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네 마디의 말

사람의 말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적이 있다. 사람이 인간적이 되었을 때 말도 더불어 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상사가 개원하는 날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오시고, 덕 높은 여러 스님들이 오셨다. 극락전 앞에 단이 마련되었고, 단 좌우로는 자칭 타칭 내외귀빈들이 앉았다. 나는 마당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도 앉지 못하고 극락전 마당 끝에서 까치발을 한 채 단상을 주시했다.

총무원장 스님은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과정을 길게 이야기한 뒤 길상사의 개원을 격려하는 축사를 웅변조로 했다. 한두 분의 축사가 더 이어지자 단하의 사람들이 좀 지루해 했다. 그때 고급요정 대원각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개원케 한 김영한 여사가 단에 올랐다. 한복을 입은 여사의 체구는 작았다. 여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귀를 기울였다. 여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이 서투른 듯했다. 어쩌면 부끄러워서 그런 듯도 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여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불교를 모른다고 고백하는 말이 아름답게 들렸다.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를 모시게 돼서 한없이 기쁩니다./ 제 소원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었던 저 팔각정에 종을 달아 힘껏 쳐보는 것입니다.”

일러스트 정윤경.

그녀의 말은 단 네 마디였다. ‘나는 죄가 많다. 나는 불교를 모른다. 나는 부처를 모시게 돼 기쁘다. 나는 힘껏 종을 치고 싶다.’ 경내를 가득 메운 수천 명의 가슴을 적셨던 여사의 자기고백과 원(願)이었다.

그때 법정 스님께서는 여사의 목에 염주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길상화란 법명을 주었다. 스님이 여사에게 보답한 것은 그뿐이었다. 길상사가 개원한 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여사에게 “1천억 원 대의 재산을 기부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재산은 그 사람 백석(白石)의 시 한 줄만도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개원법회 날부터 2년 뒤, 여사는 길상사를 찾아와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 내리는 날 경내에 뿌려주세요”라고 유언하고는 다음 날 눈을 감았다며 당시 주지였던 C스님이 내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생생하다. C스님은 여사의 소원대로 팔각정에 종을 달아 범종각으로 만들었고, 눈이 내린 날 여사의 유언대로 뼛가루를 경내 뜰에 뿌려주었다고 덧붙였다.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여사는 일제강점기 때 여창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래서 죄가 많다고 했을까. 그래서 종을 달아 힘껏 쳐보고 싶다고 했을까. 길상화 보살이야말로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참으로 자기답게 살고 자기답게 죽은 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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