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공덕이 되게끔 할 수 있는 거는 당신밖에 없노라

여래는 다 알고 본다고 했는데…

질문 금강경에 보면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느니라.”라는 글귀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안(五眼)으로써 우리 중생들을 다 보고 다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 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뿐만 아니라 일체 선지식들께서도 그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게 많은 분들은 과연 저희 불자들을 어떻게 이끌어 주고 계실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눈들이 다 보고 다 알고 있는 이 가운데에서 저희들은 어떤 마음 자세로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옛날에 ‘야, 저 사람은 꼭 죽을 사람이다. 이 사람은 꼭 망할 사람이다.’ 이렇게 마음이 들 때 내가 어떻게 생각했을 거 같습니까? 때로는 조심조심해서 그렇게 안 하고는 안 될 때 “정성 좀 들여요.” 이렇게 했고 또 그렇게 “정성 좀 들여요.” 했어도 그것을 커버해서 넘길 수 있는, 돌릴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죽을 사람, 망할 사람, 잘될 사람…. 다 이렇게 본다면 이건 선의 길이 아니에요. 그건 무꾸리쟁이나 할 일이지. 무꾸리쟁이도 다 알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오신통을 다 알아도 도가 아니니라.” 했던 것이 바로 그런 점에 있습니다. “다 보고 다 듣고 알아도 도가 아니니라.” 이랬어요. 그건 왜냐. 자유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갈 사람 저렇게 가게 하고, 저렇게 가는 사람 이렇게 가게 해서 이익을 줄 수 있는 자유권이 있어야 그것이 보살행이요, 그래야 바로 미해지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소립니다. 이게 칠활궁공법에 속하는 겁니다.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과거에 내가 나오기 이전에 업을 지은 게 있기 때문에 지금 현실에 이런 거니까. 안 오지는 않죠. 그러나 올 때 오더라도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거기에다가 맡겨 놔서 다시금 믹서기로 갈아서 다시 먹게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필요합니다.

‘회장이다’ 하는 이름이 회장이 아니라 이름 아닌 진실한 행을 하는 데서, 실천을 하는 데서 진실한 보살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 아닌 보살이 돼야 하고 회장 아닌 회장이 돼야 하고 이런 도리를 우리가 깨닫고 알고 자꾸자꾸 그렇게 양면을 다 ‘이것도 거기서 하는 거, 이것도 거기서 하는 거’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일임하고 생각을 돌려서, 이익하게 생각을 해서 거기다 놓는다면, 감사하게 또 놓는다면 이게 공부하는 데도, 나를 깨닫는 데도 지름길이 될 것이요, 남을 위해서도 봉사가 될 것이요, 또 보살행으로 실천이 될 것이요, 이게 모두에게 이익한 겁니다.

여러분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끌고 가고 끌고 오고, 또 내 이 심 안에 들어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 가고 이러는 겁니다, 지금. 심 안에 들어 있는 중생들은 이끌어 가면서, 타의의 중생들은 또 이끌어 오면서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이 그렇게 착한 일 또는 이익한 일, 모두가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는 좋은 일, 부드러운 말, 부드러운 행, 이익한 마음, 이런 거를 다 가지고 나가는 데는 얼음판에서 꺼질까 봐 한 발 한 발 아주 조심조심해서 딛고 나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도 안 보는 게 아닙니다. 우주 전체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서 ‘아유, 저거….’ 하고 그냥 가게 내버려 둡니다. 꺼지게 되면 그때 발을 들어 줍니다. 내려다보고 그렇게 기뻐하고, 모든 마음들이, 한마음이, 그냥 그 음파가 이 법계를, 우주 법계를 두루 하면서 꽃향기를 뿜는 격이다 이겁니다. 그러고는 ‘아유, 저거 잘 걸어가야 할 텐데, 잘 걸어가야 할 텐데….’ 모든 그 한마음 법계에서 그렇게 하고 계시다 이겁니다. 하나하나 하는 거를 허, 여러분이 아시기 때문에 그 아는 마음이 우주 법계에 직결돼 있다 이겁니다. 이 불기둥, 이 주인공 불기둥이 우주 법계와 연결돼 있고 직결돼 있다 이겁니다. 그리고 이 삼라만상의 모든 세상살이가 모두 인연줄에 얽히고설켜서 가설이 돼 있다는 얘깁니다, 보이지 않는 인연줄에.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하나 하는 걸 모른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뚜렷한 공부의 체험을 하고 싶어

