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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부르는 ‘문화공양주’ … “찬불가는 훌륭한 법문”자명 스님 (53·영덕 기원정사 주지)
서울 조계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사진촬영을 위해 법당 앞에 선 스님은 넉넉하게 두 팔을 벌려 찬불가 한 곡을 공양했다. 굴곡진 스님의 인생에서 힘이 된 것은 바로 불심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사찰서 출가의 길로 나선 자명 스님은 그만큼 더욱 간절하게 불교전법의 노래를 부른다.

“범부 중생의 소박한 삶 노래할 터”

공양, 참 좋은 일이다. 부처님은 물론이고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올린다는 것, 마음을 담아 전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일이다. 공양 중에 ‘음성공양’이 있다. 노래하는 스님, 찬불가 ‘영가전에’의 자명 스님은 음성공양을 본분사로 발원했다. ‘땡큐 붓다 콘서트’, ‘뮤지컬 니르바나’, ‘뮤ㆍ드ㆍ깨-한 웅큼의 빛’ 등 다양한 문화법석을 선보이고, 올해 다섯 번째 음반을 발표한 스님은 자신을 ‘문화공양주’라고 부른다.

슬픈 가족사와 위로가 되어준 불교

“아버님은 선천적으로 다리가 많이 불편하셨어요. 생계는 어머님의 몫이었죠. 행상으로 남편과 4남매를 책임져야 했죠.”

자명 스님은 마흔 살의 나이에 늦은 출가를 하는데, 스님의 불연은 힘겨운 가족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님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어머님이 세상을 옮긴다. 위암이었다. 3년 뒤, 모친의 세 번째 제사를 모신 다음 날, 아버님이 어머님을 따라간다. 그리고 이듬해, 큰 형이 아버님을 따라간다. 스님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다음해였다. 작은 형이 큰 형을 따라간다. 결혼한 누님은 다른 집안의 식구였고, 스님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어찌 한 가족이 그렇게 흩어질 수 있단 말인가. 쉽지 않은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스님은 홀로 됐다.

“대학을 간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 학교에 다니는 의미가 없었죠.”

깊은 방황이었다. 그때, 스님을 위로해 준 것이 불교였다. 불교의 ‘불’자도 몰랐던 스님이었다. 당시 스님이 다니던 마산고등학교에는 불교학생회가 있었다. 방황하는 스님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스님의 친한 선배가 방황하는 소년에게 부처님을 소개한 것이다.

“선배를 따라 불교학생회 법당에 갔어요. 부처님을 처음 보았죠. 그날부터 살 수 있었어요. 저녁예불 시간은 저에게 촛불 같았어요. 아버님이고 어머님이고 형님들이었어요. 예불문과 독경 소리가 가슴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뭔지도 모르면서 너무나 좋았어요.”

그랬다. 스님은 그날부터 불교에 기대고 살았다. 대학진학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던 스님은 수업시간에 아예 교과서 대신 불교교리와 불경을 읽었다. 스님은 체육대회, 교리퀴즈대회 등 불교학생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며 힘든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방황을 끝내고 세상 속으로

스님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복무를 마친 스님은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을 다시 꾼다.

방황은 끝이 났다. 소년도 끝이 났다. 스님은 대학에 진학한다. 고학이었다. 휴학과 복학이 거듭됐다. 하지만 스님은 고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스님은 그 시절을 ‘불꽃같은 시절’이라고 이야기 한다.

인생의 버팀목, 불교

고1때 양친과 형제 잃어

불교학생회서 힘듦 극복

대학 진학 후 고학의 길

불심으로 이겨내, 취업 성공

“남들은 그런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고학’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죠. 배를 타기도 했던 때는 꽤 긴 시간을 먼 곳에 있어야 했었죠. 저는 그런 시간을 고학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진 않아요. 저는 제 인생에서 그때처럼 자유롭고 불꽃처럼 살았던 시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젊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님은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을 밀어냈던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억대 연봉과 도의원 당선

“연봉 1억 2천.” 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선배의 권유로 보험회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스님은 신화를 이룬다. 연봉 1억 2천을 벌었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 최초의 억대 연봉이 1억 5백이었다. 스님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스님은 제대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스님의 길이 아니었다. 스님이 보험사에 입사한 지 4년이 되었을 때였다. 스님은 전혀 새로운, 아니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된 스님의 일을 만난다. 스님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다. 스님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제5대 경상남도 도의회 의원으로 당선된다.

“정치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출마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가 보기에 답답하여 농담처럼 던진 말이 씨가 됐어요. ‘선배가 안 하면 제가 해요!’라고 했더니 저보고 하라더군요.”

