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25<끝>

최근 연말을 앞두고 한라산 등반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사전 등반훈련을 해왔다. 마침 제주국제명상센터 뒤에 있는 ‘안새미 오름’을 연습의 대상으로 삼고 매일 1회 또는 2회씩 ‘오름(기생화산)’을 오르내렸다. 필자가 한라산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것은 근 20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마음속으로 수 없이 ‘한 번 더 다녀와야지’ 하다가 지난 번 산을 좋아하는 분과 의기투합하여 12월 15일로 날짜를 잡았다. 날짜를 정하고 나서는 ‘요가 니드라(깨어있는 잠)’를 할 때마다 ‘상칼파(각오)’는 “금년 중 한라산 정상에 올라간다”였다. 그 다짐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도 가끔 필자의 나이(71)를 떠올리며 ‘과연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20년 전에도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오면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나이는 물론이고 체력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준비과정에서 탈이 났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나 할까,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준비가 너무 과한 탓이었는지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허리와 무릎관절에 통증이 오면서 거동이 힘들어졌다. 다른 분들과 약속을 하면서 자신감을 보였는데 몸의 상태가 이러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한의원에 다니면서 뜸을 뜨고, 침을 맞고, 찜질을 하면서 빨리 치유되기를 바랐으나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이런 상태로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훈련과정에서 이미 고통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미래를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지금의 나’를 알아차려야 한다
명상적인 삶 살아 흔들림 없이
인생의 후반부서도 최선 다해야

하나, 필자 자신의 ‘체력에 한계’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명상센터 뒤에 있는 오름은 그리 높지 않고, 다녀보니 만만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이 정도 오름의 높이나 소요시간의 8배에 이르는 한라산을 오르기에는 준비가 태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강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때로는 한 회에 두 번씩 오름을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데 요통이 있기 이틀 전 오른쪽 다리가 뻐근하였으나 두 번이나 다녀왔으니 그럴 수 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필자의 체력 한계를 나타내는 전조증상이었다. 5개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명상센터 둘레에 있는 나무를 베고, 잔디밭에 자라는 잡초를 뽑는 일을 하다 보니 4일째 되던 날 잡초를 뽑다가 일어서는데 요통으로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 때도 일을 좀 과하게 한 탓이려니 하고 쉬면서 회복이 되었으므로 필자의 체력에 한계가 온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도 특별히 통증을 느낄 정도의 상태가 아니므로 가볍게 여기다가 탈이 난 것이다.

둘, 필자의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고 착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필자는 평소 신체건강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한라산에 간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이렇게라도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다음 두 분의 말씀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한 분은 빅토르 프랭클. 그의 나이 86세에 자신의 ‘노년’에 대한 인터뷰에서 “내게는 늙어 가는 것에 대해서 발버둥칠 일은 없다. 나는 어쩌면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도 떨어져 가며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속도도 떨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어느 것이나 그 동안 몇 십 년에 걸쳐서 얻은 인생의 경험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의 영향이다. 프랭클의 인터뷰가 갖는 의미는 인생은 죽을 때까지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며, 살아온 과정에서 이룩한 어떠한 것도 훼손되지 않으니 나이 듦에 대해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좌절하지 않고 의연해야 함을 말해준다. 필자는 이 분의 말에 흠뻑 빠졌다. 그래서 나이와 체력이 반비례한다는 자연의 진리에 저항하게 되었다. 다른 한 분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다. 그는 주변에서 “늙었으니 이제는 편히 쉬시지요”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문했다.

“만일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한다면 결승점에 가까이 가서 속도를 늦추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온힘을 다해 질주하는 것이 좋겠소?”

이 얼마나 영적 에너지가 넘치는 대답인가! 이 두 분의 말처럼 노년의 삶에 대한 굳건한 의지는 노년을 살아가는 필자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두 분의 말씀 이외에 또 한 분이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과제를 실행해오면서 그 과제를 완수하기도 하고 미결로 남겨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시자 펄스가 “삶에서의 미결과제는 늘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삶을 무겁게 한다”고 한 말처럼 필자의 인생에서도 미결로 남겨진 과제들은 평생을 두고 따라다니면서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래서 이 번 산행을 결심한 것도 두 번 다시 인생의 미결과제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필자의 의욕을 높여주기는 했으나 실제 행위의 대상인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셋, 필자는 아직도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실행하려는 데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필자가 지금처럼 살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성취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필자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고등학교 교사,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 제주대학교 교수, 한국상담학회 회장, 그리고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에 이르렀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해를 거듭할수록 의식이 확대되면서 더 큰 세계가 보였고 그 길로 나아갔다. 그 길에서 성취를 이루고 나면 더 큰 길이 보였다. 지금까지 욕망으로 살아온 길은 늦거나 힘들어도 가고자 했던 곳에 도달했다. 그 길은 개인에게나 사회의 발전에 유익을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명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칠십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처럼 필자가 가고자 했던 길은 정신적인 길이었지 육체적으로 도달해야할 길은 아니었다. 육체는 정신적인 작용을 보다 건강하게 해주는 마차의 역할을 한다. 프랭클이 말한 성장이란 정신적인 성장이지 육체적인 성장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라산은 육체적으로 도달해야 할 그런 곳이었다. 그것도 금년 안에 한라산 정상에 가야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현재의 신체적 한계나 정신적 자만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필자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오로지 현재를 온전히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를 온전히 만나지 못한 것은 매 순간 맞이해야할 대상에게 가 있어야 함에도 그 순간의 대상보다 지나간, 또는 다가올 대상에 주의가 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켄 윌버는 “이 현재가 정말 올바른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재에 오롯이 머무는 대신 새롭고 더 나은 현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좇아 현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체력의 한계’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오름에 올라가는 순간의 체력이 아니라 한라산에 올라갈 때의 체력인 미래에 가 있었다. 그러니까 체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강박감이 작용하여 연습을 더 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한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고 착각한 것은 마음조차 노인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늘 젊은이 같은 사고와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필자를 지탱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욕망에 집착’하는 것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필자가 이루고자 한 것은 거의 성취했기 때문에 한라산 등반도 같은 맥락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필자의 몸과 마음, 욕망은 현재라는 눈앞의 사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현재를 놓친 상태에서는 어떠한 것도 성취하기 어렵다. 지금 현재를 만나지 못함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고통의 해소이며, 고통이 있기 전에 대한 자각이다. 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우리는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 또는 잠시 후의 것을 만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바로 물이라는 대상을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대상을 만나고자 한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현재(오름)’를 자각하는 대신 이 자각이 일어날 ‘미래의 현재(한라산)’를 필요로 했다. 현재를 온전히 만날 수 있다면 미래의 현재를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래의 한라산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오름을 주시하는 길 밖에 없다. 현재를 온전히 만날 수 있다면 다가올 미래도 온전히 맞이할 수 있다.

이제 등산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한 해의 마무리와 욕망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이다. 정해진 산행 날이 오면 필자의 몸과 마음이 어떠하든 의연히 맞이할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한 말처럼 인생의 후반부에 있는 필자는 전력을 다할 것이며,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 바위 얼굴’처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여(如如)할 것이다. 또한 공자가 말씀한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일흔에는 마음이 가는대로 해도 순리에 어긋남이 없다)’처럼 세상에 살되 세상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오로지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힘, 명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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