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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포교 한 길… BBS·BTN 개국 주역2017 불교언론인상 수상한 이태행 방송인 (72·前 BTN 방송본부장)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얼마 전, 우리는 활자와 전파의 힘이 어떤 것인지 깊게 체험한 바 있다. 그러므로 불교 미디어 하나가 태어나고 길러지는 것은 소중한 불사다. 그 귀한 불사 중에는 BBS와 BTN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두 불사에 남다른 감회를 갖는 이가 있다. 두 방송사의 사원 번호 ‘1’, 이태행 씨다. 그는 두 방송사 탄생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또한 일구는 일에 오랜 세월 헌신했다. 그 공로로 그는 2017년 불교언론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도일 수필가 doil3012@daum.net

이태행 씨는?1945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1967년 조선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그 해 KBS에 입사하여 1987년까지 문화부 차장, 문화과학부장, 기획보도부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88올림픽조직위원회 공연기획관으로 일했으며, 1989년부터 1994년까지 BBS 불교방송에서 편성제작국장, 기획실장, 보도국장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BTN 불교텔레비전에서 편성제작국장, 방송본부장을 역임했다. 작품으로는 다큐멘터리 ‘신라의 신비’, ‘신왕오천축국전’ 등이 있으며, 1981년 한국방송대상 최우수작품상과 2017년 불교언론인상을 수상했다.

방송 최초 범종소리 시보 시도

BBS 첫 전파 타고 개국 알려

BBS·BTN 양방송사 사원번호 1

BBS·BTN 개국 중추역할

 

불교 영상의 새장 열다

‘새벽예불’ ‘한국의 명찰’ 등

불교 영상미학 사회에 선보여

KBS ‘신라의 신비’ 한국방송대상

범종 소리로 시보 알리다…BBS 첫 전파

 

1990년 5월 1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BBS 불교방송입니다.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BBS 불교방송이 5시를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정각에 맞추어 범종 소리가 들려온다. 일반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전 세계 어느 방송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시보 시그널이다. 법음 가득한 범종 소리가 아침을 기다리는 온 사바에 울려 퍼진다. BBS 불교방송의 개국을 알리는 첫 전파였다. 전무후무한 시보 시그널이었다. 방송계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훗날 일본 방송사에서 취재를 했을 정도였다. 기획적인 부분도 획기적이었으며,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은 제작이었다. BBS 불교방송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범종 소리 시보는 당시 BBS 불교방송 개국 준비팀을 이끌고 있었던 이태행 기획실장의 작품이다.

“그 때의 감격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찰에서 어쩌다 듣는 범종 소리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묵직해지는데, 개국의 첫 전파를 타고 온 세상으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의 감흥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죠. 온 세상이 불국토가 된 느낌이었어요. 범종 소리로 시보 시그널을 만들고 나서 첫 전파를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그 날 그 순간은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가슴 벅찼던 날 중의 하루였어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이 씨는 그 시각 고속도로에 있었다. 여주에서 문막을 지날 때였다. 이 씨는 시계를 보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라디오의 주파수를 101.9에 맞추고 자신이 제작한 범종 소리 시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BBS의 첫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범종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범종 소리에 앞서 나오는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슬로건도 그의 작품이다.

1990.5.1. 의현 스님이 이태행 편성제작국장에게 BBS 개국공로패를 수여하고있다.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BBS 불교방송은 부처님의 법음을 전파하여 중생의 보살화, 사회의 정토화를 추구하고 민족의 통일과 조국의 참된 발전을 기하며 나아가 새로운 인류문명창조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90년 5월 1일, 조계종 등 여러 종단과 대한불교진흥원을 비롯한 불교단체, 그리고 2천만 불자의 원력과 보시로 태어났다. 지상파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하여 2008년부터는 BBS TV로 영상포교를 시작, 불교종합미디어로 면모를 새롭게 하여 방송포교의 원력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 다보빌딩 사무실에는 제 책상 하나가 전부였죠. BBS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사원번호 1, 이태행. 이 씨는 1989년 BBS 불교방송 준비팀을 만들고 개국을 준비한다. 준비팀 기획실장을 맡은 그는 자금모금, 직원채용, 방송편성 등 개국에 필요한 전반을 기획하고 만들어간다.

