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화 출판인(65·민족사 대표)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어려서부터 불교에 푹 빠져 살았다. 그래서 그가 펴내는 책한권 한권 마다 절절한 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좋은 책만 내야겠다.” 한 생각 37년. 그 세월 속에서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성본 저〉 〈벽암록5권-석지현 역주〉 〈대승경전과 선-김호성 저〉, 〈신라화엄사상사 연구-김상현 저〉 〈대승기신론 강설-이평래 저〉 등 수많은 명저가 탄생했고, 700여 종의 책이 출간됐다. 중요한 것은 그 책들이 모두 불서라는 것이다. 한 생각으로 37년을 살고 있는 출판사, 민족사와 그 대표 윤창화다. 그의 ‘37년’과 ‘37년’의 ‘비긴즈’다.

 

‘탄허’를 찾아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윤창화는 월정사에서 출가한다. 중학교 진학을 잠시 미뤄야 했던 윤창화였다. 시절이 그랬다. 봄이었던 세월이 어느덧 가을을 넘어 겨울로 흘러가고 있었다. 학창과 점점 멀어지는 세월은 윤 대표나 그의 어머니에게 ‘고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윤창화와 그의 어머니가 한 생각에서 만난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

당시 윤 대표의 집은 월정사와 가까웠다. 그리고 월정사에는 선지식 탄허 스님이 계셨다.

“월정사에 탄허 스님이 계시니 입산하면 한문이라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뜻이었다. 탄허 스님은 한학의 대가였다. 윤 대표 역시 자신의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때였다. 윤 대표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월정사로 향한다. 열네 살이었다. 불연이라는 말 밖에 무엇이 더 있을까. 월정사 근처가 아니었다면 인연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 대표는 탄허 스님을 바로 만날 수 없었다. 한문 공부는 시작할 수 있었지만 탄허 스님의 한문은 아니었다. 당시 ‘탄허’라는 이름은 불가의 울타리 밖에서도 쉬운 이름이 아니었다. 열네 살짜리 소년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가슴을 때린 ‘발심수행장’

윤 대표의 입산은 일반적인 ‘출가’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미로서 자식의 교육을 걱정했던 일이었고, 윤 대표 역시 중단된 배움을 잇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불연이란 늘 간단치가 않다. 산문에 발을 디딘다는 것이 간단한 인연이 아닌 것이다. 윤 대표가 행자복도 없이 행자 아닌 행자로 지낸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윤 대표는 어느 날,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을 만난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더라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홀연히 백년에 이르거늘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일하겠는가….”

이유 없는 부처님의 그늘은 없었다. 원효 스님의 문장은 소년의 가슴을 무겁게 때렸다. 소년 윤창화는 원효 스님의 문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님이 되어야겠다.”

‘출가’였다.

계 받은지 3년후인 20세 때의 윤창화(사진 왼쪽).

마침내 탄허 스님을 만나다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행자복을 입은 윤 대표는 입산한 지 2년 만에 사미계를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탄허’라는 이름은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먼 곳에 있었다. 윤 대표는 출가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탄허’를 찾아 입산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나는 아직도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한 그 이름과 마주하지 못했다. 나는 이제 불가의 계율을 지닌 출가자다. 원효 스님의 문장에 무릎을 꿇고 그 문장 너머에 있을 공부가 궁금하여 산문에 남았다. ‘탄허’라는 이름이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인연이 아닐 진데, 그 이름을 같은 땅에 두고 이렇게 멀리만 있다는 것은 좋은 책을 서가에 두고 읽지 않는 것과 같다.”

윤 대표는 그 길로 탄허 스님의 시봉을 청한다. 불연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길을 간단하게 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윤 대표는 입산의 시작이었던 ‘탄허’라는 이름과 마주하게 된다. 당대의 선지식을 지척에서 시봉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면서 축복이었다.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오히려 없었으나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선지식의 그늘 속에 있었다. 선지식과 함께 같은 하루를 사는 것이 공부였다.
 

선지식을 만나 禪智를 쌓다

한문공부 차 14세, 월정사 찾아

〈발심수행장〉 읽고 발심·출가

탄허 스님 시봉 10년, 큰 공부

“지식과 정신적 자산 된 기간”

 

불심 간직한 채 세상 밖으로

27세 환속, 출판사 ‘민족사’ 창립

90년대까지 불교학술서만 출판

수 십종의 불교출판계 명저 탄생

37년간 700여 종 불서출판 족적
 

“유교의 4서를 배우고도 학문에 뜻을 두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그 스승과 제자는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산문에 들어 사집(四集)을 배우고 나서 공부에 뜻을 두지 못한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의 하루하루는 가랑비가 되어 소년 윤창화를 적셨다. 윤 대표는 십 년 가까이 탄허 스님을 모셨고, 그 인연은 윤 대표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했다.