질문 저는 이 마음공부를 해 온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눈이 멀고 귀가 트이지를 못해서 저의 삶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데도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을 역력하게 알아서 주위 도반들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일이나 주위 사람들의 문제를 근본 자리에 관하면 소리로 알려 준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분들처럼 뚜렷한 공부의 체험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그리고 제가 하는 공부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이 한마디, 짧은 말이지마는 똑똑히 들으세요. 공부하는 분들이 보는 걸 위주로 하고 듣는 걸 위주로 하고, 모두 그렇게 뚫어지게 꿰뚫어서 보는 거를 아주 위주로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원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공부를 할 때에 “보는 것도 놔라. 듣는 것도 마음에 놔라.” 이러는 원인은 대자비의, 만법의 기능을 가진 그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는 소소한 거를 놔야 된다는 얘깁니다. 보는 거, 듣는 거,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거, 요런 거를 다 놓음으로써, 즉 말하자면 안 되는 거 되는 거, 요건 요렇게 돼 있고 요건 요렇게 돼 있고, 팔자는 요렇게 돼 있고 죄는 요렇게 지어져 있고, 요런 문제들을 갖다 놓고 볼 때에, 그러면 그걸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요건 죄를 요렇게 지었으니까 요렇게 받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것은 자기네들이 해 놓은 거니까 꼭 자기네들이 받아야만 할 겁니다, 아마. 자기네들이 5년 징역을 받았으면 5년 징역을 살아야만 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놔라. 꿰뚫어 보는 거까지도 다 놔라. 꿰뚫어 보려고 하는 마음까지도 놔라.” 이런 것은 5년 징역을 받을 팔자도, 징역을 안 받는 것도 묵살해 놓고 자유권을 갖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팔자 운명이 붙지 않는 자리니라. 부처님 자리에는 어디의 뭐든지, 일체 만법의 근원에는 닥치는 대로 타 버리느니라.” 이런 문제가 붙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거를 다 놓으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고, 남들은 꿰뚫어 본다는데, 남은 벌써 다 안다는데….’ 아, 이거를 원하거든. 자기에게는 그런 게 외려 없어야 된단 말입니다. 왜? 그런 것이 오는데도,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다 알아도 희미하게 알든 꿰뚫어 보게 알든 그것은 놔야 됩니다. 우리는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 지금 공부하는 거지, 가는 길에 이것이 보인다고 해서 이거 참섭하러 가는 게 아니네요. 얘기했죠? 가는 길에, 이게 우리가 지금 이 물이 있고 여기 흙이 있고 이런 거를 보고 듣고 이렇게 끄달리러 가는 게 아닙니다. 곧바로 지금 가서, ‘이것이 있다’ 할지라도 없게 할 수도 있고 있게 할 수도 있는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어찌 보는 거나 듣는 거나 이걸 위주로 해서 가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재차 당부할 것은,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꿰뚫어 보고 또 알고 이런 것을 원하지 마세요. 왜? 그걸 꿰뚫어 보면 “넌 팔자가 이렇다. 너는 운명이 이렇다.” 이럴 수 있는 겁니다. “너는 요런 죄를 지었으니까 이렇다. 너는 요런 죄를 지었으니까 이렇고 너는 죄가 없다. 너는 죄가 있다.” 요런 것을 판단을 할 수 있는 판사밖엔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놓는다면, 여기 이 눈으로다가 자꾸 오지 않고 마음으로 들게 하는 것은 요런 소소한 거를 보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왜? 이 팔자 운명이 이렇게 됐다 하더라도 내가 자유대로 ‘이건 팔자가 없다.’ 하면 없는 겁니다. ‘운명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 하면 않은 거예요. ‘넌 잘 살겠다.’ 하면 잘 사는 겁니다. 그렇게 자유권을 가지려고 우리가 공부하는 건데 왜 거기에 끄달리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를 잘 생각하셔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시면서 모든 것을 놓고 돌아가는 거를 아셔야 합니다.