설립자금 모금을 위해 전국의 사찰을 찾아 모금 법회를 열었다. 여러 종단과 단체, 불자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법회에 동참해 모금을 도왔다. 긴 여정이었다. 8개월 동안 40억이 모였다.

직원채용과 진행자 섭외도 꼼꼼하게 진행했다. 특히 진행자 섭외는 중요한 문제였다. 불교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방송사다. 2천만 불자의 포교 원력이 만들어낸 불사다. 진정한 포교의 목표는 비불자라고 생각한 이 씨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그들을 불법에 귀 기울이게 할 수 있는 방송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프로그램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청취자의 귀를 두드려야 하는 진행자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는 불교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불교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고, 불교를 외치지 않아도 불교를 바라보게 할 수 있는 방송을 하고 싶었다.

하루에 한 명이라도 불법에 눈 뜨게 하는 것이 BBS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스친 방송이 무명의 대중을 부처님 곁으로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간대별로 알맞은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아직 불법과 멀리 있는 이들의 귀와 마음을 두드리고 싶었다.

모든 프로그램의 제목에서 영문을 걷어내고 불법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 한글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어려운 불교용어와 자칫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내용들을 최대한 걷어내 일반 청취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향했다.

이 씨의 생각들은 결실로 돌아왔다. 청취율 2.6%~2.8%. 예상했던 수치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앞서 출발했던 타종교의 방송사보다 높은 수치였다.

BBS는 예상보다 높은 청취율에 힘입어 개국 첫 달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이것 역시 적자를 각오했던 방송사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수치상의 결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BBS 프로그램인 ‘김광석의 한 밤의 음악편지’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 시간 김광석 씨의 지인인 모 유명 가수가 차 안에서 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침 방송국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그 가수는 BBS에 차를 세우고 곧바로 김광석을 찾아갔다.

“그 때 그 가수는 불교방송이 이런 방송인지 몰랐다며, 불교가 이런 종교인지 몰랐다며, 김광석의 목소리에 끌려 방송국을 찾았다고 했어요.”

그 외에도 방송을 들으며 방송국 앞을 지나다 방송에 이끌려 방송국을 찾은 유명인들과 불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많은 보람과 희열을 경험했죠.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이라는 슬로건이 떠올랐던 순간이었어요.”

 

1994.10. 태응 스님이 이태행 씨에게 BTN 방송본부장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불교 ‘깨침의 소리’ 전하는데 인생 역주

다시 사원번호 ‘1’… 이번엔 BTN

1995년 3월 1일,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방송사가 탄생한다. 이번엔 텔레비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양한 불교전통문화를 영상으로 널리 알리고, 정보화 시대를 대비하는 불교를 만들기 위해 탄생한 BTN 불교텔레비전이다. 이번에도 그 중추에는 이 씨가 있었다.

이 씨는 1994년, 방송환경의 변화에 대비하여 BBS 라디오국 안에 영상제작팀을 구성하고 케이블 텔레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법인을 달리하게 되자 이 씨는 영상포교에 대한 꿈을 펼 수 없게 되었고, 개국을 준비하고 있던 BTN 불교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사원번호 1, 이태행.

이 씨는 이번엔 영상물 제작에 집중한다. BTN의 탄생은 영상포교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일이었기에 그는 양질의 영상물을 제작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최고의 영상을 제작할 수 있도록 제작 스텝들에게 최선의 환경과 장비를 지원하는 데 힘썼다.

이 씨가 편성제작국장으로서 관심과 공을 들인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새벽예불 영상과 기획연재물 ‘한국의 명찰’이다. 그 동안 영상에 담기 힘들었던 ‘새벽예불’ 영상은 많은 불자들이 안방에서 ‘새벽예불’의 장엄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2년 여 동안 방영된 ‘한국의 명찰’은 송광사, 통도사 등 한국의 명찰을 찾아 그 역사와 문화를 소개해 불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게 평가 받았다. 100여 편에 달하는 ‘한국의 명찰’은 타 방송사나 연구 기관에서 가장 먼저 찾아보는 한국 사찰자료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문화의 많은 부분은 불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BTN 개국이 그 많은 불교의 콘텐츠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담긴 영상을 제작한다는 것은 또 다른 역경(譯經)이며, 사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영상포교라는 새로운 길을 연 BTN 불교텔레비전의 대작불사엔 그의 노력이 또 한 번 보태졌다. 그는 편성제작국장, 방송본부장을 역임했다.

