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의 운강석굴

운강석굴의 대표 석굴인 제20굴의 본존불. 북위의 태조 도무제를 모델로 만들어져 그 위용이 대단하다. 당시 왕즉불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석불이다. 위엄 있으면서도 안정감으로 넘친다. 압도감이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을까. 세계의 도처를 순례했지만, 이렇듯 불상 앞에서 왜소해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 거대한 규모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거대한 만큼 위엄이 있고, 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품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뚝 솟은 바위산의 절벽을 파고 들어간 석불의 현장.

다섯 황제 모델인 담요오굴 등
1100곳 석굴 자리한 운강석굴
위엄있는 20굴 본존불 대표적
종교와 권력 상관관계도 엿보여


운강석굴, 베이징에서 가까운 곳이다. 운강석굴의 제20굴 앞으로 가보자. 거칠게 생긴 단애(斷崖)를 배경으로 거대한 석불좌상이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남성미를 읽어 낼 수 있다면 과장일까. 안정적 구도와 비례 그리고 당당함과 더불어 섬세한 부분처리, 제20굴 본존상의 위용이다. 이 본존상의 위엄은 바로 옆의 밀집된 조그만 석굴들과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일 것이다. 20굴 본존상은 운강석굴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강석굴을 존재하게 한 담요 스님에 의한 대작불사의 첫 번째 작품이다.

담요오굴(曇曜五窟)은 운강석굴의 상징이다. 담요는 북위의 다섯 황제를 위해 다섯 군데의 석굴을 조성했다. 20굴 본존상은 북위를 건국한 태조 도무제(道武帝)를 모델로 하여 조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제의 상이어서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동그랗게 우뚝 솟은 육계와 어깨까지 닿는 기다란 귀, 그리고 거의 사각형에 가까우면서도 위엄 있는 얼굴과 또렷한 이목구비. 20굴 본존상의 괴량감과 더불어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옷 주름과 광배의 화불이나 화염문 같은 섬세한 표현이다.

광배 곁에 있는 비천의 아름다운 자태는 찬탄을 연발하게 한다. 운강석굴은 자신감에 넘치는 조형의지와 개성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 운강석굴은 특히 부조회화 즉 돋을새김 위에 다채로운 채색을 올린 것은 운강의 조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운강석굴! 

운강석굴은 무주산 석굴이라 불릴 만큼 무주산에 위치해 있다. 동서로 약 15km 정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선비족의 탁발부는 398년 평성지역에 북위 왕조를 건국했다. 그 곳은 내몽고로 가는 길목으로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다. 흉노의 남하도 이 곳을 통과했을 정도이다. 북위의 도읍 대동(大同, 다퉁) 즉 평성. 그곳은 494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약 1백년간 수도로서 각광을 받았다. 대동에 운강석굴이 있다. 오늘의 도시는 상쾌하지 않다. 석탄가루 휘날리는 듯 어두운 색의 도시를 지나 석굴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도심의 분위기와 달리 석굴 앞에 서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운강석굴은 대형석굴 45군데와 이에 부속된 소규모의 석굴과 감이 있다. 운강은 자연적 여건에 따라 동부, 중부, 서부의 3구역으로 나눈다. 즉 4군데의 동부(제1~4굴), 9군데의 중부(제5~13굴), 32군데의 서부(제14~45굴)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서부의 동쪽 부분이 운강석굴의 초기 석굴이면서, 이를 담요오굴이라 부른다. 대형석굴 이외 1,100여 군데의 소규모 석굴과 감 이외 51,000여구의 조각이 있다. 운강의 진면목이다. 운강은 국가 차원의 석굴사원으로 역경활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운강은 불법승 삼보를 두루 갖춘 중국불교의 중심 역할로 한 시기를 풍미했다. 승려 3천명의 수용, 예컨대 제3굴 영암사(靈岩寺)의 경우가 그렇다. 바로 운강석굴의 위용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 온 이후 평탄대로만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흥망성쇠는 인류 역사의 일반적 원리, 중국불교 역시 이와 같은 궤적을 보였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 중국 역사에서 폐불정책 즉 불교탄압 정책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일기도 했다. 그 가운데 북위의 폐불사건은 처음으로 겪는 시련이었다. 태무제의 폐불정책은 중국 불교의 일대 위기로 몰아넣었다. 통치자에 의해 불교가 융숭한 대접을 받는가 하면, 탄압의 대상이 되어 사찰 파괴 등 시련을 겪게 했다. 폐불사건 이후 북위 황실의 보호 아래 운강석굴은 개착공사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바로 문성제의 불교 진흥정책에 의한 결과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운강석굴의 거대한 규모이다.

