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사진 한 장

지난 연휴 기간에 부산에서 두 손님이 내 산방을 다녀갔다. 두 손님은 어머니와 딸이었다. 7년 전 불일암에서 함께 찍었다는 사진을 가져왔다. 빈손으로 왔다며 미안해했지만 나는 사진 한 장이 큰 선물이라며 소중하게 받았다. 사진을 보니 그날이 생각났다. 송광사 다비장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시는 법정 스님의 천화(遷化)를 보고 허전하여 불일암으로 올라가 있을 때였다. 두 모녀가 나를 보고 독자라며 쫓아왔던 것이다.

나는 외출에서 돌아와 휴식을 좀 취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산방 앞에서 두 손님을 마주친 나는 외면할까 하다가 돌아서 물었다. 부산에서 왔는데 내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고 하니 잠시 반가움이 일었다. 부산이라면 전라도 화순 쪽에서 볼 때 동쪽 끝의 먼 곳이었다. 나는 차를 한 잔 대접하려고 차방으로 불러들였다.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손님은 법정 스님의 평범한 독자가 아니었다. 법정 스님께서 쓰신 〈무소유〉부터 모든 책을 거의 다 애독하고 소장하고 있는 분이었다. 거기다가 나의 책까지 좋아하는 분이었다. 손님의 방 책꽂이에는 법정 스님과 나의 책만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저자의 책들은 다 치워버렸다는데 내가 법정 스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내 책이 그런 대접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일러스트 정윤경

나 역시 스님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겠지만 스님은 출가 수행자이시고 나는 재가자 소설가이기 때문에 글의 뿌리나 색깔은 다르지 않을까도 싶다. 스님의 책을 애독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았다.

“스님 책이 왜 좋습니까?”

“스님께서 경험한 얘기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님의 살아 있는 얘기 속에는 지혜가 있거든요. 그 지혜를 만나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그제야 나는 이 분이 정말로 책을 좋아하시는구나 하고 실감을 했다. 그래서 내 책 중에서는 근간인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산문집을 선물하고 싶어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이름에 얽힌 사연을 말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칠곡에서 태어난 이승연(李昇淵) 독립운동가였다. 남만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 운영비 조달 등을 위해 국내에서 비밀리에 두 차례나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아버지 꿈속에 나타나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는 이설안(李雪雁)이라는 이름을 점지해주셨다는 것이었다. ‘눈 설(雪)’자에 ‘기러기 안(雁)’자의 이름은 눈송이가 나붓나붓 내리는 겨울하늘에 기러기가 날아가는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증조부께서는 1933년에 돌아가셨는데 1945년에 해방이 될 거라고 예언하실 만큼 영남 학자들 중에서 학문이 깊으셨다고 합니다.”

손님이 돌아간 뒤 아내는 선물 받은 사진을 나의 서재 책꽂이에 세워두었다. 7년 전 불일암에서의 그 순간을 선물 받은 것만 같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