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한번 돌려 놓는다면 그대로 녹게 되는 것입니다

수계를 받는 마음 자세

질문 얼마 전 꿈에 제 안에 입력되어 있는 과거의 거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인간으로 올라오기까지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진화해 오면서 살아왔던 과정이 보이면서 정말 다시 한 번 발심을 해서 제 안에 입력되어 있는 업식들을 반드시 녹여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해년마다 하는 수계법회이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부처님의 제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오계를 참답게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들께서 지펴 주시는 향불에 제 안의 업식을 다 소멸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수계를 받는 마음 자세를 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둘 아니게 생각하면서 배우신다면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직결되어 있는 줄이

우리들의 근본의 줄과 직결돼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답변 우리가 항상, 마음에서 고장 난 것은 마음으로부터 해결을 해야 하는 거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돼서 이 세상에 이렇게 인간으로서 등장을 했습니다. 인간으로 등장을 했는데 어떻게 살아야만 우리가 업을 짓지 않고 현재의 모든 것을 다 녹이면서 생동력 있게 또 걸림 없이 살아나갈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미생물에서부터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수억겁을 천차만별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날까지 진화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고등 동물이라는 인간으로서 이렇게 등장을 해서 살고 있는 이 마당에서 가만히 또 생각을 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육통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셨습니다. 육통이라는 것은, 이 몸뚱이가 통이 돼서 말입니다, 그 안에 천차만별의 모습과 의식들이 살고 있으니 어떻게 나 하나만이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한마음으로 더불어 같이 사는 한 개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한 몸뚱이를 한마음으로서 이끌어 나가려면 내 마음 자체를 움죽거려야 이 몸속에서 그대로 따라 준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몸속에서 그대로 따라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공부를 그대로 잘하고 나간다면 그 육신 속에 있는 생명들의 의식이 다 그대로 따라 줍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돼서 모든 것을 털구멍을 통해서 바로 나가서 조절하고, 안에서 모자라는 건 작용을 해서 채워 주고 이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하면 관세음이 돼 줍니다. 즉 마음을 따라서 의식이 하기 때문에 의식은 보살로 화하고, 다스리는 중심은 바로 부처님으로 화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한생각을 하시면 의식들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가 돼서 보살로 화해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신다 이런 뜻입니다. 그와 같이 내 마음 쓰는 대로 이 육신 속에 있는 의식들도 따르니까, 마음공부들 열심히 해서 그대로 한마음이 돼서 들고 난다면 그것을 이름해서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속의 생명의 의식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나투신다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이 그대로 부처요, 그대로 법신이요, 그대로 화신 보현신이란 얘깁니다. 이게 전부 수계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자에는 오계를 설하면 “먹지 마라, 하지 마라, 죽이지 마라” 이렇게 그냥 전체 다섯 가지가 다 ‘마라’로 됐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샛문을 틔워 놓지 않았습니까. “술을 마시더라도 분수를 알고 마셔라. 남을 위해서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건 도둑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치라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살생을 하더라도, 짐승을 죽였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에 맡기고 하면 그대로 두 마음이 아니니까, 살리는 사람의 마음이나 살아난 사람의 마음이나 죽는 고기의 마음이나 전부 한마음이 돼서 고기는 고기의 허물을 벗고, 모습을 벗고 인간이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또 이쪽에는 그 고기의 살을 약으로 먹으니 병이 나아서 좋고, 그렇게 보시를 하는 것은 살생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죽이지 마라, 하지 마라, 먹지 마라”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스스로 분수를 지키면서, 스스로 남을 위하는 게 바로 자기를 위하는 거고 남이 괴로우면 나도 괴로우니까 남을 위해서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럽게 행동해 줘라 이겁니다. 가정에서 식구들하고도 다 그렇게 하라는 얘기죠. 우리가 마음으로 지은 죄를 마음으로 벗어야지 만약에 말이나 이론으로 벗으려면 벗어지겠습니까? 그러니 만날 말씀해 드리는 게, 부처님 말씀하신 것에 입을 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 뜻을 알고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니게 열심히 하셔야죠. 부처님의 마음도 내 마음이고 부처님의 형상도 내 형상이고 부처님의 법도 내 법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둘 아니게 생각하면서 배우신다면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직결되어 있는 줄이 우리들의 근본의 줄과 직결돼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전기를 방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가발전소에 가설이 돼야 전력이 들어오죠, 가설이 돼야. 그런데 가설이 다 돼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줄과 우리들의 근본의 줄과 이렇게 직결이 돼 있어요. 전기 가설이 돼 있듯이 말입니다. 가설이 돼야 불이 들어오죠? 우리는 본래 그렇게 돼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시하고 그렇게 안 하니까, 즉 우리들의 스위치를 해 놓지 않았단 얘깁니다. 전기 가설은 다 돼 있는데 스위치를 해 놓지 않았으니 이게 불이 생전 가야 들어옵니까? 그걸 누를 줄을 모르고 누르는 거를 해 놓지도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스위치를 누를 줄을 알아야 오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스위치를 누를 수 있어야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이익이 갈 수 있고 공덕이 될 수 있고, 자식들을 돌에다 세워 놔도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 있고 조상을 이끌어서 건질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대로, 오계를 받고 그대로 지키면서 공부하는 데에 따라서 요다음 생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주어지는 겁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거고,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에 또 우리가 한 철 살다가 갑니다. 금방입니다. 금방 옷을 벗고 다시 나올 때에 차원에 따라서 그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옵니다. 이 공부는 자유자재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지혜롭게 물리가 터져서, 천체 물리가 터져서 우리가 해 나갈 수 있는 그 자유권 말입니다.

