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인데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어금니는 부어올라 음식을 씹을 수 없고 편도선의 통증으로 뜨신 물을 삼키기에도 힘에 겹다. 한국산 두툼한 파카를 입고 있는데도 이빨이 달달달 떨릴 만큼 춥다.

이곳 티베트의 죠오공에서 이틀을 머물고 있지만 창뚜 가는 버스는 소식이 없다. 게스트하우스엔 삐걱대는 판자침대뿐, 담요 두 장으로 밤의 추위를 견디어야한다. 화장실은 숙소에서 100m 거리의 강변에 있다. 자연친화적이라서 용변은 비스듬한 언덕아래의 강물로 흘러든다.

인생은 어찌보면 짧고도 긴 여행
우리 모두 떠나며 살아갈 일이다

문짝이 없는 화장실에서 서로 마주보는 것도 민망스런 일이지만 엉덩이 부근으로 파고드는 드센 바람도 견뎌야한다. 드넓은 강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얼음덩이가 떠밀려 부딪치며 흘러가고 있다.

티베트의 밤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듯 가깝게 떠있다. 숙소에서 화장실로 가는 길은 외진 길이라서 대개는 방마다 하나씩 공급되어 있는 세숫대야에다 소변쯤은 간단하게 해결한다.

달빛이 아니어도 티베트의 밤은 초롱초롱한 무수한 별빛으로 꿈과 설레임을 안겨준다. 티베트의 밤하늘은 누구나 시인이 되게 아무나 향수에 젖어 울먹이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온다. 으스스 떨리는 몸을 이끌고 강물을 바라다보면, 하늘의 별빛을 보면 미치고 환장할 만큼 한국이 그립다. 어머님이 그립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이 그립고 배추김치, 깍두기가 그립다. 길거리의 군고구마, 붕어빵이 그립다. 한국에 가면 짜장면은 언제나 곱빼기로 먹을 생각이고 팥고물찰떡은 배가 터질 만큼 먹을 생각이다.

어린 시절의 광숙이, 길자, 은경이도 보고 싶고 통도사 후원의 행자시절의 눈물방울도 비눗방울처럼 뜨고 있다. 어머니! 길게 부르면 서러운 게 왜 이리도 많은지 생각은 하늘을 날아 고향 처마 밑에서 놀고 있다.

주일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예배당에 가게 되면 주일학교 여선생님도 예쁘지만 사탕이며 빵이며 입이 즐거워 생일 같다. 다만 목사님의 그럴듯한 설교 뒤에 미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헌금을 강요하는 듯한 매미채의 등장은 주머니가 비어있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에게 기분 좋게 바칠 동전이 없어 늘 죄송했고 그럴 때마다 잠자는 시늉도 체면 없는 짓이었다.

교회를 오고가는 길거리에서 어머니는 교과서 없는 활자 없는 말씀의 책으로 어린 나의 가슴에 훈훈하게 군불을 지피시며 꿈의 날개를 달아주셨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에 ‘손으로 태산을 움켜쥐니 호랑이가 주먹 안에서 울고 입으로 바다를 송두리째 삼키니 뱃속에서 고래가 논다’고 하셨더구나.”

“유태인들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에는 ‘친구는 두 세급 위를 사귀고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있어도 두 눈은 하늘의 북극성에 두라’는 말씀도 있단다. 오래토록 마음에 담아 희망을 일궈내는 밑거름이 되게 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게 있어 빛이자 부처님이다. 길거리에서 열 번 쓰러져 열 한번 일어나는 끈질김의 잡초 근성은 어머니의 말씀을 깊이세긴 교육 덕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여행하면서 철이 든다.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색다른 환경도 익히며 부대끼면서 아파하면서 길을 찾는 것이다. 허허벌판에 홀로서서 절대고독의 의미를 몸으로 부딪쳐 깨달으며 감사와 고마움, 미안함을 배우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무수한 길을 걸으며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윤회하지만 원초적인 타는 목마름과 마음의 허기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어찌 보면 짧고 긴 여행이다. 여행에서의 경험은 지혜를 일구는 터전이 된다. 경험은 스승이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설렘이지만 몸과 마음이 지칠 수 있다. 죽음의 고비도, 뼈를 녹이는 절대고독과 모진병도 역경도 만날 수 있다. 그때마다 ‘신(神)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든 사람이 위대하다’는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 박힌 글이 위안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떠나며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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