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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연재 박태수의 ‘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24
  • 박태수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
  • 승인 2017.12.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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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했지만 계속된 무의식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말하는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의식의 중심인 나(ego)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이다.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원형’이라고 부른다. 자기원형은 우리 정신의 내적인 방향타이며, 최고의 신,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징이다.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있는 것으로 인간들이 신이라 부르는 대상에 해당된다. 우리는 자기원형 그 자체를 인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원형의 상(image)이다. 그것은 인간의 꿈, 신화, 민담, 종교적 표상으로 나타난다. 자기원형이란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그 사람의 마음을 통일하여, 숨은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하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의식은 의식이 쉴 때에도 끊임없이 활동한다.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준비하여 제주국제명상센터를 마련하고, 필자 자신의 영적 성장과 세상에 기여하려고 했다. 하나의 꿈을 이루면 또 하나의 꿈을 이루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처음 명상센터의 터를 물색할 때도 공간 선택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센터 공간을 보았을 때, 그 공간 못지않게 필자의 마음이 끌린 것은 그 터를 둘러싸고 있는 산(제주에서는 오름)이었다.

무의식 넘어 현실 나타난 가피
단순한 행운 아닌 노력의 결과
받으려고 하면 나타나지 않아
받을 능력을 스스로 만들어야

15년 전 당시 이 산은 그저 작은 분화구가 있는 ‘오름’에 불과했다. 그러나 명상센터를 꿈꾸는 필자에게는 오름보다 ‘숲길 명상’을 하기에 최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명상센터를 짓고 나자 숲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으로 괭이와 삽을 들고 산길을 내기 시작하였다. 나만이라도 다닐 수 있는 토끼 길 같은 그런 길을 생각하며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풀을 걷어내고, 괭이로 파고 삽으로 길을 내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기진맥진하여 주저앉고 말았다. 앉아서 지금까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아서 혼자서 길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러나 나(ego)는 포기했지만 내 안의 나(self)는 작업을 계속했다. 인간에게는 존재의 심연에 초자아적 자기(transpersonal self)가 있다. 그곳은 평범한 사람들의 개별성을 초월하고 관습적인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있는 세계와 이어져 있다. 그곳은 융(Jung)이 말하는 원시적인 신화적 심상(원형)들이 잠재되어 있어서 현대인의 꿈과 환상 속에 등장한다. 이 원형은 전 인류의 공통된 자각으로써 꿈, 명상이나 요가, 바이오피드백, 유체이탈 등을 통해 의식의 세계와 만난다. 그것은 융이 발견한 한 사람 ‘안에’ 있는 동시에 그 사람 ‘너머에’ 있다. 개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나’와 연결되어 있다. ‘초월적인 나’란 자신의 사적인 마음, 몸, 감정, 생각, 느낌들로부터 초연한 자각의 창조적 중심이자 확장된 자각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으면서 자신을 넘어선, ‘내가 아닌 나’로서 깊은 내면의 자유로움, 가벼움, 해방감, 안정감을 가진 진정한 나로 존재한다.

숲길 만드는 일을 과제로 남긴 채 얼마의 세월이 지났다. 혼자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음을 실감하였으니 아예 그만두었다. 그냥 오름을 좋아하는 등산객들의 발길로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세월에 숲길이 이루어질까?’ 그런데 그 간절함이 현실로 나타났다. 명상센터 건물이 들어서고 반년쯤 지났을까,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뒷산을 울타리로 하고 자리 잡은 명상센터 연구실에서 새해의 구상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는 “쿵, 쾅”소리에 놀라 나갔더니 포클레인이 산에서 명상센터 뒷길로 내려오고 있었다. 포클레인 기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둘레길을 만드는데 명상센터 뒷길이 경사가 심해서 다른 길로 가다가 다시 원래 길로 들어서는 중”이라고 했다. ‘둘레길’이라는 말에 어찌나 기쁘고 놀랍던지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 야자수 잎으로 만든 매트를 깔아놓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토록 간절하게 꿈꾸던 일이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의식의 뒷전으로 밀려난 꿈, 그것은 무의식을 통과해 현실로 나타났다. 은총이 내린 것이다. 필자의 무의식은 의식이 쉴 때도 쉬지 않았다. 언제나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작업공간은 한정된 의식의 범위를 넘어 시·공을 초월하였다.

집착을 놓아 얻은 행운
이러한 결과를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종교에서는 이를 ‘은총’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꿈의 현실화는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하다.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껴지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그런 일들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평범하다. 포클레인이 내가 할 수 없는 둘레길을 만들어준 일은 내 의식적인 작용과는 다르게 일어났으므로 특별하다. 이러한 것은 잠재적으로는 나의 의식에 영향을 받지만 그 근원은 의식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의식적 의사결정을 초월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의식세계 바깥에서 생겨나 인간의 영적 성숙을 돕는 강력한 힘이다. ‘의식 세계 밖에 존재하지만 인간의 영적 성숙을 돕는’ 이 강력한 힘은 만져 볼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동시성’ 현상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존재한다는 것을 여러 사건을 통해 알고 있다. 은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는 종교인들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단지 해야 할 일을 행하고 주시할 뿐이다. 필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필자 자신이 바로 어려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그렇다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노력은 그 어려움을 영속화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아마도 산길을 만드는 작업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지금쯤 필자가 건재할 수 있을까? 필자는 꼭 이루어야겠다는 에고(나)를 내려놓았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힘든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다. 우리가 고통과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고통이다. 그래서 필자는 숲길을 만드는 어려움과 힘들게 싸우는 대신 그 한계를 알아차리고 초연한 자세를 취하기로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일단 멈추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심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보니 심신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대상을 심신과 동일시했고, 심신의 문제, 고통에 속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심신을 끈기 있게 바라보는 동안 그것들이 자각의 대상, 초개아적 주시의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초월적인 나’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통찰하고 나니 ‘나’만을 보던 세상을 ‘전체’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애쓰던 일에서 벗어나 일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아는 순간 세상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생 클레망이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듯이 나를 이해하는 순간 세상과 이어져 있던 내 영혼의 심연에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미의 절대적 존재라기보다 내 안에 있는 신성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속박에서 해방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불사로 이끌어주는 신성한 초월적 영혼을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자각의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 한다든가, 좋은 카르마를 쌓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행위에 대해 신이 축복을 내려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과 의식으로부터 나는 무엇이고 신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갖지 않아야 한다. 적절한 방식으로 다른 이에게 봉사하고 환경을 풍요롭게 할 때 나는 사심 없이 세상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은총을 입어서 내가 그토록 소원하던 숲길은 이루어졌다. 이처럼 은총은 의식세계 밖에 존재하지만 인간의 성숙을 돕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은총은 만져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이 힘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의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아마도 개인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은총은 우리의 의식세계 바깥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써 무의식이라고 하는 대리자를 통해 작용할 뿐 아니라, 부모 외에도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용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온다.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지만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부하면 오지 않는다.

은총의 본질은 초능력이다. 스캇 팩(2002)은 이러한 초능력을 ‘가치 있거나 호감이 가는 일이나 사물을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찾아내는 재능’이라고 정의했다. 붓다도 애써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은총이 오듯이 해탈이 그에게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해탈을 얻기 전 그는 그것을 오랜 세월 찾아 헤맸으며, 그것을 위해 준비해 왔기 때문에 해탈이 그에게로 왔다. 필자도 둘레길이 만들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명상센터를 짓고, 둘레길을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선물, 은총을 받게 된 것이다.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사랑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는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박태수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  hyunbulnews@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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