 

참회의 참뜻 알고 싶어요

질문 참회란 ‘용서를 빈다’, ‘뉘우친다’는 등의 학적인 뜻이 있습니다. 행법으로는 이참법, 사참법등의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금강삼매경에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나이까?” 하고 아난이 여쭈었을 때 부처님은 ‘진실관에 들 때 모든 죄는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무상임을 관하면 죄과란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죄가 없어지고 번뇌 망상의 마음이 없어지면 이참, 곧 참회가 이루어진다.” 하는데 참회의 진정한 뜻을 알고 싶고, 혹 어떤 도반은 예불 시간에는 참회하라고 하는데 참회와 예불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답변 법회에서 여러 번 한 얘기입니다만, 옛날에 어떤 농부가 논일을 보러 나가다가 보니까 논두렁 옆 숲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았는지 새끼 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본래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들고 있던 삽으로 그 구렁이를 뭉텅뭉텅 끊어버렸습니다. 구렁이야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겠지만 그러나 구렁이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한 가족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이죠. 그런데 훗날 그 농부는 손주를 다섯 낳았는데 모두가 다 불구자였습니다. 큰 아들이 손주를 낳아도 그랬고, 작은 아들이 손주를 낳아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 하겠지만 사실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기구한 인연도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수 대(代)째 내려오는 깊고 깊은 업연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무심중에 저지른 일 때문에 내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모르니까 그저 모르고 받습니다만,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전에 내가 지은 생각이나 행동과 연결되지 않고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요즈음도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내가 지은 모든 업보가 한군데에 입력되어 있다가 인연이 닿으면 솔솔 하나하나 나오는 것이기에 나온 그 자리에 다시 놓아야 앞서 입력된 것이 지워지므로 몰록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인과의 법칙을 다 알고 나서 해결하려고 한다면 때가 늦습니다. 내 앞에 닥쳐오는 대로 모든 경계를 순간순간 되돌려 놓아서 새로이 입력되게 해야 합니다.

