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현대불교
상단여백
HOME 연재 강소연 교수의 ‘불화 속 스토리텔링’
나 자신 번뇌·감정이 곧 ‘마왕’8. 자유 향한 태자의 여정 ‘팔상탱’3
  •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
  • 승인 2017.12.01 12:50
  • 댓글 0
〈월인석보 팔상변상도〉의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변상판화.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고 마왕의 조복을 받아 부처님으로 탈바꿈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된다.

싯다르타 태자가 큰 깨달음에 들려 하자, 마구니가 나타납니다. 마구니는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마라 빠삐만 또는 마왕 파순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왕 파순은 자신의 세 딸을 태자에게 보내어 애욕을 일으켜 수행을 방해합니다. 어여쁜 얼굴과 부드러운 몸매, 검푸른 머릿결과 주홍빛 입술, 가는 허리와 희고 곧은 다리. 어지러운 향기를 풍기며 세 여인이 등장합니다. “어찌 오욕의 쾌락을 모른 척 할 수 있나요”라고 유혹하는 마녀들에게 태자는 “어찌 한번 뱉었던 음식을 다시 주워 먹겠냐”며 오욕의 진실된 실체와 허망함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온갖 교태로 유혹하는 세 딸에게 “똥과 오줌이 차있는 가죽 자루”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의 순간 나타난 마왕 파순
파순의 세 딸, 부처를 유혹하지만
“똥·오줌 찬 가죽자루”라며 물리쳐
악마는 수행할 때 일어나는 작용
정진 통해서만 경계 넘을 수 있어

부처님께서는 “애욕은 마치 횃불을 잡고 바람을 거술러 가는 것과 같아서, 어리석은 사람은 횃불을 놓지 않으므로 반드시 자기 손을 태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특히 음욕이 많은 제자에게는 부정관(不淨觀)의 수행법을 통해 제도하셨습니다. 육체의 더러움과 무상함을 통찰하게 함으로써 단박에 음욕의 불길을 꺼버리는 관법입니다. 물론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 역시 이 부정관을 통해 떨쳐버리게 만듭니다.

〈대념처경(大念處經)〉의 ‘몸에 대한 관찰(身隨觀)’에서는 몸속의 온갖 장기에서 발생하는 피, 고름, 가래, 응고 덩어리들을 관하고 또 자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지켜보면서 육신의 덧없음을 깨치게 합니다. 미국 속담에 “미모는 피부 한 꺼풀에 불과하다(Beauty is Skin Deep)”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부 껍질이라는 가죽 부대 속에 실제로 일어나는 작용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에 대한 환상과 탐욕은 바로 사라지게 됩니다.

“내게는 믿음과 노력과 지혜가 있다. 어찌 삶의 집착을 말하는가. 몸과 피는 말라도 지혜와 하나된 마음은 더욱 편안할 것이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너의 첫째 마군은 욕망이요, 둘째는 혐오이며, 셋째는 굶주림이며, 넷째는 집착이다. 다섯째는 권태와 수면이고, 여섯째는 공포이고, 일곱째는 의심이며, 여덟째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이것들이 바로 너의 마군이다. 나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 굴욕적으로 사느니 싸우다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숫타니파타〉 中

인간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고질적 본성과 대면하였을 때, 태자는 위와 같이 ‘믿음·노력·지혜’라는 정진(精進)의 요소들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마군의 실체를 낱낱이 관찰합니다. 이러한 마군들은 사실상 태자가 수행하는 동안 줄곧 따라다닌 것으로 전합니다. “우리들은 너를 7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다. 하지만, 항상 조심하고 있는 정각자에게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마왕과 그의 권속들은 태자가 깨달음을 향해 용맹정진할 때, 그것을 방해했던 내면적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욕망의 화살, 스치기만 해도
팔상탱의 ‘수하항마상’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마군을 항복시키다’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이 화폭에는 태자가 바야흐로 부처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됩니다. ‘수하항마상’을 기점으로, 주인공은 부처님의 모습을 하고 있나 아닌가로 나뉘게 됩니다. 그 이전의 화폭들에는 태자 또는 수행자의 일반 속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 수하항마상 이후 화폭에는 부처님의 용모로 탈바꿈합니다.

수하항마상에서는 태자가 깨달음과 계합하였기에 몸에서 깨달음의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빛은 둥근 광배, 즉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묘사됩니다. 부처님으로서의 변신된 용모를 보자면, 머리 꼭대기에 육계가 불쑥 올라오고 계주(계珠)가 있고 또 미간에 백호를 갖추었습니다.

