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에서 도솔암 가는 길

암벽 사이에 돌축대를 쌓아 그 위에 세운 도솔암. 피앗이 열리는 도솔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상징한다.

 

걷는길 : 미황사 - 대밭삼거리 - 하숙골재 - 떡봉 - 도솔암

거리와 시간 : 5km정도, 4시간 예상

미황사(美黃寺)에 가면 대웅전 주춧돌부터 먼저 보라. 불교가 바다를 건너온 역사를 게와 거북의 돋을새김이 전하고 있다. 대웅전 천정에도 ‘옴마니반메훔’ 산스크리트어가 문양을 이루고 있다. 최근 미황사 앞길에 ‘천 년 숲길’이 생겼다. 1,200여 년 전, 조선조 숙종 때 세웠다는 부도사적비가 그 길에 있는데, 여기서도 불교의 해양전래설을 엿볼 수 있다.

피안의 세계 상징하는 ‘도솔암’

험준한 달마산 정상에 위치해

해양 불교 전래의 흔적 옅봐

어느 해 사자포에 돌배가 한 척 나타났다. 의조 대사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화엄경과 법화경,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한 53선지식의 경상(經像)이 실려 있었다. 의조대사 일행은 그 모두를 배에서 내려 봉안할 곳을 물색했다. 그날 밤 의조대사의 꿈에 금인이 나타났다.

“나는 우전국 왕이다. 금강산에 경상을 모시려다가 이 산에 일만 불(佛)이 있어 여기에 배를 세웠다. 소에 경상을 싣고 나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봉안하라.”

의조대사가 깨어보니 검은 소가 나타났다.

미황사는 그래서 생긴 절이다. 미(美)자는 소 울음을 음사한 소리이며, 황(黃)은 금인을 뜻한다. 우전국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등장하는 나라로,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이다. 금인은 황면노사(黃面老師)라고도 부르는 부처이다. 금인을 인도의 왕이거나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으로 확대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허황옥은 훗날 김수로 왕의 왕비가 된다.

이 땅의 불교가 옛 고구려 땅을 거쳐 왔다고는 하나,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김해 장유사에서는 서해와 남해를 건너왔다는 해양전래설이 떠돈다. 신라 남해왕 때 인도 월씨국의 불교가 동해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암괴석 시야로 보이는 남해 바다.

미황사는 한반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달마산 489m에 해가 뜨는 반대편 기슭에 있어서 아침볕이 늦다. 카메라로 대웅전을 찍지만 달마산 그늘이 오래 머무르고 있어 자꾸 흔들린다.

카메라 렌즈에 대웅전뿐 아니라 뾰족뾰족한 뒷산 봉우리들이 들어온다. 언뜻 보면 병장기를 세워 둔 무기고 같은 모습인 달마산이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에게 도솔암 가는 길을 물으니 둘레길인 ‘천 년 숲길’을 곧바로 권장한다. 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지 아래위를 훑는다.

“산을 타려면 부도전에서 올라가는 게 수월하고요. 미황사에서 바로 올라가는 길이 있긴 한데요…….”

끝말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에게 반배하고 자리를 뜬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는 무슨 심사에선지 험로를 택해 걸었다.

가파르긴 했지만 30여 년 꾸준히 산행해온 몸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었다. 오를수록 멀어져가는 미황사를 집 나온 아이처럼 뒤돌아보았다. 아침햇살이 미황사 기와지붕보다 먼저 남해바다에 닿아 쪽빛 물결을 반짝였다. 능선에 오르니 풍경이 하나 더 생겼다. 산등성이 너머로 해남벌판이 기름진 햇빛을 머금고 번들거렸다.

눈길을 거두어 능선의 앞뒤를 보자 소문으로 듣던 대로 칼산이다. 칼산지옥 제가 가면 칼산 절로 꺽여지고……. 천수경의 신통한 문장이 떠올랐으나 내가 거기 갔기 때문이라기보다 진도ㆍ완도ㆍ보길도ㆍ어룡도ㆍ백일도ㆍ흑일도ㆍ당일도ㆍ장구도……아주 쾌청한 날에는 제주도까지 보이는, 바다와 하늘 사이에 쉼표처럼 떠 있는 섬들에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해 보였다. 지옥도 달마산 봉우리 같다면 한 번쯤 갈만하지 않을까.

동국여지승람은 ‘달마대사의 법신이 늘 상주하는 곳’이라고 해남 달마산을 단 한 줄로 소개한다. 달마는 선종 초조 달마대사의 이름이지만 ‘진리’라는 뜻으로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에서 왔다. 미황사 대웅전을 카메라에 담을 때 보았듯이 달마산은 뾰족한 바위투성이인데, 그 옛날 우전국 왕자 금인의 눈에 비친 1만 불상이다.

