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련거 거사

“참선을 닦는 사람도 무량수경을 독송해야 합니다. 이 법문은 곧 ‘위없이 깊고 미묘한 선’(無上深妙禪)이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이 곧 자성이고, 정토가 유심(惟心)이기 때문입니다.” - 〈무량수경 합찬(合讚)〉

 

1억 명이 수지하는 ‘무량수경’ 회집

역사상, 염불행자들이 가장 많이 수지독송하는 경은 단연 〈아미타경〉이다. 하지만,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정토 경전은 〈무량수경〉이다. 〈아미타경〉을 소경(小經)이라 하고, 〈무량수경〉을 대경(大經)이라 하여 함께 독송하는 이들도 많지만, 〈무량수경〉의 축소판이 〈아미타경〉이기에 〈무량수경〉을 집중적으로 수지독송하고 사경하는 염불행자들이 늘고 있다. 전세계에서 약 1억 명이 수지독송하는 것으로 알려진 〈무량수경〉이 최근 50여년 만에 폭발적으로 독자 수가 늘어난 것은 단연, 하련거(夏蓮居, 1884-1965) 거사의 공덕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원문이 너무나 상이해 수지하기 어려웠던 〈무량수경〉의 5종 역본을 빠짐없이 회집(會集)한 ‘〈무량수경〉 선본(善本 또는 회집본)’ 즉, 〈불설대승무량수장엄청정평등각경(佛說大乘無量壽莊嚴淸淨平等覺經)〉을 제창하여 〈무량수경〉 수지독송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대덕(大德)이었다.

무량수경 5종 역본 회집

수지독송 중요성 최초 알려

200지회 둔 정종학회 창립

하련거 거사는 정토오경일론(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화엄경 보현행원품, 능엄경 염불원통장, 왕생론)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도 이 가운데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한 염불수행단체를 1939년 창립했는데, 그 단체가 바로 ‘정종학회(淨宗學會)’이다.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지구촌 5대륙에 2백여 지회가 자발적으로 설립되어 활동 중인 정종학회는 〈무량수경〉을 수지독송하는 한편, ‘나무아미타불’ 칭명염불로 세계적인 염불수행 붐을 이끌고 있다.

 

선종과 밀교 통달한 후 정토 귀의

하련거 거사의 본명은 하계천(夏繼泉)이며, 자는 부재(溥齋), 호는 거원(渠園)이다. 거사는 중년 이후 전수염불을 닦으며, 이름을 연거(蓮居)로 바꾸고 호를 일옹(一翁)이라 하였다. 거사는 1884년 3월 20일 산동성 운성에서 청나라 운남제독 하신유(夏辛酉)의 장자로 태어났다. 청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직예지주, 정해지현, 강소지부 등을 역임하고, 신해혁명 후 산동성 각계연합회 회장에 추대되어 산동 독립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하련거 거사는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다양한 서적에 정통하였고, 성상性相(본성과 현상)의 이치에 대해 깊이 연구했으며, 시ㆍ서화 등 예술분야에도 뛰어났다. 중년의 나이에 은밀히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해 선종에서부터 교학까지, 그리고 현교에서 밀교까지 모두 원융하여 걸림이 없었으며, 마지막에는 팔만대장경이 ‘나무아미타불’ 6자로 귀결된다는 확신을 얻어 정토로 귀의하였다.

 

폐관 정진으로 아미타불ㆍ무량광 친견

1925년, 청나라 말기 비적 출신의 장군으로 품행이 악랄한 군벌(軍閥) 장종창(張宗昌)이 산동성의 도독(督魯)이던 시절, 거사에게 근거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재산을 몰수하고 지명수배 명령을 내리자 그 화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44세인 1927년 귀국한 뒤, 거사는 이름을 연거(蓮居)로 바꾸고 오로지 정토 수행에 매진하였다. 사람과 왕래하는 관문 나루(關津)의 문을 닫아걸고, 거처하는 방에서 아미타불 불상을 모시고 일심으로 거룩한 명호(나무아미타불)를 경건히 염불하였다. 10여 년의 간절한 염불정진 동안 감응도교(感應道交; 염불행자의 정성이 아미타불의 가피로 나타남)를 이루어 상서로운 현상이 여러 번 나타났다고 제자들은 전한다.

하련거 거사는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무량한 광명을 보았지만, 그 경계를 공개적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 청말 민국 초의 혼란한 시대상황에서는 불가사의한 가피와 감응을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으리라.

 

‘극락에서 온 보살의 화신’으로 불려

하련거 거사는 〈정어(淨語)〉에서 당시의 염불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한 권의 경전(一卷六字經)/ 굴러서 천년의 암흑을 깨뜨리네(轉破千年暗)./ 남들은 내가 염불한다 말하지만(人云我念佛)/ 나는 불념(佛念)한다 말하겠네(我說是佛念)./ 미혹의 구름, 자욱한 안개 겹겹이 지나가고(迷雲陳霧重重過)/ 문득 맑은 연못에 달그림자 원만하여라(瞥見澄潭月影圓).”

이 게송에서 ‘불념(佛念)’은 자기와 부처님 명호가 혼융일체가 되어 자성미타(自性彌陀)가 스스로 염불하는 이(理)일심불란의 경지이다. 선종과 밀교수행에 두루 달통한 거사의 수행경지는 그가 남긴 어록을 보고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후인들은 그를 ‘극락에서 다시 온 보살의 화신’이란 의미의 재래인(在來人)으로 존중할 정도였다.