 

예불에 임하는 마음 자세

질문 함께 공부해 나가는 도반들과 담선을 하는 도중에 예불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법우가 내 마음 안에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는데 밖에 있는 부처님께 예를 올리기 위해 굳이 예불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한편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나를 비우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 또 다른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불에 임하는 마음 자세와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공부해 나가는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가 예불을 모시는 게 그냥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항상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예불을 마치고 점심 사시마지를 올리고 저녁 예불을 마칩니다. 그것도 이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생각해서 우리가 아침은 과거고 점심은 현실이고 저녁은 미래로 따져도 됩니다. 그것을 한데 합쳐서 삼심을 일심으로 두고서, 아침에 하든지 점심에 하든지 저녁에 하든지 이렇게 열심히, ‘한마음 공덕이 있게 해 주시라’가 아니라, ‘한마음 공덕이 되게끔 할 수 있는 거는 당신밖에 없노라’고 이렇게 예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불 모시는 데에 어떤 사람은 내 한마음에서 하라니까 뭐, ‘한마음에서 하면 됐지. 주인공만 찾으면 됐지.’ 이러고선 법당에 안 들어가는 이치가 많습니다. 그거를 수차적으로 생각을 해 봐요. 그런데 꼬박꼬박 아침 점심 저녁은 잘들 잡수시더군요. 어때요?

이 정성이면, 이 마음을 스님네들이 내면 온 누리의 일체 보이는 생명이나 보이지 않는 생명이나 모두 한마음이 돼서 운집하는 그런 시간이거든요. 우리가 시간을 정망해 놓고 하지를 않고 그냥 삼세의 뜻을 한마음으로 쥐고 아침에 하든, 점심에 하든, 저녁에 하든 이렇게 같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를 가도 한마음이요, 여길 와도 한마음이요, 집엘 가도 한마음이요, 한마음은 다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스님네들이 한마음을 내서 할 때는 같이 기울여서 하는 것이, 백지장도 마주 들어야 쉽다. 하다못해 창호지를 발라도 그렇고 도배를 해도 그렇고 혼자서는 어렵다. 바르는 놈이 있으면 붙이는 놈이 있고 붙이는 놈이 있으면 바르는 놈이 있고 이렇듯이 우리가 그렇게 해 나가야 된다.

그러면 예불을 모시는 사람이 있다면 예불에 대해서 한마음이 돼서 같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참 신심이 돋아지고 스님들의 마음도 ‘아유, 저 사람네들, 저분들….’ 이렇게 신심이 생길 거 아닙니까? 그런데 ‘너 중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저 이 주인공만 찾으면 된다니까….’ 이거는 개별적인 마음이지 포괄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세 가지 지켜야 하는 예절이 있습니다. 부처님 앞에 가서 모두가 삼정례를 깍듯이 하는 것은 부처님도 내 한마음 속에 계시니까, 바로 부처님의 뜻과 법과 행과 같이 한마음이 된다는 뜻에서 삼정례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촛불을 켜 놓는 것은 바로 우리 산 사람들의 마음을 말하고 향을 켜 놓는 것은 영령들의 양식을 말하고, 또는 공양미를 해 놓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한 그릇을 놓고 중생들을 다 먹이는 태양과 같고, 다 먹이고도 되남는 그런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생각을 하고, 얼른 쉽게 말해서 ‘나는 뭐, 법당에 안 가도 되지.’ 이런 생각은 버리셔야 될 겁니다. 부처님도, 이게 알고 보면 형상도 자기요, 마음도 자기요, 생명도 자기요, 모두가 자기 아님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도 나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요, 내 뜻에 있는 것이요,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왔으면 벌써 예를 지켜야 하겠기에 법당에 올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앞에 닥친 거를 마다하고, 뿌리치고 도망가는 거나 같습니다. 항상, 앞에 오는 거를 막지 말고 싫다 하지 말고 가는 거를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지혜가 모두 턱 터져서, 사방이 툭 터지고 지붕이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대인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싫다, 저것은 좋다’, ‘이것은 좋다, 이것은 언짢다’ 하는 것을 떠나라 하는 것은 항상 다가오는 거를 마다하지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고 이러라 이런 것입니다. 유도리가 있어야죠, 사람이. 그게 지혜입니다. 그냥 바늘을 저 벽에다 꽂으면 꽂는 대로 빼면 빼는 대로 이래서는 유도리가 없어서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빼는 건 빼는 거고 끼는 건 끼는 거지, 뭐.” 요렇게 한다면 그거는 유(有)의 물질세계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마는 무(無)의 세계와 유의 세계가 합쳐서 작용을 하는 데는 맞지 않습니다.

