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현(海賢) 노화상

“비록 글자를 모르셨을지라도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지극히 염(念)하여 마음을 밝혀 견성하셨으니, 나(정공 법사)는 해현 노화상을 정종(淨宗)의 제14대 조사로 삼가 추천한다.” -〈무량수경 심요〉

 

중화권에서 가장 존경 받은 염불 선지식

2013년 1월 17일 새벽, 중국 하남(河南)성 남양(南陽)에 위치한 시골의 작은 절 래불사(來佛寺)에 112세의 고승 해현(海賢) 노화상(老和尙)이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떠날 시간을 미리 알고 마지막까지 가르침을 펼치는 사명을 완수하였다. 전혀 고통 없이 홀연하고 편안하게 육신을 벗어버리고 아미타부처님의 인도 하에 연화좌대에 앉으셔서 극락왕생한 것이다. 세수 112세, 승랍 92년이 되었으니, 이를 듣고 본 많은 불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중국 본토는 물론 중화권에서 널리 알려진 정토의 선지식인 해현 노화상의 왕생 소식을 전해 들은 염불행자들은 노화상을 정토종의 조사로 추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전세계 200여 지회에 3억여 명에 달하는 회원을 가진 정종학회(淨宗學會)의 정신적 지도자인 정공 법사(淨空法師, 92세)는 2014년, 해현 노화상을 정토종의 제14대 조사로 추대했다. 국내에서는 〈화두 놓고 염불하세〉란 책으로 염불의 수승함을 널리 알린 제13대 조사 인광 대사(1861~1940년)에 이은 마지막 정토종 조사로 추대된 것이다. 정공 법사는 〈무량수경 심요〉에서 추대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노화상께서는 한평생 〈무량수경〉의 가르침을 진실로 닦고 원만히 증득하여 ‘진성(眞誠) 청정(淸淨) 평등(平等) 정각(正覺) 자비(慈悲) 간파(看破: 알아차림) 방하(放下: 내려놓음) 자재(自在) 수연(隨緣: 인연을 따름) 염불(念佛)’의 21자를 실현하셨다. 그 성취의 관건은 전일하게 정성을 다해 염불함에 있었다.”

어린나이 ‘효행’ 이름 높아

18세에 옹창 차유, 발심

문화대혁명 후 불교 중흥

어려서부터 채식ㆍ염불한 효자

중화권 최고의 선지식인 정공 법사가 극구 찬탄한 해현 노화상의 말 없는 가르침은 그의 삶을 따라가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될 것이다.

〈내불삼성 영사집(來佛三聖 永思集)〉에 따르면, 해현 노화상의 속성은 문(文)씨이고, 이름은 천현(川賢)이며, 자는 청선(淸選)이다. 선조는 예남(豫南) 당하현(唐河縣) 소배사진(少拜寺鎭)에 살았다. 노화상은 청나라 말 광서 26년(1900년) 8월 19일 태어났다. 부모와 조부모는 독실한 불제자였다. 12살 때, 그의 부친은 호북성 수주에서 도적떼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노화상은 형제가 다섯 분이며,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식들을 힘들게 키웠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채식과 염불을 한 그는 천성이 순박하고 숙세의 선근이 깊어서, 어린 나이에 이미 ‘효행’으로 마을에 이름이 났다.

 

악성 종양 관음기도로 고치고 발보리심

18세 때에 노화상은 허벅지에 옹창(癰瘡)이 나서 살이 썩어 문드러졌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았지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인과를 깊이 믿은 그는 “아무리 좋은 묘약도 업으로 인해 얻은 병은 고치기가 어렵다”고 탄식했다. 그래서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심으로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성스러운 명호를 칭념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고치기 어려운 그 옹창이 거짓말처럼 저절로 싹 다 나았다. 노화상은 이 일로 인해 부처님 말씀은 지극히 진실하며, 관세음보살의 “모든 고통과 액난을 제도하신다”는 말씀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믿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은 그로 하여금 윤회의 길은 험하고 생사문제가 가장 중대함을 깨닫게 해주어, 마침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켰다.

 

전계 화상에게 ‘아미타불’ 전수염불 배워

민국 9년(1920년), 노화상은 20세에 굳은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서 동백산(桐柏山) 운대사(雲臺寺)의 전계(傳戒) 화상에게 귀의하였다. 전계 화상은 친히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은 ‘해현(海賢)’, 자(字)는 ‘성성(性誠)’이라 지어주었다. 전계 화상은 본래 임제종 백운(白雲) 선사 계파의 선사였지만, 해현 화상에게 참선을 가르친 적이 없으며, 경전 강설과 설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六字洪名)만을 전하며 늘 끊임없이 염불할 것을 부촉했을 뿐이다. 해현 화상은 3년 뒤인 23세에 호북성 영보사(榮寶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체광 법사 등과 3년간 토굴 수행

