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의 용문석굴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대노사나상감’, 일명 ‘봉선사동’의 모습. 폭 약33m, 깊이 약40m, 높이 약35m의 대작으로 주존 대노사나불은 크기 약17m이고 귀의 길이만 해도 일반 성인의 키 보다 크다. 당 황실의 발원으로 조성됐으며, 주존의 모습이 당시 황후였던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거대한 바위산, 불심(佛心)은 바위를 파 집을 짓게 했다. 산자락은 벌집처럼 크고 작은 굴로 가득 찼다. 석굴은 동서 양쪽 산자락에 1,352군데를 헤아리게 했다. 불상은 대소 약 14만 기 이상이다. 석굴 조성에 따른 조상기(造像記)도 많이 남아 있다. 불상은 아미타불이 2백기 이상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관세음보살, 석가모니, 미륵불, 지장보살, 약사여래 등의 순서로 많다. 낙양(洛陽, 뤄양)의 용문(龍門, 룽먼)석굴을 두고 일컫는 것이다.

1988년 이래 나는 용문석굴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입구까지 평지여서 자동차로 쉽게 진입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갈 때 마다 관광객 숫자가 늘었다. 낙양은 인근 서안(西安)과 함께 중국 관광 1번지라 할 수 있다.

양 산자락에 1352곳 석굴 조성
불상 14만기 이상 봉안된 聖地
당 황실 발원한 ‘봉선사동’ 유명
주존 모델 측천무후라는 속설도
신라 승려 수행했던 석굴 존재

어느 해 봄인가, 낙양에 갔다. 도시 곳곳이 모란꽃으로 가득했다. 낙양시의 상징 꽃이 모란이라 했다. 모란이라면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 아닌가. 조선시대 말기의 많고도 많은 화조화 가운데 제일 많이 그려진 꽃이 바로 모란이었다. 모란 병풍은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사랑을 받았다. 주로 결혼식 때 배경으로 모란병풍을 사용했지만, 더러 장례식 때도 사용했다. 모란 꽃밭 낙양, 나는 낙양을 거닐면서 선덕여왕의 모란꽃 일화를 생각했다.

당나라 황제가 신라의 여왕에게 보냈다는 모란 그림과 꽃씨.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씨를 심었으나 꽃에 향기가 없었다고 했다. 선덕여왕은 이를 보고 당 나라 황제가 여왕이면서 독신인 자신을 야유한 것으로 이해했다. 모란에 나비를 그리지 않아서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나비는 80세를 의미하는 단어의 발음과 같아 모란과 나비는 함께 그리지 않는다. 100세 시대를 미리 예견했나 보다. 사실 향기 없는 꽃은 없다. 중국과 선덕여왕의 독화(讀畵) 코드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아무튼 낙양은 모란의 도시이다. 그렇다면, 낙양은 부귀의 도시인가.

 낙양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고도(古都)이다. 북쪽에 북망산이 있고, 여기에 공동묘지가 있다. 그래서 ‘북망산 간다’라고 하면 죽음을 의미했다. 북망산 너머에 황하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실크로드와 겹쳐진다. 용문석굴은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곁의 낙양에 있다. 낙양의 문화적 위상은 ‘낙양의 종이 값’이라는 말로 짐작할 수 있다. 낙양의 종이 값은 베스트셀러 책을 의미한다.

제지술을 완성한 채륜이 이 지역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이 인류문명 발달사에서 종이의 역할은 위대했다. 이집트 나일 강변의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는 엄격한 의미의 종이가 아니다. 비록 영어의 페이퍼가 파피루스에서 나온 단어라 해도, 펄프의 종이는 아니다. 유럽지역보다 거의 1천년이나 앞서 만들었던 동북아시아의 종이, 이런 종이를 만들었던 지역이 낙양이었다는 점, 흥미롭다.

한 가지 팁을 준다면, 채륜의 본래 직업은 환관(宦官) 즉 내시였다. 부부생활을 할 수 없었던 환관의 종이 발명이라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외롭고도 긴 밤의 결과물일까. 중국 역사상, 역사를 움직인 2명의 환관이 있다. 하나는 채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화(鄭和)이다. 그는 아프리카 등 바다를 누빈 항해술의 대탐험가였다.

낙양에 백마사(白馬寺)가 있다. 중국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졌다. 낙양불교라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 낙양에서 남쪽으로 12km 쯤의 이하(伊河) 산자락에 용문석굴이 있다. 용문은 운강, 막고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유명하다.

육조의 북위(386~536) 시대부터 약 4백년간 조성했다. 물론 용문석굴은 당 시대인 7세기에 절정을 이룬 바, 특히 125년간(630~755)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니까 용문석굴의 30%는 북위시대 조성이라면, 60% 정도는 당 시대의 것이다. 7세기 후반 당 시대의 불교조각은 화려한 꽃을 피웠다. 고종과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비롯 왕실 등의 적극 지원도 한몫했다. 그야말로 화려한 당 문화의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조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고, 용문석굴도 그런 사례의 하나였다.