법당에도 좀 유도리가 있게, 예불 모실 때는 반드시,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같이 한마음으로서 하는 겁니다. 형상인 부처님께도 우리 마음들이 거기다가 예배를 올리고, 거기다가 부처님이라는 그 생각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의 그 부처님의 마음도 역시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서 얘기하자면 여러분의 혼백이 다, 그 마음들이 한마음으로 돼서 부처님이라고 섬기는 그 모습에 운집이 돼 있다 이겁니다, 전부. 그러니 그 또한 여러분의 형상이요, 여러분의 마음이요, 여러분의 생명 아니겠습니까? 형상이라고만 보기 이전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꼭 그 예절을, 예전에는 삼정례는 물론이거니와 일곱 발자국을 뒷걸음을 쳐서 돌아서서 나왔다 이겁니다. 그렇게 그 안정된 마음으로 지극한 그 행동을 하는 겁니다. 누가 그럭하라, 말라 이래서 그런 게 아니라. 지극한 예절이죠.

그리고 법당에서는 누가 향을 먼저 꽂았느니 나중 꽂았느니 이런 거를 탓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불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불과 그 촛불과 바로 연결되는 겁니다. 마음의 불이 있고 그 불이 있는 것이지, 내가 있고 내가 정성을 들이니까 그 불도 있는 것이지 내가 없고 불이 어딨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의 정성이라면 남이 켜 놨어도 그거를 또다시 켜고 그러면서 싸우지 마시라 이겁니다, 마음으로 흠집 가게. 또 ‘아이구, 내가 켜 놔야지.’ 하더라도 아, 기다리고 있다가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유, 그 불이 그 불이고 그 불이 그 불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그저 밝은 태양이, 우리 이 세계에, 지구에 비춰 주는 이 태양은 바로 우리의 한마음에 하나뿐이지.’ 하고서 불 하나를 켜 놨다 하더라도 전체 그 불 하나로써 신도님들의 전체 마음을 밝혀 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 소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거기에만 부처님이 계신 줄 알고 애를 쓰지 마시고요. 옛날에 부처님을 모셔 놨더니 온통 거기 매달려서 뭐 야단법석이니 이 마음공부 시키기에는 너무나 어렵더라고요. 여북하면 그 부처님을, 불상을 내려다가 마당에다 놓고 도끼로 찍었겠습니까? 마음 떠나서는 부처도 없다 이겁니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여러분을 여기까지 이끌고 오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모두 없애 보기도 하고, 일원상을 해 놔 보기도 하고, 부처님을 모셔 놓아 보기도 하고, 모셔 놨다 또 부수기도 하고, 허허, 이렇게 노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걸 못 보걸랑은 자기 형상부터 보시고 자기 마음부터 한번 뒤돌아보시고 자기 행동하는 거를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러면 부처님이 밝게 보일 겁니다. 말만 잘 들어서, 앵무새처럼 말 잘하라고 말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말을 하더라도 듣는 게 없이 들어라 이겁니다. 왜냐하면 내 뿌리를 바탕으로 두고서 들어야 듣는 것이지, 함이 없이, 들음이 없이 듣는 것이지 뿌리를 망각하고 듣는 것은 그냥 바람결같이 지나가는 것이고 이론에 그냥 접하는 얘깁니다. 말만 잘해서 실천에 옮겨지는 게 아닙니다. 말보다도 실천이 더 먼저입니다.