그 도리를 믿고 그렇게 한다면 모든 업들은 다 녹게 되는 것이죠. 설사 지난 생 어느 때에 죄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한번 돌려놓는다면 그대로 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되돌려 놓는 수행이야말로 참회 중의 진참회(眞懺悔)요, 공덕 중의 공덕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가릴 것 없이 모두 주인공 한마음에 놓는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참회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을 해도 참회하는 것이요, 법당에서 예불을 모셔도 참회하는 것이요, 남을 위해 한생각 내주는 것도 참회하는 것이니 즉 일체를 그 자리에서 함을 믿고 놓아가다 보면 참회할 것조차 없음을, 놓을 자리조차 없음을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자리를 마음껏 쓰려면…

질문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마치 허공과 같이 꽉 차서 공한 그 자리, 바로 모습 없는 나의 참나가 세상 모든 것을 들이고 낸다는 것을 사무치게 느껴도 보고, 울어도 보지만 여전히 우매한 중생인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습과 이름을 붙들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 정말 죽어서, 항상 둘이 아닌 내 본래 자리를 마음껏 쓸 수 있을는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답변 공부하는 사람들이 빨리 깨쳐야겠다고 하는 그것 또한 착이기 때문에 빨리 깨쳐야겠다는 생각까지도 놓고 그대로 자기 자신을 믿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빨리 깨치고 싶어 하는 것도 욕심이에요. 내가 항상 말을 하듯이 그런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면 그것을 밀고 나가고, 자신이 없다면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요기밖엔 못 디뎠는데 나중에는 저기 먼 데까지 딛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넓어져서요. 차츰차츰 뛰어야 되는 거지 한꺼번에 뛰려면 안 되니까 조그만 거부터 체험을 해 나가시라는 겁니다. 열심히 하나하나 체험을 해 나가시다 보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도 만반의 준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떨 때 여러분을 보면 오관을 통해서 지금 오신통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100% 활용을 못하고 있습니다. 유위법만 활용을 하지 무위법은 활용을 못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인해서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을 욕심 없이,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해야만이 된다는 것이죠. 습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선한 일을 했어도 내가 한 일이 아니요, 악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대의적인 일을 위해서 했다면 악한 일이 아닙니다. 거짓말도 남을 위해서 방편으로 했다면 잠시 거짓으로 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잘 생각해서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타인의 육신이나 내 육신이나 똑같은 중생이란 말입니다. 자기 중생을 자기가 이익하게 만들 수 있어야 남을 이익 되게 할 수 있죠. 그러므로 잘 생각해 봐야 할 점입니다.

그러니 깨달아야만 한다는 그 관념에 머물러서 얼마쯤이나 더 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체험을 해 가면서 턱턱 밀고 나가 보세요. 의심을 하거나 걱정하지 말고요. 그렇게 밀고 나가다 보면 점점 감응이 와서 느끼게 됩니다. 점점 점점 점점 아주 굳어지는 겁니다. 굳어지는 반면에 큰일도 할 수 있는 거고요. 나라에 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그걸 밀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자신이 생깁니다.

 

꿈이 현실로 다가와요

질문 저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2학년 학생입니다. 저에게는 아주 이상한 일이 자꾸 생깁니다. 밤에 꾼 꿈을 다음 날 아침이면 현실로 보게 됩니다. 가족 중에 스님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참 이상합니다. 왜 그런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죽은 사람을 보든지 귀신을 보든지 선신을 보든지 놀라지 말고 항상 둘이 아닌 걸로 안다면, 그렇게 꿈꾸는 것을 두렵고 무섭게 보지 않고 편안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닥쳐오는 그 날짜에 임박해 가지고 꿈이 꾸어졌는데 귀신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둘로 보지 말라 이겁니다. “내 안에서 나를 테스트해 보려고 환상으로 내보내는 작용이다.” 하는 것만 알면 그 자리에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깐 그 자리에다 도로 놔 버린다면 바로 그냥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들 하는데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이건 시험이다,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하고 그냥 거기다 놓아야 합니다. 거기서 다 나오는 거지 어디 딴 데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네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에 속지 마라. 어떤 것이 나오걸랑은 네 주인공에다 모두 일임을 해라.” 이렇게 항상 나는 말해 주는데도, 사람들이 딴 데서 오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고통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둘로 보고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면 안 되죠. 자기 주인공 자리에서 꿈도 꾸게 하고, 또 현실에서 벌어지게도 하는 것이니 ‘아, 나의 근본자리와 항상 한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이렇게 이끌어 주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으면서 ‘주인공, 꿈이 현실로 벌어지는 것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당신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이렇게 돌려놓으면은 참 마음이 홀가분하고 편안할 겁니다.