계주나 백호는 모두 둥근 구슬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여의주’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상입니다. 계주와 백호는 백회 차크라와 미간 차크라가 열려 우주의 정기(精氣)가 발산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몸 전체가 열려 신성한 근원적 에너지가 그대로 방출되는 현상은 광배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도상적 표현들은 모두 원형(圓形)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상(圓相) 또는 여의주는 불화 및 불교미술을 보는 데 있어, 핵심적인 도상입니다.

악마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도대체 악마란 무엇입니까?” 〈상윳따니까야〉에는 제자 라다비구가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악마란, 우리의 육체이고, 우리의 감각이고, 우리의 감정·의지·판단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방해하고 교란시키고 불안에 놓이게 한다, 그것이 바로 악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마다 일어나는 작용들입니다. 어느덧 홀연히 일어나 뱀이 몸을 감듯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꼼짝 못하게 교란시키고 있는 ‘오온(五蘊)의 작용’입니다.

그렇다면, 악마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마의 작용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정관(正觀)이다. 즉, 올바른 관찰이다!” 악마의 작용, 그 기·승·전·결을 놓치지 않고 보아야 휘말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휘말릴 때, “내게는 믿음, 노력, 지혜가 있다”라고 정진의 요소들을 스스로 일깨웠습니다.

순식간의 휘어 감는 작용에 속지 않고, 그것을 ‘보는 마음’ 또는 ‘아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 이것을 빨리어로 ‘삿띠(sati)’라고 하고 ‘알아차림’ 또는 ’마음챙김’이라고 합니다. 간화선에서는 무엇이 오든 “이뭣꼬”라고 화두를 들고 있으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지금 이 순간’ 지혜의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내가 ‘오온’이 되지 않고. ‘오온을 대상시하여’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오온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마음을 일깨워 그것에 적적성성하게 머무르는 것, 이것이 악마를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초기 경전류에는 악마 또는 마왕을 존재 본능적 욕망으로 까마(애욕), 아라띠(혐오), 꿉삐빠사(기갈), 땅하(갈애), 티나밋다(혼침수면), 비루(공포), 위찌낏차(의혹), 막카탐바(위선과 오만)의 8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내가 있다’라는 어리석은 착각인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비롯되는 집착의 현상들입니다. 존재한다고 착각하면서 존재는 존재를 위해 맹목적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악마는 나를 존재토록 구성하는 요소들입니다. 세세생생 윤회의 바탕에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성격은 무상(無常)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공(空)하다는 것을 알면 해탈이고, 본질적으로 유(有)라고 착각하면 고(苦)입니다. 무명(無明)에서 시작된 존재는 무명(無明)이기에 돌아갈 곳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무명은 자신 넘어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모릅니다. ‘아상(我相)으로서의 무명’과 ‘이것을 유지하려는 집착들’이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였습니다. 결국 악마라는 존재는 ‘이 몸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욕망’이었습니다.

이 같이 초기 불전류 속의 마왕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존재 본능적 현상과 욕망’으로 해설됩니다. 반면, 대승 불전류 속의 마왕이 등장하는 대목을 보면, 어마어마한 대 전접이 벌어지는 형국으로 이야기가 비유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서사시(敍事詩)의 방식으로 기술한 최초 경전인 〈붓다차리타(佛所行讚)〉와 이것보다 더 오래된 산스크리트어 전기인 〈랄리타비스타라(方廣大莊嚴經)〉를 보면, ‘마왕’과의 싸움이 큰 규모의 전쟁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즉, 신화적 구성을 가지고 전개되는데, 선(善)의 진영과 악(惡)의 진영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이에 대한 영웅적 물리침이 칭송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음의 순간을 영웅적 대서사시와 같은 극적인 세팅으로 풀어낸 것은, 아마도 고대 인도 베다시대 문학의 영향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붓다차리타〉에서는 마왕을 ‘오욕의 자재천왕(五欲自在王)’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탈을 방해하는 마왕의 정체가 ‘오욕(五欲)’임을 알 수 있다. 오욕은 재물욕·성욕·식욕·명예욕·수면욕 등의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주된 욕망을 말합니다. 이러한 오욕이 맹목적으로 스스로 존재하기에 ‘오욕자재’라고 합니다.

반면, 깨달음의 상태는 관(觀)이 자재(自在)한다고 해서 ‘관자재(觀自在)’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나오는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는 명칭은 깨어있는 마음, 반야지혜의 마음이 자유 자재로운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오욕’이 ‘자재’하느냐, ‘관’이 ‘자재’하느냐의 싸움입니다.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  hyunbulnews@hyunbul.com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