왜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새겼을까. 바로 말법(末法)시대에 이르러 그나마 불교가 살아나려면 거대한 석불이라도 조성해 놓아야 파괴를 모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일종의 역설적 산물이기도 하다. 하여 중국의 경우, 북방지역은 석굴사원을, 남방지역은 목조사원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갖게 되었다.

운강석굴하면 아무래도 담요의 역할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다섯 황제를 모델로 하여 조성한 석굴이기 때문이다. 담요오굴 가운데 문성제의 경우, 몸에 점 자국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석불에도 같은 위치에 점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왕즉불 사상의 압권이다. 신라에도 한때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생각이었다. 불교와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북위 불교의 폐불사건 이전에는 호국 성격이 짙게 나타나기도 했다. ‘황제 즉 여래’, 이런 사조는 불상에 대한 예배는 곧 황제에의 예배로 등식을 성립하도록 했다.

운강석굴의 전경. 다섯 황제를 모델로 한 담요오굴을 비롯해 1100여 곳의 석굴이 존재한다.

운강석굴은 으레 3기로 시대구분 한다. 제1기(460~465) 석굴은 담요오굴이라는 용어로 특화시킬 수 있다. 태조를 비롯 다섯 황제를 위하여 석굴을 조성한 것. 이를 주도한 담요 스님의 이름을 따 담요오굴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황제를 위한 사원이어서 그럴까. 이들 다섯 굴은 무엇보다 거대하다. 특히 주존불상의 위용이 압도적일만큼 크다. 지엄한 존재, 황제를 모델로 해서 그랬을까. 보통의 석불과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오두막 같은 건축형태에 말발굽 같은 평면 그리고 아치 형식의 천정이 특색을 이룬다. 제18, 19, 20굴은 운강석굴의 초기 사원이다. 대상굴(大像窟)인 제19굴이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17굴은 삼세불을 봉안했고, 그 가운데 미륵불을 중시 여겼다. 제16굴은 주불은 석가상이다. 현재불인 석가는 바로 당시의 임금이었던 문성제를 상징했다.

마찬가지 형식으로 제18굴은 태무제, 제19굴은 명원제, 제20굴은 도무제를 위한 것이었다. 제17굴의 경우, 재위에 오르지 못한 경목제를 위한 석굴로 주존상은 미래불로 봉안했다. 담요오굴, 황제들을 위한 석굴사원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 조각의 기법은 거대한 크기에 비하여 섬세한 부분 표현을 겸비했다. 얇은 옷자락 같은 표현이 이 점을 말해준다. 담요오굴의 조각적 특징은 삼세불 중시, 건장한 남성적 체구에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광배의 문양 등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특징들은 늘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강건하고 중후하며, 꾸밈이 없는 양식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담요오굴의 특징이다. 이들 특징은 양주지역의 조각과는 다르며 간다라 조각과도 같지 않은 특징이다. 이러한 조각양식은 서역, 양주지역 조각 및 간다라 조각의 특징을 모두 반영하였으며 그 위에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것이다.”(마세장 외, <중국불교석굴>)

제2기(466~494)는 문성제 사후부터 효문제의 낙양 천도 이전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의 조각은 ‘아름답고 온화하고 점잖으며 화려하고 진귀하다’. 제3기(494~524)는 낙양 천도 이후의 시기이지만, 아직 과거의 영화가 남아 있던 시기이다. 대형 석굴 대신 규모가 작아졌으며, 작은 규모만큼 바위 벽면 가득 벌집 같은 형세를 이루기도 했다. 각 시대마다의 조형적 특징을 뚜렷하게 한 운강석굴, 그러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으려한 정신은 파릇하다.

나는 운강석굴을 거닌다. 돈황이나 용문처럼 관광객들이 몰려오지 않아 조금은 한적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언제부터 석굴사원은 유명 관광지로 바뀌어 인파를 몰고 오는가. 종교적 신심은 방기하고, 단순 구경거리로 떨어진 석굴, 그 현장에서 감회를 달리하기도 한다. 향화가 멈춘 사원. 이를 박물관 진열장 안에 ‘진열된 불상’의 신세로 비유할 수 있을까. 불상은 어찌하여 진열장 안에 있어야 했을까. 거대한 규모의 운강석굴,

이 또한 오늘의 현실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존재인가. 거기다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현장이다. 담요오굴과 권력과의 관계는 중국 불교의 또 다른 단면을 읽게 한다. 운강석굴은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하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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