이태행 씨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는 불심으로 일궈온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영상 속에서 남다른 여유가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불심’ 때문일 것이다.

방송인 이전에 불자, 불교는 생활

부모님 지시로 네 살 때부터 절 생활

목탁·독경 소리서 삶의 영감

불교사상 담은 콘텐츠 밑거름

2017년 불교언론인상 수상 선정

 

이미 시작된 인연

두 방송사의 ‘사원번호 1’이란 것도 쉽지 않은 인연일 것이다. 이 씨의 쉽지 않은 그 인연은 아마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BBS와 BTN의 인연이 있기 전 KBS에서 20년간 근무했다. 1987년부터 KBS 문화부에서 종교담당 기자로 일했다. 종교 중에서도 그를 끌어당긴 것은 불교였다. 문화부 차장, 문화과학부장, 기획보도부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문화프로그램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신라불교의 문화적 우수성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월요기획 ‘신라의 신비’와 혜초 스님의 구법과정을 따라간 ‘신왕오천축국전’이다.

첨성대, 석굴암, 금관, 천마총 등 총 10편으로 구성된 ‘신라의 신비’는 불교라는 종교를 기반으로 한 통일신라가 불교로 이뤄낸 문화적 융성을 조명했다. ‘신라의 신비’는 1981년 제8회 한국방송대상 최우수 작품상(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제작기간 2년, 총 8편으로 구성된 ‘신왕오천축국전’은 일본 NHK의 ‘실크로드’와 비교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1988년, 그는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공연기획관으로 잠시 일하게 된다.

“불교를 통해 올림픽 홍보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가 생각해 낸 것은 ‘한강유등제’였다. 10만 개의 유등을 한강에 띄웠다. 장관이었다. 그 때 잠실에서 반포에 이르는 강변길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불자들의 관광버스로 가득했다. 그렇게 자리와 상관없이 늘 불교를 붙들고 살았던 인연이 지중한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네 살 때부터 절에 살았죠”

이 씨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 그에게 불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그의 불교는 ‘모태’였다. 아버지의 불교, 어머니의 불교가 있었다. 돌아보면 그의 KBS 시절에서도 불교가 그를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그가 불교를 챙긴 것이었다.

“저는 네 살 때부터 1년에 서너 달은 절에서 살았어요.”

이 씨는 열한 살까지 전남 무안 바닷가 마을에서 살았다. 집 근처에 절이 있었다. 절은 이 씨의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의 인연, 어머니의 인연이 오래되었다. 이 씨의 집안과 절의 대중은 가족처럼 살았다. 승과 속이 아니었다.

“절에 도울 일이 있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두 말 없이 나섰고, 우리 집에 일이 있으면 절의 대중이 또 두 말 없이 나섰죠.”

이 씨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절 마당을 걸었다. 그리고 네 살 때부터는 서너 달 씩 절에서 살곤 했다. 부모님이 일부러 보낸 것이었다. 일종의 공부였다. 서당에 보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 씨는 어린 나이였지만 두 말 없이 나섰다. 그리고 이 씨는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두 말 없이 절에서 살았다. 스님과 함께 새벽에 일어났고, 예불하는 스님 곁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뜻도 모르는 예불문을 따라 했을 것이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합장을 했을 것이다. 목탁 소리, 종소리, 독경 소리, 풍경 소리, 절 숲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까지. 이 씨의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금의 ‘이태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반 행자였죠.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절에서 살았던 기억들이 조금 씩은 머릿속에, 몸속에 남아 있어요. 저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이고 한 집안의 문화였어요.”

그랬다. 이태행의 삶엔 불교가 ‘의식주’같은 것이었다. 뜻 모를 문자였지만 어린 시절 그의 눈을 스친 부처님의 문자들이 아마도 그의 걸음걸이가 되었을 것이고, 말투가 되었을 것이며, 세상을 보는 눈 속 어딘가에 분명히 남았을 것이다. 그가 적지 않은 세월동안 불교를 일군 것은 그가 불교로 일궈졌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 같다.

“집 근처에 다니는 절이 있는데, 몇 주째 일요 법회가 열리지 않아서 마음이 쓰이네요.”

근황을 묻자 현역에서 은퇴한 이 씨는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다. 그저 집 근처 절에 가는 일이 전부라고 했다.

 

박도일 수필가  noduc@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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