그랬다. 그 길로 스님은 그 길을 걷게 된다. 스님은 선거일을 한 달여 앞두고 출마했고, 짧은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당선됐다. 보험 영업을 하면서 쌓은 인적 기반이 도움이 되었다.

“그때,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가보다 생각했어요.”

스님은 그때 정치에 뜻을 세우고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스님은 이어진 선거에서 낙선을 거듭한다.

자명 스님의 앨범들. 찬불가를 녹음중인 자명 스님. 스님의 노래 속에는 인생의 애환이 담겨있다.

절처봉생(絶處逢生)

“징역 10월.” 그토록 쓰디 쓴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스님이었다. 그런 스님에게 세상은 아직도 차가웠다. 거듭된 낙선으로 인해 스님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삶은 접을 수 없는 것. 2002년, 스님은 출마 대신 다른 출마자의 선거캠프를 맡게 된다. 낙선은 했지만 스님이 가지고 있는 그 동안의 기반은 여러 모로 가치가 있었다. 그 가치를 알아본 선거캠프에서 스님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기획실장을 맡은 스님은 자신의 선거라고 생각하고 선거에 집중했다.

하지만 스님은 자신이 맡은 캠프의 ‘선거법 위반’이라는 죄명을 모조리 떠안고 수감된다. 스님의 죄명이 아니었지만 스님은 그 짐을 본인이 지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짐 속엔 결코 가볍지 않은 ‘시험’이 들어있었다. 어려운 ‘공부’가 들어있었다.

“전과가 없었기 때문에 선거캠프에서 적극적으로 저를 돕는다면 실형을 받고 복역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캠프측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스님은 모든 죄를 떠안고, 또한 낙선의 책임까지 모두 떠안은 채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어린 시절 홀로됐을 때보다 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옛날 세상으로부터 받은 절망은 슬프긴 했어도 아픈 일은 아니었는데, 인간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슬프면서 아팠어요. 한동안 그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까.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일이 새로운 길을 만나기 위한 계기라고 생각했죠.”

출소, 출가

출소. 2005년 1월 30일. 스님은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세상으로 나왔지만 세상은 차가웠다. 평소 친했던 스님의 선배가 스님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부처님을 만나게 한다. 마산 근교의 작은 절이었다.

“석 달만 살게 해 주십시오. 보시는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보시 대신 예불 올리고 공양 지어주시게.”

자명 스님은 누구보다 불교학생회 시절을 열심히 살았던 학생이었다. 스님에겐 <반야심경>과 <천수경>, 예불문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머리만 깎지 않았지 충분한 행자이고 공양주였다. 스님은 열심히 예불을 올리고 주지 스님의 공양을 지으며, 그 동안의 힘든 시간을 정리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두 달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스님의 마음속에서 문득 출가에 대한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었을까.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일 또한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주지 스님과 저녁공양을 할 때였다.

“자네는 머리 깎고 출가할 인연이야.”

자명 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명 스님은 밥상을 물린 자리에서 바로 머리를 깎았다. 마흔 살의 출가였다.

마침내 찾은 길, 노래(찬불가)

세월이 흘러 스님은 은사를 떠나 토굴을 짓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 스님은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포교당을 열고 출가자로서 전법에 진력했다. 하지만 스님의 마음처럼 포교당은 채워지지 않았다. 스님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 포교당의 법당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가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했다. 몸과 마음이 한 그릇에 담겨 있지 않았다. 수행자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었다. 스님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스승’을 만난다. 영경 스님이다.

자명 스님은?196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제5대 경상남도의회 도의원을 역임했고, 2005년 마산 혜천사에서 출가했다. 인천 영종불교회관 주지를 역임했고 현재는 영덕 기원정사 주지를 맡고 있다. 2012년 찬불가 음반 1집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을 발표했으며, 지금까지 총 5집 음반을 발표했다. 2013년부터 ‘땡큐 붓다 콘서트’ ‘뮤지컬 니르바나’ ‘뮤드깨-한 웅큼의 빛’ ‘날마다 하늘만큼 환히 웃으소서’ 등 매년 새로운 문화포교 프로젝트 공연을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2016년 제11회 대한민국찬불가요대상에서 1집 음반 타이틀곡 ‘영가전에’가 찬불가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불교로 인생 2모작

1995년 경남도의원 당선

2002년 선거법위반 실형

악연으로 정치 접고 방황

2005년 출소, 출가 길 나서

“사나이 대장부라면 칼끝의 꿀을 빨지 말아야 할 것이며, 수행자라면 마땅히 꿀단지조차 던져서 깨버려야 할 것이다.”

일갈이었다. 스승이 건넨 그 조용한 일구가 모든 질문의 답을 냈다.

