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우울증의 묘약

그림 ·박구원

“얘들아, 여보!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한 거야?”
최근 한 주말극에서, 자식 넷을 키운 아버지가 잘 나가던 사업에 실패해 오랫동안 무능한 생활을 해오면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수시로 원망의 말을 듣자,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혀 강가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허공에 던진 말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감과 실직이나 퇴직 등에 따른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겪는 애환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보고 있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불안장애와 우울증 환자가 오십대에 가장 많다고 하는데, 중년남성들이 겪는 이른바 갱년기 우울증은 남성 호르몬 분비 저하와 사회적 지위의 변화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1억 명 앓는 질환 우울증
절 반복하며 감정 순화
가족애까지 돈독진 효과

인생이 뭐 그런 것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고 방치하다간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전문가들은 우울감이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좋은 방법으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본인만의 운동과 취미생활을 즐길 것을 권하고 있다. 즐겁게 활동을 하면 긴장할 때 뇌에서 나오는 에페네프린 등의 호르몬 분비가 줄고 대신 기분을 좋게 하는 세토닌이 늘어나 우울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족과 함께 산행하기, 하루 이삼십 분 햇볕 쪼이기 등을 권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108배가 아닌가 싶다. 집과 가까운 데 절이 있으면 운동도 할 겸 걸어갔다가 햇살 가득한 법당에서 108배를 하고 나오면 그 짜릿한 충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주말마다 운동 삼아 산에 올랐다가 절에 들어가서(어느 산이든 반드시 절이 있으니까!) 108배를 하고 내려와 된장찌개 한 그릇 사먹는 것으로 심신의 건강을 챙기는 분들도 있다. 무슨 운동이든 함께 하면 동지애가 생기는 걸 경험할 수 있는데, 가족과 함께 하는 108배는 절을 하고 난 뒤 기쁜 마음을 공유하고 좋은 가치를 함께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지애 이상의 가족애를 돈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도반 한 사람은 사십대에 부모님을 잃고 마음이 우울한 데다 가정의 우환까지 겹쳐 우울증의 나락으로 한없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부모님을 따라가고픈 마음이 들만큼 우울증이 심해질 무렵, 한 달에 한 번 3000배를 하면서 극심한 우울증을 극복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던 그 느낌, 도반들 틈에 섞여 절을 하고 산을 내려올 때 느꼈던 그 기쁜 마음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목숨을 버리고 싶었던 우울감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거라고 했다. 지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집에서 108배를 하고 일 년에 몇 차례 도반들과 3000배를 하며, 경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정신적인 감기라 불리는 우울증은 전세계적으로 현재 1억 명 이상이 앓고 있는 질환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질병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도 문제지만 그 곁에서 생활하는 사람 또한 큰 문제다. 자연스레 감기 옮듯 전염이 된다고 하는데, 더 심각한 것은 우울증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 살아있는 가족들의 삶이다. 10여 년 전, 한 유명 여배우가 극단적 선택을 한 후 몇 해 사이로 남동생, 전 남편, 운전수까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남은 가족을 걱정하고 있다. 이처럼 가족 중 한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하고 나면 나머지 가족도 열에 아홉은 감염이 된 채 고통 속에 살아간다.
매일 반복적으로 몸을 낮추어 절을 하면 혼란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된다. 파도가 잦아든 맑고 깊은 바다에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듯, 내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어떻게 현실화되었는지, 그리고 이번 생에서 뿐만 아니라 오랜 생을 살아오면서 했던 내 말과 행동의 결과가 지금 풀려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내가 겪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 막연히‘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했던 것이‘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나!’로 바뀌면서 적극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일을 수용할 때 번뇌로 출렁였던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한 노비구니 스님은 젊은 시절, 전국의 적멸보궁을 순례하며 하루 몇 천배씩 강도 높은 절을 하다가 문득 전생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되자 현실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현실에 대한 원망과 회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알게 된다. 삶의 어느 부분에서든 시간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현실을 담담히 수용하는 법을, 그리고 상대방이나 세상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받고 있다는 것을.

