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고승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 고승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두루뭉수리하게 ‘도가 높은 분’이라고 말한다. 또 불교를 조금 아는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화두를 깨친 분’이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들어줄 만하다. 그런데 신비주의(?)로 빠지는 사람도 있다.

고승이란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다 보는 분’이라고 주장한다. 부처님께서야 과거를 보는 숙명통, 미래를 보는 천안통을 얻은 분이지만, 과연 그러한 경지까지 간 고승이 정말로 있을까 싶다. 물론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불운하게도 나는 그런 분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길상사의 전신이었던 고급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께 시주했던 김영한 여사가 생각한 고승은 좀 색다르다. 여사가 판단한 고승의 조건은 아주 소박하다. 〈무소유〉를 읽고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미국에서 법정 스님을 만났던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인(因)과 연(緣), 즉 필요조건이 충족되었으므로 만났던 것이기에.

일러스트 정윤경

김천 직지사에 주석하시던 관응 노스님을 뵌 적이 있다. 내 나이 30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 스님께서 무슨 말씀 끝에 인과 연을 이야기해주셨는데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사과나무는 인이고, 사과밭은 연이라고 하셨다. 같은 사과 씨라도 평평한 밭과 비탈진 밭에서 자란 사과나무의 사과는 모양이 다르다고 강조하셨다. 밭에 따라 사과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법정 스님께서 상도동 약수암에 오신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즉시 그곳으로 갔다. 약수암 큰방에 들어가 보니 나이 지긋한 여성과 감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 그리고 법정 스님이 앉아 계셨다. 남다른 내공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스님은 듣기만 했다. 요지는 이러했다. ‘아무 조건 없이 제가 대원각을 내놓겠으니 스님께서 받아주십시오. 다만 절이 잘 운용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감사 한 사람을 둘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감사 후보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스님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서시더니 “우리나라에는 고승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보신 뒤에 믿음이 가는 분에게 시주하십시오”라고 한 마디 하시고는 나가버리셨다. 그때부터 여사는 2년 동안 사람들이 고승이라고 존경하는 스님들을 찾아가 두루 만나보았다고 한다. 여사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에다 여사가 좋아할 만한 조건을 더 붙여 맡겠다는 스님들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사는 결국 다시 법정 스님을 찾아와 “감사를 두겠다는 조건을 거두겠으니 받아주십시오”라고 하소연하며 당시 1천억 원대의 대원각을 시주했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지만 자신의 재산에 정작 무관심했던 법정 스님이기 때문이었다. 여사가 생각하는 고승의 조건이란 바로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재산을 받아줄 스님을 기어코 찾아낸 여사의 내공도 녹록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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