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유 향한 태자의 여정 ‘팔상탱’2

법주사 팔상도 중 〈유성출가상〉의 모습.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 사천왕이 말발굽을 떠받히고 있다. ⓒ하지권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병듦과 죽음과 슬픔과 멸함이 있는가?” -〈중부경전〉 26

한 가지 확실한 사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합니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사별한 탓에 삶의 무상함에 눈 뜬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29살의 나이에 출가합니다.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에 구애받지 않고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세간 일에 관심없던 싯다르타
오로지 ‘존재’에 대한 관심만
성문 밖 나들이서 만난 사람들
‘生老病死’ 고뇌를 깨닫게 해줘
결국 태자는 出家의 길 걷는데


싯다르타 태자를 늘 괴롭혀 왔던 것, 그것은 ‘무엇 때문에 삶과 죽음(生死)이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즉, ‘존재’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웬만한 헛짓거리에는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기존에 만들어진 모순투성이의 가치관 또는 제도 속에 꼼짝없이 갇혀 삽니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세상을 보며, 자신도 괴롭고 또 남도 괴롭힙니다. 하지만, 태자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화두에만 온 관심을 집중합니다.

태자는 이 같은 의문을 품고 자주 골똘한 사유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제 점차 성인이 되어가는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픈 아버지 정반왕은, 왠지 출가할 것만 같은 아들을 보고, 주의를 돌리려 안간힘을 씁니다. 청년기의 태자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법한 사냥·연회·아름다운 여인 등 다양한 흥밋거리를 제공하지만, 태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일대기 중에 태자 시절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을 보면, 아버지가 세간 일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들은 ‘다 부질없다’는 애늙은이 같은 답변만 합니다. 일단 한번 태어나면 ‘늙음(老)-병듦(病)-죽음(死)’라는 정해진 틀에 갇힌 운명인데, 이 허망한 몸뚱이를 믿고 도대체 무얼 탐착할 게 있냐는 겁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生老病死) 우환/ 그 고통은 참으로 두려운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썩기 마련이거늘/ 그런데도 거기서 즐거움을 쫓는 구나 …
사람에게는 늙음 앓음 죽음 있어/ 자기 스스로도 즐겨할 것 없겠거늘/ 어찌 하물며 남에 대해/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을 내랴.

우리가 아등바등 욕심내며 탐착하는 근거가 고작 이 믿지 못할 몸뚱이라니. 태자의 눈에는 이미 존재의 무상함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애가 탔습니다. 태자 역시 애가 탔습니다. 아버지가 볼 때 가장 시급한 일은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나라를 운영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태자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존재’의 비밀이었습니다. 존재는 고(苦)이다. 고는 왜 생기는가. 나고 죽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러한 화두를 풀기 전까지는 무얼 하든 무얼 먹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서로 참 야속했겠지요.

이 사람만 그러하냐? 나도 그러하냐?
태자의 이러한 화두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의 대목에서 극대화 됩니다.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궁궐의 4개의 문을 통해, 차례로 나들이를 나가서 세상을 목격합니다. 동쪽 문으로 나왔을 때 그는 ‘늙은 사람’을 목격하게 됩니다. 머리카락은 희고 눈은 짓무르고 코에서는 물이 흐르고 허리는 굽고 몸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숨을 헐떡입니다. 시들어가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태자: 이는 어떠한 사람이오?
시종: 노인이라 합니다.
태자: 어떤 이를 노인이라 하는가?
시종: 사람은 태어나 젖먹이·어린아이·소년을 지나면서 성숙기에 이른 다음에는 형상이 변하고 빛깔이 쇠퇴하기 시작해 소화도 안 되고 기력이 떨어져 고통이 극심하고 목숨이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이를 늙었다합니다.
태자: 이 사람만 그러한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이냐?
시종: 예, 모두가 마땅히 다 그렇게 됩니다.
-〈석가보(釋迦譜)〉

다음으로, 싯다르타 태자가 남쪽 문으로 행차할 때 그는 ‘병든 사람’을 봅니다.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죽은 사람’을 운반해가는 상여를 봅니다. “이 사람만 그러한 것이냐? 아니면 모든 이가 다 그러한 것이냐?” “모든 세간 사람들은 귀천에 상관없이 모두 다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입니다”라는 시종의 대답에 태자는 몹시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태자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적나라한 미래를 봅니다. ‘나도 늙고 늙음을 피하지 못한다. 나도 병들 것이고 병을 피하지 못한다. 나도 죽어야 하고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자 젊음, 건강, 삶에 대한 자부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생·로·병·사’의 가벼움
사람들이 울고 웃고 먹고 자고 바쁘고 또는 게으름 피는 와중에도, 생명은 이러한 자기의 속성을 어김없이 진행해 나갑니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목숨은 밤낮으로 다하려고 하니 부지런히 지혜의 등불을 켜고 힘쓰라”고 하시네요.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성장하고 변하여 없어진다’라는 기정 선고를 받은 몸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존재 법칙이 그러하니까요.

이를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용어의 뜻대로 풀면, 없을 ‘무(無)’자와 항상 ‘상(常)’자가 결합하여 직역하면 ‘항상인 것은 없다’란 뜻입니다. 즉, 항상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화의 선상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무상을 영어로 번역하면 ‘Law of Change(변화의 법칙)’가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상’이 무엇인지 다시 중생들을 위해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무상은 ‘세 가지 유위법(有爲法)’으로 진행된다. 첫째는 생기는 것(나서 자라서 형체를 이루며 감각 기관을 갖는 것), 둘째는 변하는 것(이는 빠지고 머리는 희어지고 기운은 다하여 나이가 많아 몸이 무너지는 것), 셋째는 없어지는 것(모든 감각 기관이 무너지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형상들은, 가상(假相:임시적인 상)이며, 그 원리는 연기(緣起:인연하여 일어남)이며, 그 실체는 공(空)임을 역설하셨습니다. 

태자는 “나고, 늙고, 죽음을 건너지 못하면/ 영원히 여기서 노닐 인연은 없으리!”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성벽을 넘어 출가하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천신과 용과 귀신 무리들이 제각기 자기 힘의 광명으로 앞에서 인도하여 그 밝음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달려가기가 흐르는 별과도 같으니 동녘이 밝기 전에 이미 삼유순을 나아갑니다. 이러한 극적인 출가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입니다.

아직 검은 머리의 청년으로
막 어른이 된 한창 나이에
나는 울며 만류하는
부모님의 뜻을 외면하고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황색 옷으로 갈아입고
집 없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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