“탄허 스님을 모신 일이 저에겐 지식의 기반, 정신적 자산이 되었죠. 크고 작은 경책들까지도 지금의 저에겐 양분이었어요.”


환속

어느 날, 윤 대표는 환속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그는 어느 날 출가했듯이 어느 날 환속했다. 출가의 이유가 아득히 먼 문장에서 비롯됐듯이 환속 역시 먼 곳에서 부른 인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지금 윤 대표의 삶을 놓고 본다면 그의 환속은 또 다른 이름의 불연이라 할 것이다. 출가불연을 속세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듯이 속세로 돌아가는 불연 또한 글자 몇 개로 적어내기 힘든 일이다. 눈을 감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일여(一如)’다. 필요한 시절을 만난 것이다.

윤창화 대표는?1965년 월정사에서 출가했으며, 1972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13회)했다. 1980년 출판사인 민족사를 열고 현재까지 대표직을 맡고 있으며, 1999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을 졸업했다. 논문으로 〈해방 후 譯經의 성격과 意義〉 〈漢岩의 자전적 구도기 一生敗闕〉 〈漢岩禪師의 서간문 고찰〉 〈無字話頭 十種病에 대한 고찰〉 〈경허의 지음자 한암〉 〈漢岩과 呑虛의 同異점 고찰〉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오매일여의 진실과 곡해〉 〈경허의 酒色과 삼수갑산〉 〈탄허의 경전번역의 意義와 강원교육에 끼친 영향〉 〈화두참구의 두 가지 방법과 漢岩禪〉 등이 있으며, 저서로 〈왕초보 선 박사 되다〉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8선〉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등이 있다.


700종 불서편찬, 傳法의 또 다른 이름


민족사, 불교출판의 새 길을 열다

윤 대표가 산문을 나온 뒤 사바에서 시작한 일은 출판사였다. 1980년 5월 9일. 윤창화의 민족사가 문을 연다. 윤 대표의 환속을 또 다른 불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민족사다.

“탄허 스님을 모시면서 스님과 스님의 주변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것이 공부였고, ‘불서출판’이라는 원력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스님의 역경과 간경 불사를 곁에서 본 것이 씨앗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랬다. 윤창화의 민족사는 다른 출판사와는 많이 다른 길을 걷는다. 민족사는 불교개설서, 개론서, 학술서 등 불교전문서 출판에만 매진한다.

“다른 책엔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출판사는 사회에서 분명한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시대의 지성들이 바라보는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고, 한 사람의 인생에 끼어들 수 있는 책들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것이 저에겐 ‘불서’, 그 중에서도 학문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는 불교 전문학술서였어요.”

윤 대표는 당시 불교 전문학술서를 출판하는 출판사 없다는 시대적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불교전문서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크게 느끼고 있었다. 민족사는 본격적으로 불교 전문학술서를 내놓기 시작한다. ‘깨달음 총서(46권)’가 그것이다. 깨달음 총서는 출판계와 불교계 안에서 분명 새롭고 주목할 일이었다. 1980년대 초 한국불교는 학문적인 인프라가 거의 없었다. 국내 불교학계는 일본불교의 연구물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민족사는 국내 불교학계에 필요한 불교개설서, 개론서 성격의 일본 불교학술서들을 번역해 출판함으로써 불교연구의 길을 넓혔다.

1980년대부터 10년간 일본을 비롯한 해외 불교학계의 연구물을 번역 출판해온 민족사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국내 불교학술서 출판을 시작한다. 첫 번째 성과가 성본 스님의 〈중국선종 성립사 연구〉(1991)다. 책은 민족사의 명저 중 하나다. 선어록이나 공안도 충분히 탐구가 가능하다는 결론과 방법론까지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민족사는 199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400여 권의 불교 전문학술서만을 출판한다. 대중서는 없었다. 민족사의 정체이자 윤창화의 정체이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펴낸 불교 서적 일부.

변절, 어쩌면 너무 늦은

20년, 짧지 않은 시간이다.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린 긴 시간에는 시련이 없을 수 없다.

“민족사가 문을 열고 거의 20년 동안 전문 학술서만 내다보니 출판사는 돈과 멀어져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멀리.”