500배로 우울증 벗어난 며느리, 자비행씨
“108배? 너무 좋아요, 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절을 했으면 좋겠어요.”
절 이야기가 나오자 이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였던 분을 얼마 전 남해 용문사에 다녀오는 길에 만났다. 108배로 인해 낮은 자존감과 깊은 우울증에서 벗어나 자신감으로 충만한 새 삶을 찾은 그녀는 오십대 초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한 몸매에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 후 함께 살던 시어머니의 호된 시집살이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사건건 며느리의 삶을 통제하고 주도하려 했던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공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날이 갈수록 시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싫기만 했다.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고역일 만큼 식사를 하는 모습까지 싫고 미웠다. 남을 미워할 때 가장 힘든 사람은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이다. 오죽하면 옛 도인들께서‘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만 없애면 삶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했을까. 미워하는 마음이 깊어지자 우울증이 찾아왔다. 시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한심하게 느껴질수록 자존감이 낮아졌다.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았지만 그때뿐 돌아서면 다시 똑같은 지옥의 연속이었다. 매일 복잡한 마음으로 서성일 때, 일간지에 연재되던‘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읽다가‘스님들도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절을 한다’는 구절이 마음이 콕, 박혀 들어왔다.
“도를 닦는 스님들도 누군가 미울 때가 있구나, 그럴 때 절을 하는구나!”
당장 절을 하기로 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찾으니 절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저녁부터 하루 5백배를 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루 500배를 하려니 우선 시어머니를 미워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수년간 쌓인 미움이 절 500배 하는 것으로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서 시어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또 시시때때로 미운 감정이 일어나 요동을 쳤다. 생각을 다른 데로 옮겨보았지만 잠시일 뿐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럴 때 주력을 함께 하면 효험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능엄주를 써가지고 다니면서 출퇴근하는 전철에서도, 운동을 하면서도 외웠다.
어느 날부터 하루 500배와 능엄주가 우울한 마음을 거두어내기 시작했다. 맹렬히 두 가지에 집중하자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면서 우울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감이 솟았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면 늘 남편 뒤에 숨어 그의 처분만 바랐던 소극적이고 자존감 없던 자세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매사 주도적이 되어갔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인가 스스로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몸이 하자는 대로 쉽고 편한 삶을 추구하며,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한 삶인 줄 착각했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자신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 저절로 이해되었다. 내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이니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시어머니도 소중한 부처였다. 늘 문제의 해결을 밖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큰 전도몽상이었는지를 깨닫게도 되었다. 내가 온전한 지혜와 자비를 갖춘 부처인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가려져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기 시작하자 눈물이 많이 나왔다. 자신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으로 잘못 살아왔는지 많은 참회가 되었다.
“살아가면서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매일 3천배를 하라’고 하셨던 성철스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첫 3천배를 하면서 깨달았어요.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그것이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이며, 큰 욕심 없이 진심으로 절을 하다보면 사물이 밝게 보이는 변화를 느꼈죠.”
그녀의 이러한 변화는 정신적인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허리에 근육이 생겨 아무리 절을 해도 허리 아픈 줄 모르고, 자세가 바르게 되니 따로 몸매를 가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게 되었다. 절을 하면서 온 몸의 근육과 관절들을 반복적으로 수축 이완시키면서 굽히고 펴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척추가 바로잡히는 효과를 자연스럽게 본 것이다.
“108배는 나에게 캄캄한 세계에서 환한 마음의 세계로 가게 하는 전환점이 되어주었어요. 아무리 좋은 법문도 내가 수행해서 깨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내가 스스로 깨친 것만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절수행을 통해서 깨달았죠.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던 습관이 사라지자 무슨 일이든 편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죠.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성격이 밝아지고 자신감이 생긴 것도 큰 변화예요.  그리고 애쓰지 않아도 좋은 인연들이 만들어졌죠.”
매일 매일이 새롭게 느껴지고,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감사할 수 있을 때 행복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녀에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토록 미워했던 시어머니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까를 물어보았다.
“시어머님이요? 요즘은 어머니를 부를 때‘사랑하는 어머니?”이렇게 불러요. 연세가 많다보니 요즘 초기 치매증상을 보이시고 있는데, 이제 제가 잘 돌봐드려야 할 차례죠. 좋은 인연을 만드는 노력이 수행이잖아요.”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걸 알면 어떤 문제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나를 수없이 낮추며 겸손을 배우게 하는 108배는 그 진리를 알게 하는 첩경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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