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일본에 일휴 선사가 있었다. 임제종의 고승(高僧)으로 무애행(無碍行)의 일화를 많이 남긴 스님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일휴 선사는 어린 스님과 함께 저잣거리를 걷고 있었다. 생선 굽는 냄새와 술 냄새가 그들의 코에 스며들었다. 일휴 선사는 입맛까지 다시며 중얼거렸다. “햐, 생선 굽는 냄새하며 술 거르는 냄새가 마냥 좋구나.”

어린 스님은 실망스런 눈빛을 숨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됐다, 저런 위인이 어찌 불법(佛法)인들 알고 있겠는가. 속물이나 다름없는데….”

한참을 걸어 절 입구에 다다르자 어린 스님은 기어이 입을 연다. “큰 스님께서는 일체를 초월해 진리와 한 몸을 이루신줄 알았는데 저자거리의 생선 굽는 냄새, 술 거르는 냄새에도 집착하시다니 실망이 큽니다.”

그러자 일휴 선사는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너는 그 냄새를 무겁게 여기까지 들고 왔느냐? 나는 이미 저자거리에서 버리고 왔는데.”

이것이 도인의 삶이자 선지식의 정신세계인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생각에 머물지 않는, 머묾 없는 머묾이 평화와 행복, 자유 누리는 깨달은 자의 삶인 것이다.

혼자 있어도 부족하지 않고 열이 있어도 넘치지 않는 것이다. 비어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있기 때문이다.

명예나 재색(財色)으로 윤회하지 않고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오면 오는 것이요 가면 가는 것일 뿐 있고 없음에 꾸미거나 드러내거나 감추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 누구도 나일 수 없다
이곳이 정토요 모든 이가 부처


비우고 버리며 나누기를 생활화할 뿐 변두리와 모서리를 키우지 않는다. 발길 닿는 곳이 정토(淨土)요 만나는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흔들리고 헐떡이나 머묾이 없어 자취가 없다. 목마르면 물마시고 졸리우면 잠을 자는 평범한 보통사람으로 열린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용수)는 그의 저서인 〈중론〉의 귀경계(歸敬偈)에서 그 유명한 팔불계(八不偈)를 남기고 있다. 해탈자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不生亦不滅)/ 항상 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不常亦不斷)/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亦不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亦不去)’

그러나 여기에서 천지개벽하듯 한 바퀴 돌아오면 꽃은 꽃이고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인 것이다. 오면 반갑고 가면 서운하며 여름에는 삼베옷이 좋고 겨울에는 솜바지가 좋은 것이다.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감사할 줄 아는 일상(日常)의 평범한 보통사람이 참사람이기 때문이다. 참사람은 부끄러운 짓을 키우지 않는다. 모으고 쌓으며 명예부근에서 얼씬거리거나 방편을 앞세워 남을 속이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말과 행동이 순수하고 진솔하다.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꾸미고 드러내며 쌓아두려는 소유욕이 평화와 행복, 자유를 짓누르는 병이 됨을 잊지 말일이다. 사람이 앓는 모든 병은 집착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존재이다. 수많은 동행자와 반려자를 만나고 헤어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타는 목마름의 뼈를 녹이는 아픔을 그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일뿐, 그 누구도 나일 수 없고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뿐이 아닌 그 어떤 물질도, 명예도, 사랑도 잠시 스치는 소유일 뿐 흔들리며 흩어지며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들은 종교의 신앙을 빛을 삼아 영원한 생명, 평화, 행복, 자유를 찾아 길 떠남의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봄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 뜰에 핀 매화가지에서 봄을 찾듯 평화와, 행복, 자유는 열린 마음에서 자라는 또 하나의 생명인 것이다. 진리는 숨어있는 게 아니라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곳이 정토(淨土)요 만나는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인공으로 평화와 행복, 자유누리며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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