 

명호와 하나 된 일심불란 이루면 ‘견불’

1931년, 9·18 만주사변이 터져 국난이 매우 심각해지자, 하련거 거사는 제자들에게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말고 조용한 도량을 정해서 염불에 전념하라고 당부하였다. 거사 역시 더욱 마음을 다잡고 은밀히 수행하였고, 널리 대승을 찬탄하며 정토종을 선양하였다. 거사는 이후 수십 년을 하루같이, 사람들을 교화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불사라 여기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련거 거사는 제자들에게 전수염불을 통해 일심불란(一心不亂)에 이르는 요령을 ‘극락암 염불도량에서’란 시로 제시하기도 했다.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는 구슬 같고, 올라오는 생각은 실과 같아라. 나누어지면 각자 여의고, 합한 즉 꼬치를 이루네. 마음이 부처님과 염을 여의지 않아 실로 구슬을 꿰듯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게 하라. 아직 일심불란이 불가능하면 먼저 염불이 한 덩어리를 이루도록 공부하라. 진실로 부지런하고 전일하면 공부가 효과 있어 저절로 견불(見佛)하리라.”

 

‘무량수경’ 대중화한 정종학회 창립

하련거 거사는 쉼 없는 염불정진 틈틈이 정토 경전과 서적의 집필과 간행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32년부터는 불자들이 윤회를 벗어난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믿음, 발원, 염불행의 3자량(資糧)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5종 〈무량수경〉의 회집(會集)을 시작하였다.

정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하련거 거사는 1939년 〈무량수경〉 수지독송과 ‘아미타불’ 전수염불을 중심으로 한 신행결사인 정종학회를 창립해 본격적인 염불 홍포에 나섰다. 그동안 개별적으로만 이뤄지던 중국의 염불신행이 체계적인 경전 교육과 단체수행으로 자리잡게 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지구촌에 2백여 지회를 가진 글로벌 단체로 성장한 정종학회는 하련거 거사의 직제자인 황념조(黃念祖) 거사의 가르침을 이은 92세의 선지식 정공(淨空) 법사의 영도 아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염불결사로 자리잡았다.

 

찬탄ㆍ관찰ㆍ발원ㆍ회향의 염불법 보급

1940년 2월, 하련거 거사는 병고 중에도 간단한 일일 염불수행법을 담은 〈정수첩요(淨修捷要)〉를 만들어 초발심자들에게 전수하였다. 몸으로 예배하고, 입으로 염송하며, 뜻으로 경문을 염하면서 삼업(三業)을 짓는 사이에 한 번 예배할 때마다 자기(自)와 부처님(他)이 감응할 수 있도록 찬탄ㆍ관찰ㆍ발원ㆍ회향을 포괄하여, 망상이 쉽게 틈을 타지 못하게 하고 정념(正念)이 현전하도록 하였다. 이 수행법은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어, 오늘날도 정종학회의 중요한 수행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종학회 회원들의 수행과 외호 아래 하련거 거사는 1946년, 회집본 〈무량수경〉의 원고를 7년만에 완성하였다. 당시 체한(諦閑), 혜명(慧明) 스님 등 고승들의 인증 하에 거사의 자비와 지혜가 응축되어 마침내 〈무량수경〉 회집본을 발행하게 된 것이다.

20세기의 걸출한 거사이자 정토수행자로 평가 받은 하련거 거사는 〈무량수경〉(선본) 외에도 중요한 저술들을 많이 남겼다. 〈대경합찬(大經合讚)〉 〈정수첩요〉 〈보왕삼매참(寶王三昧懺)〉 〈정어(淨語)〉 〈연종밀초(蓮宗密?)〉 〈관음보전삼종합참(觀音寶典三種合參)〉 등 10여 종의 저서가 명저로 손꼽힌다.

 

정토불서 법보시 당부하며 왕생극락

때는 을사년(1965)12월 4일, 거사의 연세 83세 되던 해였다. 거사는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암시했다.

“나는 대작불사(무량수경 선본)를 끝마쳤으니 이 탁한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이때 거사는 또렷한 정념(正念)을 유지하며 법요(法要)를 열어 보이고, 정토법문의 홍포와 법보시 등의 보시행을 당부하였다.

거사는 열흘 후인 12월 14일에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밤중에도 계속 염불을 하였다. 문득 한 차례 큰 소리로 외치는 염불소리를 듣고 모시던 집안 사람이 놀라서 살펴보니, 곧 이 한마디(나무아미타불) 만덕홍명(萬德洪名) 가운데 편안히 왕생하였다.

 

염불신행 확산으로 중국불교 살아나

하련거 거사의 왕생 이후 직제자인 황념조 거사는 스승의 〈무량수경〉(대경)에 방대한 주해(註解)를 단 〈정토대경과주(淨土大經科註)〉를 편찬하는 등 유업을 이었으며, 정공 법사는 정종학회를 전세계로 확산시켜 〈무량수경〉(선본) 보급에 큰 기여를 하였다. 중국불교가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암흑기를 지나 새로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가운데, 중국과 대만을 넘어 중화권에서 정토종이 중흥의 시대를 맞이한 것은 하련거 거사의 〈무량수경〉 회집불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불교가 염불로 되살아나고 있는 현상을 남의 나라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염불이 살아나야 불심이 살아나고 불교 중흥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한국불교 지도자들도 심각하게 살펴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는 입에 염불하며 틈틈이 정토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신행이 요원(燎原; 불타는 벌판)의 불길처럼 일어나길 발원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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