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깨달음은 우리 모두의 것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오로지 나고 죽음을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三界)에서 뛰어나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서산대사 〈선가귀감〉中

출가자에게 있어서 공식적 멘토이자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약 2600년 전 싯다르타 태자는 29세에 출가하여 6~7년간의 치열한 수행 끝에 35세에 깨달음을 증득하시고 깨달은 자(붓다)가 되었다. 그 덕택으로 지금까지 세세생생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과 행복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 묵묵히 정진하는 수행자라면 할 수 있는 물음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태를 보면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깨달음이 크고 위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어려워만 하고 꺼려한다면 수행의 성장과 발전은 멈추게 될 것이다. 작은 깨달음, 소각(小覺)이 모이고 모여서 중간 깨달음인 중각(中覺)이 되고 그 중각들이 모여서 언젠가 부처님과 같은 큰 깨달음 대각(大覺)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空, 진공묘유를 담고 있어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찬 것

현대물리학서 입자는 곧 ‘파동’

‘있으면서 없는 것’ 만물의 실체

이고득락 위해선 바른 수행 필요
 

몇해 전 우리나라에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간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조계종 원로이자 한국불교 전통 간화선 수행자인 고우 스님과 위빠사나의 대표적 수행자로 각광 받는 미얀마의 파욱 스님의 만남이었다. 곧, 수행법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파욱 스님은 위빠사나의 지혜를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본성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집착과 번뇌, 윤회도 없다’고 했다. 반면에 고우 스님은 ‘우리는 원래 모두가 부처’이고, 간화선 수행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과 착각을 깨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고 논쟁하며 답을 찾아 가는 과정은 참 아름답다. 필자는 큰 스님들처럼 깨달음에 대하여 가타부타 하긴 어렵다. 아직 어리고 배움이 짧으며 수행력은 얕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깨달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공부해가며 끊임없이 성찰의 과정을 겪고 있다. 이번 기회에 가벼운 마음으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통해 ‘깨달음’에 대한 작은 소견을 나누고자 한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곧 ‘지혜’의 증득이자 자비의 실천이다. 지혜의 경전인 〈반야심경〉에 불교의 핵심 사상과 깨달음이 잘 녹아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조계종 표준〈한글반야심경〉中

위 내용은 〈반야심경〉의 도입부이자 중심 주제이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현대적으로 해석해보면 ‘최신 스마트폰을 소지한 사람(관자재보살)이 유용한 어플(반야바라밀다)을 실행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어플이 곧 ‘반야바라밀다’이자 나의 수행법이 되는 것이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본다’는 ‘어두운 방에 전등을 켰더니 환한 불이 가득차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라는 수행법 어플을 실행했더니 자비광명의 환한 빛이 비추어지고 그 빛으로 인해 나의 실존을 환하게 보게 된다. 불교에서는 ‘몸-마음-의식’을 5온(색·수·상·행·식)이라고 하며 그것이 곧 ‘나’라고 한다. 하지만, 밝은 빛으로 비추어 보니 그것(나=5온)이 공(空)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온갖 고통에서 건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까? 필자는 공이 불성(佛性)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공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가 아니라 묘한 무언가가 있다(=眞空妙有). 나를 비추어 주는 그 불빛도 불성이자 공이고, 비추어진 후에 밝혀진 실체도 불성이자 공인 것이다. 따라서,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찬 것이고, 무아(無我)이면서 참나(眞我)인 것이다.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현대물리학에서 물질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입자는 눈에 보이는 고정적인 것이지만, 파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동적인 것이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 ‘입자이면서도 파동’인 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실체이자 빛의 성질이다. 〈반야심경〉에 있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불성과 공의 상태를 가기 위한 방편이다. 어떻게 해야 이고득락(離苦得樂)할 수 있을까? 즉, 마음의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고통을 떠나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것은 곧 계정혜(戒定慧)라는 삼학도(三學道)이다. 계율을 시작으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다.

큰 틀에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방법으로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있다. 간화선은 ‘이뭣고’, ‘무(無)’, ‘뜰 앞의 잣나무’ 등을 스스로에게 의심을 일으키는 문구를 화두(話頭)로 삼고 정진하여 스스로가 부처임을 단박에 깨치는 수행법이다. 위빠사나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찰하는 초기불교의 전통수행법이다. 특히, 들숨과 날숨 등 호흡에 집중하고 몸과 마음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림’으로써 체계적으로 깨닫는 수행법이다. 그 외에도 기도, 염불, 절수행 등 많은 수행법이 있다.

마지막으로, 수행과 깨달음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함정이 하나 있다. 누군가의 인가를 받는 문제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 스승이나 도반이 나를 점검해 주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자칫 거기에 의존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것이 어떤 권력이 되기도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쓸 수도 있다.

또한, 수행을 게을리 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점검이 객관적 지표로서 참고가 되므로 수행 과정에서는 필요하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검증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참된 주인이 되어야, 모든 것이 진리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임제(臨濟)선사의 말씀과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잘 새겨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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