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데라와 이시야마데라

비와호 벚꽃 풍경. 올해 4월 촬영했다. 가장 뒤에 보이는 것이 미이데라 벚꽃이다.

올해 4월 약 20년 만에 시가현 오쓰시(大津市)에 있는 미이데라로 요자쿠라(夜櫻, 벚꽃 야간 구경)를 보러 갔다. 요자쿠라라고 하면 교토 시내의 기요미즈데라, 마루야마(円山)공원 등 유명한 곳이 있지만, 미이데라에서 보는 요자쿠라는 교토 시내보다 빛이 어두워서 그런지 벚꽃이 더 선명하게 보여 교토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비와호 인근의 三井寺와 石山寺
외국인에겐 알려지지 않은 고찰
三井寺, 헤이안 4대 사찰로 유명
관음 도량으로 사랑받는 石山寺


미이데라는 내가 지금까지 소개해온 나라나 교토에 있는 사찰처럼 외국인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이데라는 헤이안 시대에 도다이지, 고후쿠지, 엔랴쿠지(延曆寺)와 함께 조정으로부터 숭배 받은 ‘사대사(四大寺)’의 하나로 꼽히는 역사가 있는 명찰이다.

비와호(琵琶湖) 남서쪽에 있는 나가라산(長等山) 중턱에 자리 잡은 미이데라의 정식 명칭이 ‘나가라산 온조지(園城寺)’라고 한다. 사찰 창건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667년 수도를 아스카에서 현재 시가현인 오미(近江)로 옮겨 다음 해에 즉위한 덴지(天智) 천황이 세상을 떠난 후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천황의 아들인 오토모노오지(大友皇子)와 천황의 동생 사이에 싸움이 생겨 진신의 난(壬申の亂)이라는 큰 전란이 발생했다.

패배한 오토모노오지의 아들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원 성읍(田園城邑)’을 기부하여 사찰을 창건했다. 승리한 덴지 천황의 동생이 덴무(天武) 천황이 되고, 전원 성읍의 한자를 따서 ‘온조(園城)’라고 쓰인 칙액을 하사했다. 그것이 미이데라의 시작이다. 사찰에는 덴지, 덴무, 지토(持統) 천황 3명이 태어났을 때 목욕물로 사용한 물을 푼 우물이 있어서 ‘미이노데라’(御井の寺)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미이데라가 사대사로 꼽힐 만큼 큰 사찰이 된 것은 명승 지쇼대사(智?大師) 엔친(円珍, 814~891)이 미이데라를 천태별원(天台別院)으로 재건해 밀교 도량으로 만든 이후부터이다. 엔친의 어머님이 도지(東寺)를 소개할 때 등장했던 명승 구카이(空海)의 조카딸이다. 엔친이 15세 때 엔랴쿠지에서 수행을 시작해 19세 때 정식적인 승려가 되기 위한 국가에서 실시한 시험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고 다음해 정식 승려가 되었다. 853년에서 858년까지 당나라에서 밀교를 배우고 귀국한 후에 온조지를 재건했다.

엔친이 천황 3명이 태어났을 때 목욕물로 사용한 우물의 물을 삼부관정(三部灌頂)이라고 하여 법의(法儀)를 할 때 법수(法水)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찰이 미이데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엔친이 천태종 최고 지위인 제 5대 천태좌주(天台座主)가 되고 일본 불교 발전에 평생 힘을 썼다. 제자도 많이 키웠다. 입적한 후는 천황에게서 지쇼(智?)라는 대사호(大師號)를 받았다.

천태좌주 제 3대이고 엔랴쿠지 융성의 기초를 쌓은 엔닌(円仁, 794-864)스님도 제자를 많이 키웠다. 엔친 제자들과 엔닌 제자들이 천태종의 2대(大) 세력이 되었다. 엔친, 엔닌 사후는 제자들이 대립하게 되어 10세기 말엔 엔친 제자들이 다 엔랴쿠지를 떠나 미이데라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엔랴쿠지는 산몬파(山門派), 미이데라는 지몬파(寺門派)로, 천태종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두 갈래의 갈등이 천태종 내부의 싸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으로 영향도 커서 미이데라가 불타버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이데라는 조정이나 귀족, 무가(武家) 등의 깊은 귀의를 받고 피해를 입을 때마다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으로 사찰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많은 문화재, 넓은 사역으로 현재도 깊은 역사가 있는 사찰인 것을 느끼게 한다.

미이데라 범종
미이데라가 소유하는 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내가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것이 세 개의 범종이다. 하나는 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흠이 있는 범종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이데라 지몬파와 엔랴쿠지 산몬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벤케이(弁慶)라는 엔랴쿠지의 승병(僧兵)이 이 범종을 빼앗고 엔랴쿠지로 가져가서 울렸더니 범종이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랬더니 벤케이가 그렇게 미이데라에 돌아가고 싶냐고 분노해 범종을 골짜기 밑에 내던졌다고 한다.

전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전(寺傳)엔 이 범종이 한때 엔랴쿠지에 의해 빼앗긴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범종에 남아 있는 흠이 아마 그 때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미이데라 고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1602년에 주조된 ‘오미 핫케이(近江八景)’의 하나인 ‘미이의 만종(三井の晩鐘)’으로 알려져 있는 범종이다.

오미 핫케이란 중국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모델로 비와호 남쪽의 승경지를 뽑은 것이다. 소리가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한 이 범종이 교토의 뵤도인(平等院), 진고지(神護寺) 범종과 함께 일본 삼대 우수한 범종으로 꼽힌다. 미이데라에는 또 비천 모습을 부조(浮彫)한 고려 시대의 아름다운 범종이 소장되어 있다.