불교 전문학술서, 돈이 될 리 없다. 윤 대표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윤창화와 민족사의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다. ‘돈이 될 리 없는 것’에 있었다. 윤 대표가 민족사를 시작한 것은 사회와 불교에 이유 있는, 의미 있는 출판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유와 의미를 지키는 동안 출판사엔 돈 대신 부채가 쌓인 것이다. 출판사도 기업인 이상 더 이상은 힘겨운 일이었다.

“50% 할인판매”

1998년 윤 대표는 부채를 덜어내고자 ‘깨달음 총서(46권)’를 50% 할인 판매하는 할인행사를 단행한다. 결과는 좋았다. 부채의 일부를 해결한 윤 대표는 남아있는 모든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전 품목 할인판매를 단행한다. 두 달여의 할인판매 행사로 모든 부채가 정리된다. 하지만 책이 나올 때마다 부채는 또 다시 쌓였다. 2003년엔 인적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족사가 더 이상 전문학술서만을 출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민족사는 전문학술서 비중을 30%~40%로 줄였다.

“변절한 것이죠. 그래도 민족사의 책들은 모두 불교의 성씨를 가진 책들입니다.”

윤 대표는 웃으며 ‘변절’이라고 했다. 하지만 왠지 그 변절이란 말엔 비난이 따라붙지 못했다. 민족사는 지금까지 불교 전문학술서와 불교경전 시리즈, 경전해설서, 불교입문서, 불교교리 등 700여 종의 불서를 출판했다. 서두에 밝힌 책들 말고도 명저라고 불리는 민족사의 의미 있는 출판은 수없이 많다.


원효의 문장, 그 너머를 꿈꾸다

경영악화로 학술 비중 감소

본인 저서 〈당송시대~〉로

2017년 ‘불교평론’ 학술상 수상


빠알리 경전에 수록된 부처님의 생애와 불교교리를 수록한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은 2008년 발간된 후 지금까지 매 년 2천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석지현 스님의 〈벽암록〉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된 것으로 고전역주서의 전형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외에도 〈한국 근현대불교사연구-김광식 저〉 〈무아윤회문제의 연구-윤호진 저〉 〈콘사이즈판 불교사전-김승동 저) 등 수 없이 많다. 어쩌면 이쯤에서의 변절은 너무 늦은 변절일지도 모른다.

다시, 공부

불교 학술 계간지 〈불교평론〉의 올해 학술상 수상자로 윤창화 대표가 선정됐다. 작품은 본인의 저서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ㆍ이하 당송시대~〉이다.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으로는 세 번째다. 2008년 집필을 시작해 약 10년의 집필을 거쳐 2017년 2월에 출간된 〈당송시대~〉는 선종의 여러 청규와 선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중국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각종 제도, 가람 구성, 생활철학, 그리고 그 사상적 바탕 등 당송시대의 선 전반을 탐구한 수작이다. 동아시아불교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선종사원에 관한 거의 모든 논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선원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에 관한 논의까지 담고 있는 주목할 만한 저작이며, 간화선 전통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기초자료이자 미래를 위한 방향 설정의 출발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마흔셋 쯤 됐을 때,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산문에 들던 날과 탄허 스님 곁에서 공부에 대한 발심을 키워갔던 때가 떠올랐죠. 공부와 너무 멀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한학 공부도 다시 했고, 불교 공부도 다시 하고 있고, 출간도 하게 됐죠.”

〈불교평론〉 학술상 심사위원회는 “윤창화 대표의 저술은 새로운 연구 분야의 개척 및 학문과 대중과의 만남, 재야학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평론’의 지향점에 부합한다. 이번 학술상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과의 연계성 속에서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모두에게 던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렇다. 윤창화가 산문에 있지 않고 세간에 있는 인연은 바로 저것일 것이다. 그의 환속이 또 다른 불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거처는 바뀌었으나 그의 삶은 늘 ‘불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 대표는 앞서 환속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환속의 이유가 거창해야 하는데, 너무 시시한 것이었다면서 엷은 미소로 대신했었다. 하지만 그가 환속의 이유를 모두 이야기했다는 것을 기자는 말미에 깨달았다. 그가 산문을 나와서 산 37년, 그는 그 ‘37년’으로 환속의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37년 동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글자 몇 개로 말해 달라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한 ‘시시해서’라는 말이 다시 생각난다. ‘시시해서.’ 그는 여전히 원효의 문장 너머가 궁금한 것이다. 그 궁금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바에서의 37년, 아직은 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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