해현 화상은 일찍이 동백산의 도화동(桃花洞), 운대사(雲臺寺), 탑원사(塔院寺)에 상주하면서 14곳의 황폐한 산을 개간하거나, 사람들을 도와 11곳의 도량을 세웠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당대의 고승인 해묵(海墨) 법사(1968년 앉은 채로 염불 왕생), 해원(海圓) 법사(선종과 정토종을 겸수, 2000년 입적 후 2천 여 사리 수습), 체광(體光) 법사(허운대사의 심인을 전수받고, 2005년 좌탈 입적)와 탑원사에서 초막집을 짓고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때도 묵언 염불하며 채식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은 절에 난입해 경서를 불사르고 불상을 훼손시키고 스님들을 강압적으로 환속하도록 핍박하였다. 이때 화상은 산 아래 마을에서 생산대 대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화상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염불하였고, 저녁에 몰래 절을 하였다. 큰솥에 오신채나 고기가 들어있을 때는 솥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푸성귀를 먹었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래불사의 많은 호법거사들은 당시 화상이 머물던 탑원사에 가서 래불사로 돌아와 정법(正法)을 선양하고 도량을 회복할 것을 청했다. 노화상은 “단지 몸 둘 곳을 튼실하게 하기만을 꾀할 뿐, 어찌 구태여 문과 뜰을 보기 좋게 꾸밀 필요가 있으랴!”하면서, 단지 대전(大殿) 세 칸과 서쪽 곁채의 나한전 세 칸을 세웠으며, 불상을 진흙으로 빚어 모셨다.

 

제11대 판첸라마의 존중을 받다

1991년, 화상의 사제인 해경(海慶) 법사가 평생 염불수행을 하다 원적하자 금강불괴(金剛不壞: 육신사리)의 몸을 성취하였다. 해경 법사를 항아리에 모신 지 6년 9개월만에 다비를 하여 탑에 봉안하려 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꼿꼿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2005년, 이미 105세의 고령이 된 노화상은 해경 법사의 법체를 금신(金身)으로 장엄해주기 위해 멀리 광주에 갔다가 우연히 티베트의 제11대 판첸 라마를 만났다. 이 젊은 법왕자(法王子)는 노화상을 마치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받들었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함께 점심 공양을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임종 직전 112세까지 승복 기워 입고 일해

2012년 3월, 원명사(圓明寺) 주지 인영(印榮) 법사가 노화상을 모시고 원명사에 가서 승복 한 벌을 공양했다. 노화상은 승복을 입어보고는 길이가 좀 길다는 느낌이 들자, 그 자리에서 바로 손수 바늘귀에 실을 꿰어서 순식간에 승복의 가장자리를 감쳐서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출가승다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극락에서 온 자비 보살의 화신

노화상의 성품은 온화하여 화를 낸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진실로 모든 일을 웃어넘기고 사람들에 대해 포용하지 않음이 없던 분이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차라리 오신채를 먹은 입으로 염불할지언정, 채식을 한 입으로 사람을 욕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오랜 도반인 ‘무쇠 다리 승려(鐵?僧)’ 연강(演强) 법사는 “해현 화상은 틀림없이 불보살이 응화(應化)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그분이 평생 동안 어떤 사람과 무엇을 얻기 위해 말다툼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평했다. 정공 법사 역시 해현 화상을 “연지해회(蓮池海會: 극락세계)의 성현”이라 하였으니, 고승들의 이러한 평가가 어찌 빈말이겠는가.

 

염불 만났으면 이번 생에 왕생해야

2008년 가을, 해현 노화상은 래불사 주지를 인지 법사에게 부촉하면서 “절이 없는 것은 두렵지 않고, 단지 도(道)가 없을까 두려울 뿐이다. 귀와 눈이 멀지 않으면(남의 허물을 못 본 체 하지 않으면) 절의 주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당부했다. 노화상은 늘 사람들에게 이르길, “염불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큰 복덕과 선근이 있는 사람이니, 반드시 이러한 대단히 좋은 인연을 꽉 붙잡아 성실하게 염불하여 이번 생에 왕생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속 미련 버리면 극락이 마음에 있다

해현 노화상은 왕생하기 하루 전인 2013년 1월 16일 오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함께 사원 앞에 있는 채소밭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일했다. 제자들이 노화상에게 이제 그만 쉬실 것을 권하자, 그는 “이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이후로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네”라고 했다. 노화상은 또 “마음속에 보리(菩提)가 있는데, 어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부처님 다리를 붙들려 하느냐? 스스로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으면 자연히 극락이 마음에 있다”고도 했다. 제자들은 노화상이 왕생하신 뒤에야 비로소 미리 작별인사를 한 것임을 알았다.

 

승단 화합해야 불교 중흥 가능

해현 노화상은 왕생하기 3일 전, 책 한 권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서 한 거사에게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시대의 여러 고승ㆍ대덕들이 정토법문을 예찬하고, 불법을 홍양(弘揚)하는 정공 법사를 찬탄한 내용을 모은 책으로, 제목은 〈약요불법흥 유유승찬승(若要佛法興 唯有僧讚僧)〉이다.

“만약 불법을 흥성하게 하려면, 오직 승가가 승가를 찬탄해야 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모든 종파와 사부대중이 화합하여 염불법문을 되살리고 불교 중흥의 큰 불사를 지어 나가기를 발원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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