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23

의식수준으로 나타난 행태
요즈음 우리 국가는 과거에 쌓인 잘못을 처벌하는 적폐청산이 진행되고 있는데, 필자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청산이라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적폐청산을 지지하는 SNS 언어폭력이다. 새 정부는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강한 의지로 국가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적폐청산인데, 과거에 이루어진 잘못된 관행들이 누적되어 새로운 국가사업을 실행하는데 방해가 되므로 이를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은 SNS를 통해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적폐청산 과정에서 청산을 하는 쪽은 잘못이 쌓였다고 하고, 청산의 대상이 되는 쪽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니 청산은 되지 않고 갈등만 심화되어 새로운 적폐를 낳고 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정부가 의도하는 길이 순조롭지 않고 헤매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방식으로 적폐가 청산될 수 있을까? 부모가 자식을 교육할 때 때로는 야단을 치고 때리더라도 자식은 그러한 부모의 태도를 힘들지만 고맙게 받아들인다. 필자도 어릴 때 할머니한테 매를 맞으면서 자랐지만 할머니가 한 번도 원망스럽거나 미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할머니를 더 좋아하고 따랐다. 그것은 할머니의 사랑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국가 적폐청산과 SNS 언어폭력
잘잘못 두고 양측 갈등만 심화
상대적 관계 받아들여 이해하고
사심 없는 사랑으로 국가 운영을

국가운영을 위해서는 때때로 과거의 행적을 살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일어나는 처벌의 과정을 보면 잘못을 들추어 처벌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일 뿐 함께 잘 살아보자는 사랑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처벌 대상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들추고, 감추느라 국가는 힘이 소진되고 있다. 거기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집행하는 정부의 행태보다 이를 지지하는 SNS는 처벌 대상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언어폭력으로 나타나 더욱 가관이다. 나다니엘 호오돈의 ‘주홍글씨’에서처럼 과거정권에서 일한 사람들을 실패가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들로 몰아놓고 그들이 한 행위를 ‘적폐’로 낙인찍어 심판을 하고 있다. 마치 인민재판과 흡사하다.

며칠 전 국정원 댓글 수사 방해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한 검사의 부인이 울면서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며 통곡했다는 기사가 올라오자, 일부 네티즌들은 “범죄자 자살한 것 가지고 오버한다. 네 남편이 나라 뒤집어놨어. 구족을 멸할 일, 더럽게 살다가 더럽게 뒈졌다”라고 쓴 댓글을 올렸다. 이들의 댓글을 읽다가 망연자실하다 못해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함께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러한 현상은 한 마디로 그들의 의식이 낮기 때문이다.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에 의하면 분노나 적개심이 있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은 150 이하라고 한다. 150이라는 수치는 짜증을 잘 내고, 욱하기 쉬우며, 과격하고, 불안정하고, 툭하면 분노하는 사람들의 성격특징이다. 흔히 ‘두고 보자’라는 말처럼 꼭 되갚아 주려는 마음이 담겨있다.

인간은 에너지 덩어리다. 그 에너지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다. 세상에는 호의적이고 진실하고 사려 깊은 긍정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심 사납고 남을 잘 속이고 불쾌한 부정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호킨스 박사는 이러한 에너지가 한 개인을 이끌어가는 의식으로 보고, 의식수준을 1에서 1000사이로 나타내었다. 1000에 이르는 의식수준은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간의 영역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나타내는데, 예수나 부처, 크리슈나와 같은 성자의 에너지가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150 이하는 분노, 욕망, 공포, 비탄, 절망, 죄책감, 수치심과 같은 매우 거칠거나 삶의 의욕이 떨어진 사람들의 특징이다. 개인에게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힘이 어떠하냐에 따라 세상은 평화롭거나 불행하다. 이러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에너지가 삶의 방식을 만든다.

