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제주불교 일군 살아있는 ‘유마거사 “수행하고 계율지키고 포교해야 참불자”
70여 년 제주불교 일군 살아있는 ‘유마거사 “수행하고 계율지키고 포교해야 참불자”
  • 이병철 제주불교신문 기자
  • 승인 2017.12.1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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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84·혜향문학회 명예회장)
조명철 회장은… 1941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1954년 불교학생연맹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1년 오현고 교사를 시작해 1994년 제주도제주시교육청 교육장을 역임했고, 1999년 정년 단축 퇴임했다. 1981~85년 태고종제주교구 신도회장을 겸하면서 법화사 복원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태고종단 발전과 법화사 복원불사을 이끌었다. 1986년 법화사 신도회장, 1997년 제주불교총연합회 부회장(신도대표), 2015년 태고종 제주교구 신도회 고문, 2017년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신도회 고문을 맡았다. 2002년 제주도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장, 2013년 혜향문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 2004년 붓다대상(사회봉사상), 2010년 대한민국불교문학상 본상 등을 이외의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제주교육계 및 불교계의 원로인 조명철(84) 혜향문학회 명예회장은 제주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1948년 4·3 당시 중문중학원 1학년으로 입학, 만허 원문상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 제주대 교수로 재직했던 진원일 스님으로부터 동양문학을 사사했다. 그 인연으로 조 회장은 당시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연합체인 제주불교학생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어 태고종 제주교구 신도회장, 법화사 신도회장, 제주도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장, 혜향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도의 현대불교사 속에서 ‘조명철’이라는 이름은 7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흐르며 제주불교를 일궈왔다. 일심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다.

불심으로 유년·청년기 보내

14세때 만허 원문상 스님과 佛緣

중문중에 원문상 스님 공덕비 조성

무애 스님 불교강론으로 청년기

대학때 진원일 스님 두 번째 스승

 

격변의 시대 속에서 불심 키워

대학 때 제주 불교학생연맹 회장

진원일 스님 반대로 출가 접어

매일 〈금강경〉 독송하며 잡념 없애

“고해 뒤에 행복의 바다 있어”

해방공간의 지식승이자 교육자로 잘 알려진 만허 원문상(1908~1950년) 스님은 조 회장의 불심의 뿌리가 되어준 큰 스승이다. 서귀포시의 작은 마을인 하원동에서 태어난 원문상 스님은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를 졸업했고, 당시 제주에선 유일한 한글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당시로서는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1947년 고향인 하원에 설립한 중문중학교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조 회장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 14살 무렵의 청소년기에 조 회장의 눈에 비친 원문상 스님은 스님이 아닌 교사였다. 귀엽고 똘똘해 보였던 조 회장을 스님은 애제자로 여겼던 모양이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마친 후 함께 갈 곳이 있다며 데리고 간 곳이 바로 천년고찰 법화사였다.

“그날이 부처님오신날이었어요. 법화사에 도착하니 만국기 등이 걸려있고, 연등도 많이 달아 놓았더라고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어요. 선생님이 나를 잠시 기다리라 하고 요사채에 들어가시더니 가사장삼을 입고 나오셨어요. ‘아! 선생님이 스님이셨구나!’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존경하던 선생님이 스님이셨기에 조 회장도 자연스럽게 불문에 귀의하게 된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는 게 일반적인 불연인데, 조 회장의 불연은 스승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스승의 불심은 고스란히 제자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제주의 근현대사에 가장 큰 고통을 안겼던 ‘4·3’의 광풍이 몰아칠 무렵이었기에 스승과 더불어 신행생활을 제대로 할 기회가 적었다.

“제주 4·3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시작됐어요. 학교가 불타버려 마을 창고 등을 빌려 힘겹게 공부를 했어요. 지역별로 집단 활동을 하게 되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죽창 들고 지서로 나가 보초를 서거나 마을 성담을 돌며 보초서는 분들이 졸지 않도록 하는 일을 했지요. 그러니 제대로 공부할 형편은 전혀 안 됐지요.”

조 회장이 중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뒤로 원문상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예비검속으로 잡혀갔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기 시작했다. 학교 경영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원문상 스님의 검속은 새로 부임한 모 교감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1950년 7월 서귀포경찰서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은 ‘좌익좌상 극렬분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지역민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의로운 스님이었다.

