과물인 것이다.

역경사 양성 꿈 못 이뤄

그는 경전 강의를 할 때는 한자 원문과 토를 하나하나 새겨가면서 숨겨진 심오한 뜻을 드러내어 매순간 공부인들이 자기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경안(經眼)을 갖춘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고 싶었던 그는 입적하기 전까지 동현학림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강사급 정도의 역경사(譯經師)들을 양성하고 싶었던 그의 바램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간경수행을 겸한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하던 동현 거사가 생의 마지막에 염불수행에 전력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일까? 천태 대사와 의상 대사가 〈법화경〉과 〈화엄경〉을 각각 공부하면서도 수행법은 아미타 염불을 택하고, 영명연수ㆍ철오 선사 등은 선사이면서도 염불로 왕생했듯이 그 역시 암 선고를 받고 마지막 수행법으로 염불을 택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실제로, 그의 유작인 〈지관수행〉에는 대승의 사마타(止)ㆍ위빠사나(觀) 수행법을 ‘아미타불’ 염불을 예로 들며 설명한 부분이 적지 않다. 염불수행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다음 글에 그의 수행법이 엿보인다.

지관(止觀)으로 염불수행을 하다

“지금 말법시대에 법을 펴고 중생을 이롭게 하려면 늙을 때까지 염불을 진실하게 하여 한 구절 아미타 명호를 부를 경우, 그 자리에서 아상, 인생, 중생상, 수자상 등 사상(四相)이 없어져 안으로는 신심을, 밖으로는 세계에 대한 집착을 잊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止)’공부이다. 또 소리소리 부처님 명호를 부를 때마다 부처님 상호가 더욱 분명해지는데 이것은 ‘관(觀)’수행이다. 염불을 부르는 자와 부르는 대상인 부처님, 이 둘을 쌍으로 잃는 경지에 이르러 자타가 둘이 아닐 땐 이 경지에서 마음을 되돌려 허깨비와 같은 염불공부로 허깨비와 같은 중생을 교화하게 된다. 집착이든 병이든 논할 것 없이 단지 ‘아미타’라는 약으로서 중생을 다스려 중생들이 각자 허깨비와 같은 그림자 모습을 소멸하고 임종 시에 허깨비와 같은 극락에 왕생하게 해야 한다. 이와 같다면 이익이 절묘한데, 그 경지를 어떻게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경학과 심법 통달하고 염불법 선택

〈지관수행〉에서 동현 거사는 “지관으로 염불수행을 하는 것이 바로 여래행을 행하는 것이고 여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미타불 한 구절의 명호를 가지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극히 염불한다면 삼계 내 범부의 견혹(見惑: 사상적 미혹)과 사혹(思惑: 감정적 번뇌)에 요동하지 않고, 출세간 소승의 진사무명(塵沙無明)에도 요동하지 않는다”면서 “위없는 반열반(般涅槃: 완전한 깨달음)은 최후까지 항상 고요한 삼매이며, 이것이 바로 한 구절 아미타불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염불수행은 경학과 심법을 완전히 통달한 데서 나온 순선(純善)의 결정체임을 알 수 있다.

종교의 위기, 불교의 위기가 회자되는 이 시대에 그는 오로지 불조의 혜명(慧命)을 잇는 경전 번역과 강의로 일생을 헌신하고 거룩한 회향까지 나타냈으니, 절망적인 한국불교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한 선지식임에 분명하다. 우리 후학들은 그의 치열한 구도정신을 본받아 어떻게 자기 혁신과 불교 중흥을 이룰 것인지, 진심 어린 반성과 각오를 다져야 하지 않을까.

염불은 가장 쉽고 확실한 생사해탈의 길

그동안 ‘염불각자열전’이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하근기들이나 하는 열등한 수행법으로 치부되던 ‘아미타불’ 염불이 부처님과 역대 조사스님들이 심오한 법문으로 찬탄한 최상승 수행법임을 강조하여 공감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안도하며, 보다 많은 불자들이 가장 쉽고 확실하게 윤회를 벗어나는 수행법인 염불에 착수하시기를 발원하며 연재를 마친다. 나무아미타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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