명상 통한 의식의 해방
우리의 삶은 주로 ‘상대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적인 삶이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서로 대립되거나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삶이다. 순수 에너지로부터 생성된 우주나 인간은 음과 양이 서로 대립되고 상보적이면서 순환하도록 형성되었다. 그런데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을 보면 대립만 있고 상보는 없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국가를 운영한다. 상대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공에 집착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자기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고 운영한다. 누군가가 내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아들이도록 밀고 나간다. 그러다 보니 거칠어지고 강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틀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적으로 인식함으로써 함께 나아가도록 권유한다. 상대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영혼은 우주적인 힘과 지고의식의 측면에서 볼 때 깨닫지 못한 상태이고, 지고의식의 개별화된 일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특성은 의식이 흐리고, 정신능력이 약화되어 있으며, 지성의 힘이 미약하다. 이들은 물질적 육체에 현혹되고, 반무의식적인 꿈의 상태로 살아간다.

인도의 성자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말하길 “자신의 과거 생을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습관에 묶여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예측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사고, 감정, 행동의 양식에 더욱 더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과거에 행했던 것을 잊고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국가를 경영하든 개인의 삶을 경영하든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면 현재의 삶을 놓친다. 흔히 나 자신이나 세상에 이로움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과거경험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삶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지금의 삶을 이용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 과거기억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현실을 만날 수 있는 힘이 없다. 현실을 만나기 위해서는 매순간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생명에너지를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부정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진 영혼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영혼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 몸에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순환하는 7가지 생명력 센터(Charkra)가 있다. 잠자는 영혼인 쿤달리니(kundalini)가 깨어나 생명력 센터를 거쳐 위로 상승할 때 심리적 변형과 육체적 갱생, 의식의 정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척추 기저부인 회음부에 위치한 물라다라 차크라(근간)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우며 집착상태에 있다. 행동양식은 두렵고 불확실하며 탐욕스럽다. 이러한 특성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아이들의 특성과 같다. 이 차크라의 의식은 흐리고 단편적이며 주된 관심사는 육체적 생존과 안전에 있다. 그 다음 척추의 천골(하복부) 부위 스와디스탄 차크라(자아의 거처)로 상승하면 욕망이나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호기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행동양식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노골적으로 접촉하고자 시도하고 예민하다. 마치 세상과 관계하고 경험하려는 청소년들의 특성과 같다. 그러나 진실하고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분별력이 충분하지 않다.

조금 더 상승하면 척추의 요추부위인 마니푸라 차크라(보석의 도시)에 이르게 되는데, 자기중심적이며 충동적이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의지력이 강하다. 행동양식은 개인의 힘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적이며, 인정을 얻고자 한다. 세상을 알아가는 젊은이들의 특성에 해당된다. 특히 이 차크라와 동일시된 사람들은 에고가 정화되지 않은 상태로, 높은 지식과 명료한 의식을 획득함으로써 물질적 정신적 혜택만 원하는 이기적인 경향이 있다. 이 세 번째 차크라까지가 물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의식이 지배한다. 아마도 나만의 틀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상대적인 사람들은 이 수준의 의식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척추의 등 부위에 있는 아나하타 차크라(신성의 소리)에 이르면 영적인 성장을 향한 열망을 가지게 되는데, 행동양식은 삶의 방향이 전환되고, 양심이 발달하며,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이 있고, 좀 더 의미 있게 살고자 하는 중년의 인생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척추의 경부, 목의 맞은편에 있는 비슈다 차크라(순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영적인 눈, 아즈나 차크라(다스리고 조절하는 주체), 뇌의 상부 백회에 있는 사하스라라 차크라(천 개의 빛)에 이르면 더 높은 지식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려는 열렬한 갈망을 가지게 되고, 행동양식은 평화롭고 통찰력이 있으며, 영혼의식으로 살고, 영적인 성장을 갈망하는 다른 이들과 기꺼이 지식을 공유한다. 그리고 행동은 언제나 자비심이 있고, 사심이 없기 때문에 의식의 해방이 일어나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영적 에너지의 이동은 지속적인 명상을 통해 가능하다. 정부가 적폐를 청산하려면 나만이 행할 수 있다는 에고를 내려놓아야 하고, 진실하며 따뜻해야 한다. 지도자가 의식의 확장을 통해 사심이 없고 사랑이 가득 찬 마음으로 “우리 함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적폐를 청산합시다”라고 한다면, 적폐의 대상이든 국민이든 마음의 문을 열고 지도자와 함께 동참할 것이다.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의 방식과 상대방의 방식을 둘이 아닌 하나, 전체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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