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는 많으나 구도자는 줄고 있다. 구도자는 있으나 깨달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불교계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에는 해마다 결제 철이 되면 100여 개의 선원에 2000여 명의 스님들이 모여 정진하고 있다.

일생을 오롯이 한길로 매진해온 수행승들도 수두룩하다. 무문관 선원이 날로 늘고 있고 결제와 해제에 상관없이 용맹 정진하는 구도자들이 불교의 밝은 미래의 희망이 되고 있다.

말이 쉽지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의 시간을 잊는 간절심의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100여 곳의 넘는 선원에서 정진하는 2000여 명의 스님 중 깨달음을 이룬 선지식 소식은 쉽게 들려오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깨달음을 이룬 뒤 숨어버리는 은둔자가 있을는지 모를 일이나 깨달음의 생명력은 중생교화로 모아져야 아름다운 회향이 되는 것이다.

구도자는 있으나 覺者는 드문 현실

간절함이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길

선지식(善知識)이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이룬 사람은 참사람을 의미한다. 버리고 비우며 나눔을 생활화 하는 평화로운 사람. 행복과 자유의 참주인공이 참사람이요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지식은 명예와 재색(財色)으로 윤회하지 않는다.

막힘과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누구에게나 빛이 되고 이웃이 되는 참사람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편안한 것이다. 다툼과 경쟁이 없는 평화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중생 곁으로 되돌아오는데 그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흔들릴 때는 흔들리는 자의 손을 잡아 중심을 잡게 하고 헐떡일 때는 헐떡이는 자의 벗이 되고 이웃이 되어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길의 진정한 의미의 안내자가 되어야한다. 막힘과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선지식은 선지식다워야 참다운 선지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선지식이 늘고 있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선원의 안거(安居)경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대접 받는 문화가 그 둘레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가 선원장까지 겸직하는 풍토도 변화를 필요로 하는 그림자이다. 거기다가 화두(話頭)가 전형화 되어 틀에 박힌 정진 형태에 년륜(年輪)만 쌓여가는 병 아닌 병을 앓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화두는 당송(唐宋)시대에 만들어진 화두가 아니라 개개인의 주어진 현실의 의심덩어리가 참 화두인 것이다.

육조(六祖) 혜능은 더벅머리 총각의 행자시절에 선지식으로 인정되어 중국 선불교(禪佛敎)의 참 스승이 됨을 잊지 말 일이다.

쌓여가는 안거 경력보다 날마다 새 출발하는 간절심에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수행이 관습화 되고 생활처럼 선원에 앉아 세월을 삭힌다면 행자 혜능의 육조 출현은 영원한 전설로 남을 터이다.

한국불교의 선원 구조는 구참(舊參)과 신참(新參)이 어우러져 짜여진 시간표 따라 죽비소리에 길들여지는 안일함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선원의 지도자인 조실(祖室)과 방장(方丈)이 문중위주로 자격이 주어져 투표로 결정되는 희극 같은 해프닝이 엄존하는 현실이다. 수행력과 법력(法力)이 투표로 저울질되는 슬프디 슬픈 현실에 선지식 출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스승 밑에서 좋은 제자가 자라는 법이다.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선원의 풍토에 전통과 관례마저 흔들린 지 오래이다.

법력(法力)에도 서열이 있고 조실, 방장에도 조직의 세력화에 기우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다보니 활발발(活潑潑)했던 법거량(法擧量)이 자취를 흐리며 자신감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 스승이고 대중의 뜻이 부처님 뜻으로 받아들이는 승가 공동체의 공통분모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위해서는 또 다른 발심의 또 다른 출가를 해야 한다.

대중의 처소에서 습의(習儀)를 익힌 다음엔 무소의 뿔처럼 홀로 외길을 가는 간절심의 정진(精進)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연을 스승으로 체험을 도반으로 길에서 길을 걸으며 길을 찾는 진정한 의미의 간절심이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임을 잊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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