스님이 흔들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속세의 때를 아직도 다 없애지 못한 것. 스승의 일갈은 그것이었다. 스님은 생각했다. 바라는 것 없이 마음을 다해 부처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그것은 ‘노래’였다. ‘자명’의 길은 노래였다. 스님이 힘들었던 고교시절 불교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면 불꽃처럼 살았던 스님의 대학시절을 위로했던 것은 음악이었다. ‘들국화’와 ‘시인과 촌장’이 들려주는 노래였다.

“‘삶’이 담긴 진솔한 그 노래들을 듣고 따라 부르다보면 노래가 삶을 위로했죠. 이제 불가의 옷을 입었으니, 중생을 위한 찬불가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문화법석을 열다

“영가시여 저희들이 일심으로 염불하니, 무명업장 소멸하고 반야지혜 드러내어 생사고해 벗어나서 해탈열반 성취하소서~♬”(자명 스님 1집 음반 중 ‘영가전에’ 중에서)

2012년 마침내 자명 스님은 찬불가 1집 음반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을 발표한다. 그리고 첫 무대. 스님은 인천 석화사 산사음악회에서 부처님의 노래를 부른다. 부처님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 힘겨운 세월을 지나온 것일까. 스님의 노래 속에선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진솔한 스님의 노래는 법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자명 스님의 음성포교는 시작됐다.

문화로 포교 새 전형 열다

스승 일갈에 본분사 찾아

2012년부터 음반 5집 발표

‘땡큐 붓다…’ ‘니르바나’ 선뵈

“부처님 가르침 있다면 수행”

스님은 본격적인 문화포교를 위해 2013년 영종불교회관을 열고 새로운 문화법석을 시도한다. 법문과 공연을 한 자리로 불러내 문화포교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땡큐 붓다 콘서트’가 그 시작이다. 새로운 개념의 법석이었다. 신선했다. 많은 대중을 부처님 가까이로 불러냈다.

“부처님의 고마운 마음을 문화에 담아서 회향하는 것이죠.”

스님은 새로운 법석을 그렇게 설명했다. 첫 해는 매달 콘서트를 열었다. 스폰서를 찾는 일이 힘겨웠지만 스님의 원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콘서트가 거듭되면서 스님은 생각했다. 법석을 좀 더 넓히고 새롭게 만들어 불교문화, 포교문화의 새로운 길을 열고 싶었다.

2014년 1월, 마산 3.15 아트센터에서 새로운 뮤지컬이 공연된다. 스님이 기획한 천도재 뮤지컬 ‘니르바나’다. 불교의 아름다운 장면과 음성으로 채워진 뮤지컬 ‘니르바나’는 500석의 대중을 울렸다. 뮤지컬 ‘니르바나’는 초연 이후 두 차례 더 공연했다. 스님은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포교를 생각했다. 2016년엔 ‘가족’을 테마로 하여, 역시 법문과 음악이 어우러진 문화법석 ‘날마다 하늘만큼 환히 웃으소서’를 공연했고, 2017년엔 십우도의 가르침을 ‘뮤직ㆍ드라마ㆍ깨달음(일명 뮤드깨)’이란 새로운 장르로 선보인 ‘뮤드깨-한 웅큼의 빛’을 서울과 부산 등 6대 도시에서 공연했다. 2018년 자명 스님의 문화프로젝트는 ‘다독다독, 쓰담쓰담, 토닥토닥’이다. 광주에서 쇼케이스 공연을 했다. 스님은 내년 정식 공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스님의 원력에 많은 후원이 있기를 기원한다.

스님은 음성포교 외에도 ‘170원의 생명나눔’과 ‘영덕 천천불광 공덕회’를 설립하여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스님은 올해 자신의 다섯 번째 음반 ‘저 나그네 구름을 벗 삼은 건’을 발표했다. 총 11곡이 수록된 이번 음반은 범부중생의 소박한 삶의 정서를 담았다.

“처음엔, ‘스님이 참선, 염불 않고 노래한다’고 싫은 소리도 참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공부라고 생각했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게 모두 공부였으니까요. 참선으로 얻을 수 있는 공부도 있고, 염불 일구가 해내는 불사가 분명 있지만 찬불가 한 소절에도 부처님은 계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만 들고 간다면 그 길이 어떤 길이든 모두 성불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조계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사진촬영을 위해 법당 앞에 선 스님은 넉넉하게 두 팔을 벌려 찬불가 한 곡을 공양했다.

2016년 1월 서울국립극장에서 진행된 날마다 하늘만큼 환히 웃으소서 공연 장면

 

박도일 수필가  doil30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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