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사사비(玄沙師備:835~908) 선사는 당말오대(唐末五代) 스님으로 어부로 생활하다 나이 30이 되어 출가를 하였다. 속성이 사(謝)씨로 사삼랑(謝三郞)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씨의 셋째 아들이란 뜻이다. 동정호 호숫가에 사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주로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였다 한다. 복주(福州) 민현(?縣) 출신으로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문하로 들어가 수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타행(頭陀行)을 닦으며 종일 좌선을 하고 지냈다. 능엄경(楞嚴經)을 보다 심지를 밝혔다 하고 후에 설봉의존(雪峰義存)을 만나 그의 법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사산에 들어가 30여 년을 교화활동을 하여 800여 명에 달하는 수많은 학인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 지도를 받았으며 복주의 최고 관리 왕심지(王審知)가 선사를 스승으로 모셔 성심껏 섬겼는데 자의(紫衣)와 함께 종일대사(宗一大師)라는 호를 올려 존경을 표하였다.

사비는 한 때 오미선(五味禪)을 닦으며 제방을 순력한 적이 있었다. 오미선이란 일미선(一味禪)과 상대되는 말로 방편의 맛이 석여 있는 여래선을 비판하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한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은 〈도서(都序)〉에서 선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小乘禪), 대승선(大乘禪), 최상승선(最上乘禪)을 말하고 최상승선이 달마 문하에서 대대로 전승되어온 선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의 구분은 조사선의 안목으로 전하는 일미선(一味禪)의 경지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조사선의 입장에서는 말하고 있다.

〈선문염송설화〉 256칙에 오미선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스님이 귀종(歸宗) 선사 회상에 있다 하직을 고하고 떠나려 할 때 선사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젊은 스님이 대답했다. “여러 곳으로 오미선(五味禪)을 배우러 가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제방에는 “오미선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의 여기에는 단지 일미선(一味禪) 뿐이라네.”

〈종용록(從容錄)〉 81칙에는 현사의 오도기연(悟道機緣)이 간략이 소개되어 있다. 현사가 산 고개를 넘다가 발로 돌부리를 차 발가락을 다치고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아얏! 하고 아픔을 느끼는 순간 홀연히 깨달았다. “이 몸이 있지 않거늘 고통이 어디서 오는가? 이 몸과 아픔은 궁극적으로 생긴 곳이 없다. 이제 다 그만 두고 그만 두자. 달마가 동토로 오지 않았고 이조(二祖) 혜가도 서천으로 가지 않았다.(是身非有 痛自何來 是身是苦 畢竟無生 休休 達磨不來東土 二祖不往西天)” 이렇게 말하고 마침내 돌아와 능엄경을 읽다가 심지(心地)를 통달했다. 그리고는 상황에 따라 민첩하게 응하면서도 경전의 교설과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현사축지(玄沙蹴地)’라는 말이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의 〈선요(禪要)〉에도 나오며 이를 현사의 오도기연으로 본다.

현사의 문하에 갓 들어온 초심자 한 사람이 현사에게 물었다.

“저는 이제 선을 시작하는 초심자입니다. 선문(禪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일러 주십시오.” 그러자 현사가 물었다. “저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가?” “예, 들립니다.” “그 물소리를 따라 가게나.”

어느 날 현사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수행자의 본분은 중생을 교화하는데 있다. 다음 세 종류의 불구자가 찾아오면 어떻게 교화하겠는가? 장님은 주장자를 세워 보인들 보일 리가 없고 귀머거리에게는 입이 아프도록 말을 해줘도 들을 수가 없으며, 벙어리에게는 말을 시켜도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교화해야 되겠는가?”

이때 한 스님이 이 말을 듣고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을 찾아가 이 말을 전하고 물었다.

“장님과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교화하는 방법이 어떤 것입니까?”

문언이 절을 하고 일어나는 스님을 주장자로 때리려 하였다. 그러자 물은 스님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장님이 아니구나.” 그리고 다시 가까이 오라 하였다.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오자 “귀머거리도 아니구나.” 그리고 또 물었다. “어떤가? 알겠는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 벙어리도 아니네.” 이 말을 들은 스님이 귀가 번쩍하고 눈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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