원문상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잡혀 갈 것을 예감했던 것이었을까. 가장 소중하게 간직했던 책, 〈한글갈-최현배 저, 1940〉을 애제자인 조 회장에게 “한글을 열심히 공부해 학자가 되거라”며 선물했다. 그 책 모서리며, 책 속엔 원문상 스님의 낙관이 곳곳에 찍혀 있을 정도로 매우 소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서북청년단 출신 교감은 눈에 가시 같았던 원문상 스님이 없어지자 횡포가 심각해졌다. 결국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은 교감의 비리를 고발하는 청원서를 쓰게 된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조 회장이 당시 김충희 제주도지사를 면회해 진정서를 제출한다. 얼마 후 그 교감은 타 학교로 전보된다. 조 회장이 한국불교학생연맹 제주지역 회장으로 관음사 포교당에서 활동할 당시 관음사 직전 신도회장인 김충희 전 지사와 다시 조우했던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듯하다.

4·3의 화해와 상생의 물결이 일면서 2007년 비로소 중문중학교 교정에 원문상 스님의 공덕비를 조 회장이 비문을 정갈하게 다듬어 세웠다. 조 회장은 “그날 왜 그리도 마음이 따뜻하고 홀가분하면서도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그 시대의 아픔을 회상하는 그 자체가 가슴 아팠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유년 시절에 가장 큰 인생의 항로를 가르쳐 준 원문상 스님을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묻어야 했던 조 회장은 스승에 대한 마음의 빚이 남은 것일까.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그의 불심은 확장되고 깊어진다.

“서귀농고로 진학을 했는데 근처에 정방사가 있었어요. 무애 스님이 주석했는데 지성을 갖춘 보기 드문 분이셨죠.”

당시 조 회장은 주말이면 불교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과 함께 무애 스님의 불교 강론을 들으며 불심을 키워갔다. 그리고 그 불심으로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불교의 내면적 깊이와 본질에 점점 가까이 다가갔고, 불교는 그의 삶의 좌표가 되어간다. 마왕 파순의 그 어떤 유혹에도 부처님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처럼 조 회장의 마음속에는 불심이 금강석처럼 단단해져 갔다.

조 회장은 스승 원문상 스님으로부터 받은 책<한글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70여년 제주불교 발전에 헌신

태고종 제주교구 2대 신도회장

법화사 복원추진위 부위원장도

법화사 복원 불사 이끈 일등공신

불교정화운동 혼란기 겪으며

제주불교에 대한 애정 깊어져

 

1954년 조 회장은 제주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원문상 스님에 이은 두 번째 인생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진원일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진원일 스님이 동양문학을 가르쳤어요. 중국 대문호 이태백, 두보, 백낙천 등의 시부를 중심으로 강의했고, 우리나라 김삿갓의 해학적인 시를 소개해 웃기도 했지요.”

진원일 스님은 관음사 포교당(현 제주은행 본점 맞은편 중앙주차장) 대웅전 오른쪽 요사채에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조 회장은 자연스럽게 진원일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고 포교당에서 불교학생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는 휴전 직전이라 불교학생회가 아니라 ‘불교학생연명’으로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함께 활동한 조직이었다. 제주대학교는 국문과, 영문과, 법학과, 축산과 4개 학과에 불과했지만 40여 명이 불교학생연맹에 가입했고, 고등학교는 제주농고, 오현고, 제주여고, 신성여고 4개 학교에서 남녀 학생 80여명이 가입해 일요일이면 대웅전은 학생들로 붐볐다.

당시 불교학생연맹의 회장을 맡게 된 조 회장은 지도법사인 조원일 스님과 함께 일요법회를 알차게 이끌었고, 진원일 스님은 조 회장의 멘토가 된다. 그리고 4·3의 영향으로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제주도 불자들은 1955년 제주시 도남동에 ‘알(아래) 관음사(현 보현사)’를 짓게 된다. 당시 관음사 주지는 바로 일붕선교종을 창종한 서경보 스님이었다. 스님은 자신이 쓴 〈불교입문〉을 조 회장에게 선물한다. 이를 통해 조 회장은 토론의 장을 만들었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불교공부와 신행생활을 넓혀갈 수 있었다.

“불교는 교리 공부가 먼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수행의 토대가 세워져야 합니다. 스님들의 설법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스스로 불서를 읽고 교리 공부를 확고히 한 뒤 수행하고, 일상생활에서 계율을 지키며 포교를 해나갈 때 불자의 삶이 완성된다고 봅니다.”

불교학생연맹 활동을 통해 공부가 점점 깊어진 조 회장은 출가를 결심하고 진원일 스님에게 그 인연을 물었다. 하지만 진원일 스님은 조 회장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고, 조 회장은 평생 재가불자로 살 것을 다짐한다.