이시야마데라 규회석과 다보의 모습. 규회석은 열에 의해 석회암이 변성된 것으로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시야마데라(石山寺)
비와호 남쪽에 위치하는 이시야마데라도 역시 ‘오미 핫케이’로, ‘이시야마의 추월(秋月)’, ‘세타(瀨田, 이시야마데라 부근의 지명)의 석조(夕照)’가 유명하다.

이시야마데라는 사찰 이름이 표하는 대로 특색이 있는 이시(石)가 인상적이다. 경내에 들어와 본당이나 다보탑(多寶塔)을 잇는 계단을 올라가면 큰 기암(奇岩)이 눈에 든다. 규회석(珪灰石)이라고 하는 그 기암이 화강암 등의 열 작용으로 인해서 석회암이 변성된 것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시야마데라는 나라 하세데라 기사에서 소개한 사이고쿠33쇼순례(西國三十三所巡禮)의 하나로, 관음 신앙의 도량으로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시야마데라는 8세기 중반에 도다이지와 깊은 관계가 있는 관사(官寺)로 창건된 사찰이다. 사찰 연기는 사찰 에마키(두루마리 그림)에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도다이지 대불을 만드는데 방대한 양의 황금이 필요했다. 칙명을 받은 로벤(良弁) 스님이 나라 산속에서 황금 발견을 기원했더니 꿈에 신불이 나타나 ‘오미의 세타에 있는 산이 영지이니 거기서 기원하면 황금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오미에 간 로벤 스님이 바위 위에 관음상을 안치하고, 암자도 만들고 매일 기원했다. 그랬더니 동북 지방에서 황금이 발견되어 덕분에 대불이 완성되었다. 그 후 바위 위에 있는 관음상을 본존으로 하는 사찰이 창건되어, 그곳의 외관으로 사찰 이름이 이시야마데라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도다이지를 건립하는 기관에 속하는 조이시야마인쇼(造石山院所)라는 기관이 있어 이시야마데라 당우는 이 기관을 통해서 건립되었다. 이 기관이 또 비와호 주변에서 벌채된 목재를 수운으로 도다이지에 운반하는 일을 관리했었다. 도다이지와 대불 건립이란 대사업의 배경으로 이시야마데라가 큰 역할을 했었던 것이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 관사로서의 성격이 점점 약해져 진언 밀교 교학의 사찰이란 성격이 강해졌다. 또 관음신앙 사찰로서 인기가 높아져 황족, 귀족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배했다.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은 편한 곳에 위치하는 유리한 조건도 있어 이시야마데라는 기요미즈데라와 함께 많은 사람이 참배하는 관음신앙의 인기 사찰이 되었다. 여성 참배객도 많아 헤이안 문학 여성 작가들도 이시야마데라를 찾아갔다. 특히 유명한 작가는 궁정을 무대로 지어진 장편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저자인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이다. 본당 일부분에 그가 소설을 집필했다고 전하는 방이 있다.

본당은 11세기에 대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0수년 후에 재건된 것이고, 그것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에 붙어 있는 예당(禮堂)은 17세기 초에 개축된 것이다. 이시야마데라 본당은 기요미즈데라 본당, 하세데라 본당과 마찬가지로 산의 경사면에 기대어 짓는 건축 양식이며 많은 기둥이 본당을 받치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기요미즈데라, 하세데라보다 더 오래된 양식을 갖고 있는 귀중한 것이다.

이시야마데라는 무가(武家)와의 깊은 관계도 있었다. 1194년에 건립된 국보 다보탑은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자이자 초대 장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瀨朝, 1147-1199)가 기진한 것이라고 전한다. 높이 16.66m, 하층이 사각형 상층이 원형으로, 균형을 잡은 우아한 탑이다. 하층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불사인 가이케이(快慶)가 제작한 대일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봄에는 매화, 벚꽃, 모란, 여름엔 꽃창포, 수국, 가을에는 단풍 등 자연의 미가 계절마다 사찰 모습을 더 매력있게 보여준다. 특히 400그루 이상이 되는 매화나무가 알려져 있어 방문객이 이시야마데라에서 매화향기를 맡으면서 봄의 도래를 느낄 수 있다.

미이데라·이시야마데라 답사 안내

미이데라, 이시야마데라는 대중교통으로 편하게 갈 수 있다. 미이데라는 게이한 미이데라역에서, 이시야마데라는 게이한 이시야마데라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이다. 미이데라역에서 미이데라까지는 비와호 소수(疎水)를 따라 걷는데 봄이 되면 벚꽃이 정말 아름답다. 두 사찰 모두 산의 경사면에 있어 경내 답사는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해야 된다. 그 만큼 조망이 좋다는 말이다. 미이데라도 또한 사이고쿠33쇼순례의 하나이다. 관음당에 안치되는 본존 관음상이 33년에 한 번밖에 공개되지 않는 비불(秘佛)이다.

관음당이 있는 곳이 조망이 아주 좋고 비와호가 보인다. 도래인과의 인연도 느낄 수 있다. 오쓰 시청 북쪽에 미이데라에 속하는 시라기젠신도(新羅善神堂 별명 시라기신사)가 있다. 시라기(=신라)신사는 일본 전국에 있다. 지난 회에 소개했듯이 일본에서 백제가 붙어 있는 고유명사가 있고, 또 고려가 붙어 있는 고유명사도 있어 한반도와 깊은 관계를 이런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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