봉우리들의 높낮이에 따라 내 몸도 오르락내리락했다. 피안으로 가는 배가 파도에 출렁거리는 기분이다. 어지러웠다. 출렁거리는 배 말고도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들처럼 구름이 내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구름의 그림자도 능선의 바위와 흙을 훑으며 빠르게 지나갔다.

지독한 너덜길이었다. 미황사 스님의 흐린 말끝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 배가 암초에 걸렸는지 기우뚱했다. 사실은 내가 바위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칼산이 절로 꺽여 지기는 커녕 통증이 와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다. 나와 함께 나둥그러진 배낭을 주워 약품함을 열었다. 압박붕대로 발목을 칭칭 감는 동안 부처를 몹시 시기했던 사촌 데와닷따가 생각났다.

데와닷따는 살해를 결행하려고 영취산 산마루에서 부처가 오기를 기다렸다. 부처는 굴러오는 바위를 피해 겨우 죽음을 모면했지만 발을 심하게 다쳤다. 주치의 지바카가 부처의 다친 발에 칼을 대어 치료했다.

“부처님, 통증이 심하신가요?”

“지바카, 나 여래는 윤회라는 긴긴 여행의 종착점에 도착했다네. 모든 번뇌와 방해와 핍박에서 벗어났지. 하지만 몸의 통증만큼은 어쩔 수 없구나.”

부처가 신통술을 부려 다친 발쯤은 너끈히 낫게 하려니 생각한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매우 놀랄 것이다. 부처의 신통력에 대한 의문은 이밖에도 더 있었다. 부처가 춘다의 상한 음식공양으로 식중독에 걸렸을 때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마지막 유행지인 쿠시나가르로 향하는 부처에게 어떤 비구가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데 왜 하늘나라 약으로 병을 치료하지 않으십니까?”

부처는 웃음을 머금었다.

“집은 오래되면 허물어지지만 땅은 변함없이 평온하단다. 나의 마음은 땅과 같아 평온하지만 내 몸은 헌 집과 같구나.”

내 몸도 헌집 대문처럼 덜컹거렸다. 다행히도 발을 삐었을 뿐 심하게 다친 건 아니어서, 스틱을 짚고 대밭삼거리까지 올 수 있었다. 미황사 스님이 수월한 길이라 했던 부도전에서 올랐다면 대밭삼거리를 훨씬 지났겠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도솔암이 있으니까 도솔천이 열리는 세계이리라. 사람의 몸으로 감히 도솔천에 오르는데 이만한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여전히 머리 위로 구름이 지나다니고 발아래서 바다가 번쩍거렸다. 구름을 머리에 이고 능선을 걸을 때 나는 하늘의 시간을 통과한다. 그 시간은 지상에서의 시간보다 빨라서 어떤 거리든 단축하게 된다. 옛사람들 중 어떤 이는 축지법을 쓴다고도 했다. 아마도 능선을 잘 이용하여 거리는 물론 시간을 단축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뜻이리라.

하숙골재를 지나 떡봉에 올랐다. 이쯤이면 피안의 세계인 도솔암이 보일 차례이기에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마침내 도솔암을 가리키는 표지가 나타났지만, 내 눈에 띈 건 놀랍게도 차안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컨테이너박스였다. 한 스님이 거기서 나왔는데 그도 놀란 얼굴이었다. 어찌 그 다리로 예까지 왔느냐는 눈길이었다.

잠시 후에야 알았지만 도솔암은 컨테이너박스가 기대앉은 봉우리, 그 건너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본 박스집은 도솔암 암주 법조 스님이 기거하는 일종의 요사채였다.

법조 스님은 해남이 고향이란다. 산 위에서 고향을 내려다보며 수행한다는 이야기에 어떤 기구한 사연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출가자에게 그 연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법조 스님뿐 아니라 스님의 과거란 대개가 검게 칠해진 금기의 시간이므로 오래 이야기를 나눠도 절름발이 대화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수백 년 동안 폐사지였던 도솔암을 법조 스님이 복원하여 11년째에 이른다고 했다.

달마산 배경으로 앉아있는 미황사 대웅전.

“이제 고만 산 아래로 내려가야제. 장기집권은 곤란한 법이여.”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스님을 뒤로하고 요사채를 나왔다. 봉우리 곁을 돌아 내려가는 길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도솔암이 보였다. 새의 둥지, 높다란 바위 틈새에 낀 도솔암은 영락없는 그것이었다. 지나던 새도 날갯짓을 멈추고 바라볼 것 같았다. 아니, 우리 집을 어찌 날개 없는 인간이 지었지?

도솔암에서 내려다보니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섬들은 또렷했다. 진도 쪽으로 배 한 척이 가고 있었다. 날이 서도록 햇살이 쨍쨍한데 이상하게도 피안과 차안을 구분하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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