그 무렵,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면서 비구와 대처 간 분쟁으로 불교계는 큰 혼란을 겪어야했다. 제주 지역의 불교계도 그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절대 소수인 비구측이 사찰 점령에 나섰지요. 제주에서도 진원일 스님을 내쫓기 위해 그들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생들이 포교당을 지켰어요. 결국 싸움이 벌어졌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학생들에게 밀려 후퇴를 했어요. 그렇게 몇 차례 밀고 당기는 사이 신도회가 소집되어 논쟁이 벌어졌고, 결말이 나지 않자 경찰을 동원, 진원일 스님을 끌어내면서 일단락됐습니다.”

그 후 1970년 태고종이 창종되고, 태고종은 교세 확장을 위해 제주시민회관에서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한다. 이날 조 회장은 당시 계사였던 묵담 대종사로부터 ‘인재(忍齋)’라는 불명을 받고,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제2대 신도회장을 맡으면서 제주불교 발전에 헌신하게 된다.

이후 조 회장이 제주도교육청 장학관으로 근무할 무렵, 부친이 돌아가시고 서귀포시 하원동 천년고찰 법화사에서 49재를 봉행하게 된다. 조 회장에게 법화사는 마음의 고향 같은 사찰이다. 고향인 서귀포시 하원동에 자리 잡은 연유도 있지만 원문상 스님을 인연으로 불심이 피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 회장은 법화사 주지 시몽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시몽 스님은 법화사가 고려시대 비보사찰로 고찰임을 인지하고 복원의 큰 꿈을 그린다. 그 원력에 최초로 힘을 보탠 이가 바로 조 회장이다. 조 회장은 시몽 스님과 함께 제주도의 지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김창진 제주도 기획관리실장(대학 선배)을 찾아간다. 복원 계획을 설명하고 설득 끝에 사찰 진입로 포장 예산 지원을 받게 되면서 법화사복원추진위회가 구성되고, 복원의 대작불사가 시작된다.

“법화사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자 서귀포지역 유지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변성근 사장, 소암 현중화 선생, 김황수 전 교육감 등을 찾아가 복원추진위원회 동참을 권유했지요. 김 前 교육감은 자신이 비불자라며 사양했는데 나중엔 지방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동참하겠다고 쾌히 승낙하더군요. 그러자 전국적으로 유명한 서예가인 현중화 선생도 ‘김 교육감이 동참하겠다고 하니, 내 팔이 끊어질 때까지 작품을 써서 법화사 복원에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지요. 결국 몇 달 후 제주칼호텔에서 작품전시회를 열어 복원활동기금을 조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법화사복원추진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가 지원과 신도들의 보시를 통해 18년 동안 7차례 걸친 발굴과 세미나를 열었다. 이에 부지는 2천 8백평에서 2만 5천여 평으로 확장됐고, 그 위에 대웅전, 남순당, 요사채, 구화루 등의 복원은 물론 2천 5백여 평의 구품연지와 조경까지 마무리 되면서 법화사는 찬란했던 고려시대 천년고찰의 위상을 되찾게 된다.

조 회장은 지난 70여 년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불교에 대한 생각을 설파했다.

“불교는 무신론(無神論)입니다. 신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아미타불을 신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가 서방정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극락이 있습니다. 번뇌 망상으로 내 마음이 지옥인데 어떻게 극락에 가겠습니까. 내 마음에 극락을 지어야죠. 아미타부처님을 일심으로 부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청소가 주변의 더러움을 닦아내는 것이라면, 수행은 마음의 때를 씻고 닦는 것이라고 조 회장은 생각한다. 그래서 조 회장은 매일같이 집안을 청소하듯 〈금강경〉을 독송하며 마음속의 잡념을 없앤다.

“〈금강경〉을 독송하다보면 잡념이 들어온 것을 금방 알아차려요. 눈만 글을 보고, 생각은 딴 곳에 있다면 그 마음은 이미 과거에 가 있는 것이지요. ‘마음이 과거로 가면 괴로움이요, 미래로 가면 불안이요, 현재에 머물면 행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현세극락이 바로 그것이지요. 내가 현재 극락에 살아야 죽어서도 극락에 가는 것이지, 지금이 지옥인데 죽어서 어찌 극락에 간다고 말하겠습니까.”

부처님은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했다. 하지만 조 회장은 고해 뒤에 행복의 바다가 있다고 말한다. 괴로움과 기쁨이 하나란 말이다. 80평생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양분 삼아,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괴로움의 바다를 극락의 바다로 만들며 살아온 ‘참 불자의 삶’을 몸소 보여준다.

1995년 새로 지은 ‘알 관음사’에서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 사진 뒷줄 맨 왼쪽이 조명철 회장.

 

제주지역 청소년 유해 환경감사단 활동중인 조명철 회장. 사진 앞줄 오른쪽이 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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