고양동(古陽洞) 석굴은 용문석굴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숫자와 더불어 내용도 풍요롭다. 높이 11m 정도의 이 석굴은 효문제가 조성한 것으로 삼존불상을 봉안했다. 방형대좌에 앉은 석가모니불이 주존이다. 여기에 조상기(造像記)가 있고, 공양인 행렬도 있는데, 황실로부터 관리, 승려 등 다양하다. 시주를 한 공양인의 모습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빈양동(賓陽洞) 석굴은 원래 310척 규모로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6년 동안 공사를 했는데도 겨우 23장(丈) 정도의 공사 진척도를 보였다. 한마디로 난공사였다. 그러니까 용문석굴의 바위는 운강석굴과 비교하여 견고한 석질이었음을 알려준다. 운강보다 공사하기 어려웠던 용문. 그러나 아름다움은 운강보다 위에 있으면 있지, 떨어지지 않는다. 불심의 결과인가. 어쩌면 시대정신의 결합인가. 바위산을 파 석굴 조성하기. 용문석굴을 거닐면서 새삼 음미하게 된다.

용문석굴의 대표작은 정식명칭으로 ‘대노사나상감(大盧舍那像龕)’이다. 일반적으로 봉선사동(奉先寺洞)이라고 부른다. 규모는 폭 약33m, 깊이 약40m, 높이 약35m이다. 주존 대노사나불은 크기 약17m이고 귀의 길이만 해도 성인의 키 보다 크다. 거대한 불상이다. 불경스런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다. 중국의 비너스라고 극찬해도 괜찮을까. 어쩌면 그토록 불상의 상호가 아름다운 여성과 같을까. 동그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그러면서도 단아하고도 밝은 표정은 눈길을 뗄 수 없게 한다. ‘미스 당(唐)’을 모델로 했을까.

현종(玄宗) 시절 722년에 새긴 기록은 흥미롭다. 대당 고종 황제가 창건한 것으로 ‘함형 3년 임신년 4월 1일 황후 무씨가 지분전 2만관을 희사했고, 칙령을 받들어 대봉선사를 완공했다(675)는 것. 그러니까 봉선사동은 측천무후의 지분전 즉 화장품 구입비 (물경 2만관!) 시주로 당대 최고의 고승과 장인들이 참여하여 3년 만에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 내용의 신뢰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황실 발원이라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거기다 측천무후와 관련도 그렇다.

봉선사동 주존불의 여성적 상호. 그렇지 않아도 실제 모델이 측천무후라는 속설도 있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성 황제였다. 사생활이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여걸이기도 했다. 정말 봉선사동 본존상은 바로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을까. 방액광두(方額廣頭)했다는 인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근거는 없다.
측천무후라는 여걸. 그는 무씨(武氏) 집안 출신으로 신심 깊은 불자였다. 권력을 잡은 그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활용했다. 도교를 제치고 불교를 국교처럼 높였다. 여성 천하제일, 하지만 이는 중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었다.

측천무후의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제(女帝) 출현을 예언하는 저술도 나왔다. 대표적 저술이 〈대운경소(大雲經疏)〉이다. 스타인 수집 영국박물관 소장의 위 책에 의하면, 측천무후는 미륵의 화신이라고 떠받들어 있다. 찬탈한 권력에 대한 정당성 논리의 확보였다. 미륵하생이라, 이는 엄청난 의미 부여였다. 여황제에 대한 불교식 논리 제공이었다. 고려 말 궁예가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칭했던 일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미륵은 희망의 미래불이지 않은가.

그러면서 측천무후는 〈화엄경〉을 중시 여겼고, 또 화엄종의 비중을 높였다. 이에 화엄경 번역 등 법장(法藏) 스님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새로운 권력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다. 화엄종은 측천무후의 몰락과 더불어 시들었는 바, 시사하는 바 크다.

봉선사동에 대한 언급이 너무 길었다. 아무리 용문석굴의 대표격 걸작이라 해도 그렇다. 아니, 그렇지 않다. 당 시대의 불교와 더불어 불교미술의 발전상은 어떤 시각에서 보아도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의 흥성기. 이는 여러모로 연구의 대상이 된다. 당 문화는 신라문화와도 직결되어, 결과적으로 토함산 석굴암을 염두에 두게 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용문석굴을 거닌다. 갈 때 마다 꼭 들리는 조그만 석굴이 있다. 바로 신라 수행승의 집이다. 거기 석굴 머리에 문패(?)가 있다. 바로 ‘신라상감(新羅像龕)’이다.

신라상감은 놀라움의 현장이다. 경선사(敬善寺) 남쪽 길 부근에 위치한 조그만 굴이다. 높이 1.9m이지만 폭과 깊이 역시 비슷하다. 이 굴의 위에 ‘신라상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측천무후 시기 전후의 작품으로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신라의 어떤 유학승이 이곳에 와 석굴을 파고 수행했을까.

하기야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 등 몇몇 신라 스님이 이 지역에서 살기도 했다. 물론 숱한 신라 승려들이 당 유학을 체험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용문석굴에서도 수행했을 것이다. 또 그런 가운데 누구는 적극적으로 석굴을 만들어 자신의 발원을 담아냈을 것이다.

신라상감! 거룩한 공간이다. 조그만 석굴 안에 내 몸을 구겨 넣어보려다 불경스러운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대신 삼배를 했다. 불행한 것은 석굴 전면에 삼존상 흔적은 있으나, 현재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누가 부조상을 훔쳐 갔을까. 아쉽다. 용문석굴은 신라 수행승 이외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다수의 외국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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