그리고 학생이 스님의 가족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학생이 이상하고 잘못되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본래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바로 꿈이에요.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자기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어야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할 양으로 주인공이 그렇게 이끌어 주는 거니까 감사할 뿐이죠. 그래서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모든 것에서 주인공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인공이 학생을 이끌어 주는 것이니, 주인공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항상 주인공을 놓치지 말고 살아가길 바랄게요.

우리 학생이 마음이 맑고 순수하니까 그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아마 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참 이 나라에 소중한 사람이 될 거예요. 그리고 학생들은 어린이법회에 참석해서 궁금증이나 어려운 문제들을 스님이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해결을 해 나가고 있으니까 시간이 되면 거기에서 함께 공부를 해 나간다면 훨씬 쉬울 거예요. 그럼 열심히 공부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유·무위법 둘 아니게 보려면…

질문 제가 올릴 질문은 유위법과 무위법을 같이 아우르고 나갈 수 있는 길을 묻고자 합니다. 공부에 진전이 있어 지혜가 생긴다면 유·무위의 세계를 둘이 아니게 차고 나갈 수 있으련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지라 부딪치는 경계마다 일방적으로 유위법, 무위법으로 구분 지어 그것에 착을 두게 되어 한 말씀 여쭙니다

답변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둘로 보지 말라, 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일러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깊이 알고 보면 마음의 과학이야말로 깊고 아름답고 선(善)한 참과학임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법은 무위(無爲)의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과학은 유위법(有爲法)을 다루어 이치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편리한 것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마음법은 보이지 않는 원리, 우리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치까지도 밝혀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완전한 상태로 진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유위행과 무위행이 두루 갖추어져서 우리의 삶은 어떤 일에든 자유롭고 드넓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냥 일반적인 과학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산다면 우리는 끝끝내 우리 자신을 발현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이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는, 우리들의 목표인 열반에 이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시대에, 작게는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이끌면서 가정을, 사회를, 나라를 위해 크나큰 이익을 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자기 자신, 즉 주인공을 찾는 공부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정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그 자리로부터 모든 문제는 풀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만이 나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사회의 문제도, 국가, 인류의 문제도 다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모두에게 마음 안에서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밖에서 찾는다면 그 길은 갈수록 좁아집니다. 밖에서만 찾는다면 분별하고, 다투고, 불행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안으로 깊이 들면 들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진실해지고, 무거워지고, 자비가 흐르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위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광대하고 묘한지, 느껴 보지 못한 분들은 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즉 자기가 죽은 자리에서 나오는 힘인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기 때문에 텅 비었고, 텅 비었으나 거기에서 미묘한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텅 빈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나, 너를 초월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크나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하라는 겁니다. 한군데서 들고 나는 것이니,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바깥으로만 끄달리고 방황하기 때문에 이렇게도 비유하지요. 용광로에 다 낡아서 못쓰게 된 헌쇠를 넣는다면 다시 새로운 갖가지 도구로 재생되어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그와 같이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니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는 지금 세상에 앞장설 수 있는 인등이며 마음의 향기로운 향이며, 밥 한 그릇을 놓고도 모두를 먹이고도 한 그릇이 되남을 수 있는 그런 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위세계, 유위세계를 같이 계합해서 부처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따로 없이 중용을 할 수 있는 것이 자기의 영원한 그 뿌리, 주인공이니 그렇게만 믿고 실천행으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