그러니 예불 정례 똑바로 잘하시고요. 절에 오는 분이 예불 정도도 모른대서야 그거 말이나 됩니까? 허허. 그러니까 예의법도 법은 법이니까 제일 중요한 게 ‘법당에 들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 이런 거를 좀 잘 정돈해서, 좀 펼치고 크게 생각해서, 여기 와도 예불 모실 때는 반드시 들어가서 같이 한다는 거, 그것은 잊지 마십시오.

 

앞으로의 지구의 장래에 대해서

질문 제가 드릴 질문은 지구의 장래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 지구의 모든 현실을 지켜볼 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중환자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인구 폭발 문제라든지 물 부족, 식량 부족, 이상기후, 양 극점의 얼음 녹는 문제, 지진 발생, 오존층 파괴, 자원 고갈, 산소 부족 등등 많은 중증을 앓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 인과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지구의 장래에 대해서, 또한 지구를 보호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수행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이것을 학술적으로, 지식적으로 배운다면 갈래, 가장구, 가장구 이렇게 벌여서 이름도 알아야 하고 모든 걸 배워야 하지만, 이건 참선입니다. 선에서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모든 거를 한데, 이거 공부할 때도 한군데로, 내면 한군데로 모아서 놔라 이런 뜻입니다. 모아서 놓지 않아도 한군데다 놓으니까 모아지죠? 한군데로 놓으면은 모아지듯이 모두 일체 돌아가는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서 나오는가. 예를 들어서 천차만별의 일들을, 그것을 이름으로 어떻게 지어서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일체 일거수일투족을 다 한마음에 집어넣으면, 거기에서만이 일체가 모두 돌아갑니다.

항상 누적되지 않게, 겁내지 말고 모든 거를 거기다 놓으라 그랬죠.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으면은 그냥 모두가 움죽거리게 된다고요. 그래서 움죽거리는 것만이 또 능사가 아니라 안 움죽거리는 것도 움죽거리는 것도 똑같다. 이것을 해 나가려면 잠시라도 찰나찰나 이렇게 안 움죽거리게 할 수 있어야만이 움죽거리게 할 수 있죠.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이어지면서, 즉 말하자면 이어지면서 한 바퀴 돌아서 이어지는 겁니다. 또 미래도 한 바퀴 돌아서 미래가 이어지고 하기 때문에 그거를 과거도 현실로 미래도 현실로, 일초 전 일초 후 이렇게 생각하시면 아주 간단할 겁니다. 그래서 삼세를 이게 둘 아니게 넘어갈 수 있어야만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그냥 한군데 하나로 생각할 수 있고 그런데 하나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둘 셋으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한군데로 하나로 뭉쳐서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어디서 벌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천차만별의 것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어떠한 용도가 생긴다,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할 때에 그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젭니다. 그러니까 모두 여러분들이 이것은 제각기 놓고 제각기 배우는 게 아니라 무조건 자기 불성인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기만 하면 모두가 앞서 입력된 건 다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되는 것이 현실로 나오게 돼 있다. 나오게 돼 있는 그 원력이 바로 그 모두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이 나온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군인이 전진을 하다가 후퇴를 해야 하기도 하고 후퇴를 했다가 전진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퇴하는 것도 전진하는 것도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거죠. 이거는 말로 우리가 말만 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한다면 내면에서 자기의 뜻이, 이렇게 가르치는 뜻이, 길잡이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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